경상남도 통영시에 전승되고 있는 탈놀이
통영오광대는 경상도 낙동강 일대에 전하는 합천 초계 밤마리 대광대패의 영향을 받은 창원오광대의 연행자인 이화선의 영향으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세시풍속의 일환으로 진행되었으나 현재 놀이적 면모가 더 강화된 내용으로 구성되었으며, 전체 5마당으로 구성되어 〈문둥탈〉, 〈풍자탈〉, 〈영노탈〉, 〈농창탈〉, 〈포수탈〉 등의 과장이 연행된다.
오광대는 경상남도의 낙동강 유역을 중심으로 발달했다. 경상우도에서 오광대가 발달한 지역은 대체로 합천군 초계 밤마리 대광대패의 영향을 받았다는 구전이 전한다. 이들 지역은 시장이나 조창이 발달한 경우가 많다. 여러 증언에 따르면 통영오광대는 100여 년 전 마산사람 이화선(李化善)이 통영으로 이사한 후 창원오광대를 본 따서 만들어서 놀기 시작했다고 한다. 창원오광대 역시 초계 밤마리 대광대패의 영향을 받은 탈놀이이다. 이와 달리 조선시대 통영시에서는 매년 섣달 그믐날 밤에 동헌에서 수군(水軍) 소속 악공(樂工)들이 매귀(埋鬼)를 치고 탈놀이를 했다고 한다. 이때 양반탈ㆍ할미탈(큰어미)ㆍ각시탈(작은어미)ㆍ까마귀탈ㆍ주지탈(獅子)ㆍ비비탈(영노)ㆍ중광대탈(중매귀) 등의 목제가면(木製假面)을 썼다고 한다. 해가 바뀌면 정월보름까지 민가에서 매귀를 쳤는데, 중광대는 매귀꾼들을 따라다녔다고 한다. 종합할 때 통영오광대는 조선 후기에 통제사영(統制使營)에서 관속들이 놀던 탈놀이가 있었고, 초계 밤마리 대광대패의 오광대를 보고 놀았다는 창원오광대에 영향에 의해 1900년대 초에 지역특색을 갖춘 탈놀이로 형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 역사적 변천 과정 통영오광대는 1890년대 이화선(양반역)ㆍ서현우(徐賢宇, 양반역)ㆍ박재규(朴在奎, 말뚝이역)ㆍ이순오(李順五, 할미역)ㆍ이마치(작은어미역)ㆍ최만기(崔萬基, 문둥이역)ㆍ박무일(朴武日, 검정양반역)ㆍ조열규(趙烈圭, 비틀양반역)ㆍ백성노(홍백양반역) 등이 계원이었던 의흥계(義興契)에 의해 유지되었다고 전한다. 통영오광대는 밤마리 오광대를 수용한 창원오광대의 영향을 받았는데 통영오광대로 전해지면서 변화가 확인된다. 마산오광대가 밤마리 오광대에 문둥이 마당을 첨가했고, 다시 통영에 전해지면서 벽사의식무 계통의 마당을 탈락시키고, 양반과장의 등장인물에도 변화가 생겼다. 이러한 변화 과정에서 통영오광대는 더욱 오락화되었다고 한다. 통영오광대의 전승은 1900년대 초 이화선의 활동 시기에 장진국과 더불어 의흥계를 조직해서 진행되었고, 1910년대에는 장용기(張容基, 말뚝이역)가 주동이 된 난사계(蘭社契)가 이어받다. 또한 1920년대에는 장재봉(張在奉, 문둥이역ㆍ말뚝이역)ㆍ오정두(吳正斗, 영노역)ㆍ채구생(蔡九生, 조리중역)ㆍ김진수(金辰守, 사자역ㆍ둘째양반역) 등이 춘흥계(春興契)를 조직해서 이어갔다고 한다. ○ 연행 시기와 장소 통영오광대는 대개 서민층 남자들 중 신명이 많고 음악과 춤에 능한 사람들로 구성된 계원들에 의해서 이어져왔다. 이들은 매귀와 오광대를 함께 하는 조직으로 증언에 따르면 의흥계의 정기총회인 세시절기의 일환으로 정월 14일에 진행되었으며, 그 외에 봄과 가을에 3월 15일 봄놀이로 9월 15일에 단풍놀이로 오광대를 놀았다고 한다. 또한 4월 초 봄놀이에는 ‘사또놀음’을 곁들인 오광대를 놀았고, 놀이꾼들이 시가지를 한 바퀴 돌아서 용화사 뒤 잔디밭에 가서 탈놀이를 했다고 한다. 그 외 기우제 행사의 하나로도 오광대를 논 적이 있었다고 한다. 1920년대 이후 통영오광대 주동인물이었던 장재봉(1899∼1965)은 음력 12월 20일께 의흥계 임시총회를 열고, 계원 중에서 기부금을 받아 매귀에 필요한 기물을 마련하여 정월 2일부터 14일까지 집집마다 돌며 매귀를 쳐주고 받은 기부금으로 14일 밤에 《파방굿》과 《오광대놀이》를 했다고 증언하였다. 오광대는 별도의 공연무대를 마련하지 않고 넓은 평지가 펼쳐진 곳에서 논다. 공연장소의 뒤편 한쪽에 출연자가 가면과 의상을 갈아입을 수 있는 개복청(改服廳)을 설치한다. 그 앞쪽으로 적당한 위치에 악사가 앉고 마당 가운데에서 탈놀이를 한다. 연행할 때 조명은 놀이판의 서너 곳에 횃불과 장작불을 놓아서 밝힌다.
○ 음악적 특징 통영오광대를 연행할 때 대체적으로 춤반주 장단으로 〈덧뵈기춤〉에 굿거리장단을 사용한다. 덧뵈기는 영남 지역의 전통적인 가락으로 3소박 4박 장단에 제3박의 3소박을 강조하는 리듬형태이다. 굳세면서도 남성적인 장단의 특징을 보여준다. 강인하면서도 부드러운 장단에 따라 〈덧뵈기춤〉이 추어진다. 매구꾼들이 연주하는 덧뵈기 가락 외에도 삼현육각을 사용했었던 흔적이 염불ㆍ타령ㆍ도드리 등의 장단들이 나타나는 것이 통영오광대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통영오광대에서 부르는 노래에는 판소리의 영향을 받은 노래가 등장하는데, 〈문둥탈〉 마당의 〈자탄가〉는 진양조장단으로 가창해서 남해안지역의 지역적 특색을 보여준다. 또한 〈풍자탈〉 과장 마지막에 양반들이 말뚝이에게 빌 때 부르는 〈비나이다〉 노래는 2소박 12박의 중모리장단을 사용하기도 한다.
○ 절차 및 주요 내용 통영오광대는 다섯 마당〔科場〕으로 진행한다. 통영오광대 연행본의 경우 채록자에 따라 7마당 혹은 5마당으로 채록하기도 했으나 1963년 이후 5마당으로 구분하여 놀이한다. 마당명칭도 채록자에 따라 다르다. 현재는 국가무형문화재 지정 자료를 기준으로 전승한다. 첫째마당 〈문둥탈〉은 문둥이의 비애를 통해 양반을 풍자하는 것이다. 문둥이가 소고를 들고나와 춤을 추면서 신세를 한탄한다. 문둥이는 자기 조상들은 본래 양반이었으나 저지른 죄가 컸다고 이른다. 둘째마당 〈풍자탈〉은 양반들이 말뚝이에게 농담을 하거나 봉변을 당하는 내용이다. 말뚝이는 첫째양반의 선대는 기생이 여덟이고, 둘째양반은 종의 자식으로 서출이고, 셋째양반은 홍(洪)가와 백(白)가 두 아비가 만들었고, 넷째양반은 어미가 부정을 타서 온 몸이 새까맣게 되었고, 다섯째양반은 어미가 부정하여 손님마마(天然痘疫)가 곰보 흔적을 만들었고, 여섯째양반은 중풍기가 심하여 전신이 비틀어졌고, 일곱째양반은 보살인 어미가 서방질하여 낳았다고 하면서 양반들의 근본을 폭로한다. 반대로 말뚝이는 대대손손 당상벼슬의 양반이라고 호통하다가 용서한다.
셋째마당 〈영노탈〉은 상상의 괴물인 영노가 양반을 잡아먹는 내용이다. 영노는 양반 아흔아홉 명 잡아먹고 마지막 비비양반을 잡아먹어서 득천(得天)해서 용이 되겠다고 한다. 비비양반은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서 양반의 정체성을 버리기까지 하다가 쫓겨 퇴장한다. 넷째마당 〈농창탈〉은 큰어미(할미)와 할미양반과 작은어미(제자각시)의 갈등을 통해 가부장제를 비판한다. 할미양반이 작은어미가 통정하여 아기를 낳는 과정에서 출산 준비를 위해 할미양반이 출타한 사이에 작은어미는 동네 남자들과 바람을 피운다. 또 가출한 할미양반을 찾아 헤매던 큰어미를 만나 작은어미가 출산을 한다. 아기를 어르던 큰어미를 작은어미가 쓰러뜨려 죽인다. 다섯째마당 〈포수탈〉은 담비가 사자에게 잡아먹히고 사자는 포수의 총에 맞아 죽는다. 한 마당의 놀이가 끝나면 등장인물이 모두 어울려 군무를 춘다. 탈놀이의 앞에 사또놀이를 하는 경우도 있으나 일종의 앞놀이로 필수적인 절차는 아니다.
통영오광대 놀이의 내용은 민중의 삶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으며 양반과 파계승에 대한 풍자, 그리고 처첩간의 갈등 등을 다루고 있다. 양반에 대한 말뚝이의 조롱은 매우 신랄하지만 파계승에 대한 풍자는 약한 편이다. 춤이 주가 되며, 자연스러운 동작과 대사(臺詞)와 노래[唱]를 곁들이면서 연행한다. 〈풍자탈〉 마당의 대사는 대체로 고정적인 데 비해 그 외 마당의 대사는 놀이할 때마다 변화가 많다. 출연자의 흥과 관객의 반응에 따라서 더 넣거나 뺄 수 있어서 가변적이다. ○ 등장인물과 탈 배역은 1970년대 초까지 총 31역이었다. 문둥이ㆍ말뚝이ㆍ원양반ㆍ둘째양반ㆍ홍백양반ㆍ비틀양반ㆍ곰보양반(손님탈)ㆍ검정양반(흑탈)ㆍ조리중ㆍ팔선녀(8)ㆍ영노ㆍ영노양반ㆍ할미양반(영감)ㆍ할미ㆍ제자각시(작은어미)ㆍ상좌(2)ㆍ봉사ㆍ상주(2)ㆍ포수ㆍ몽돌이(끝돌이)ㆍ사자ㆍ담비 등이다. 현재는 22역으로 연행한다. 탈은 바가지ㆍ나무ㆍ대나무 등으로 만든다. 《오광대놀이》를 한 뒤에 소각하지 않고 보관한다. 1909년 화재로 오동나무 가면이 소실된 적이 있었다. 지금도 놀이를 시작할 때마다 간단하게 가면에 고사(告祀)를 지낸다.
○ 악곡 구성 사용하는 악기는 꽹과리ㆍ징ㆍ북ㆍ장구ㆍ호적ㆍ젓대ㆍ피리ㆍ해금 등이나 지금은 주로 매구인 꽹과리ㆍ징ㆍ북ㆍ장구 등의 타악기와 태평소가 주로 쓰인다. 예전에 4월초 봄놀이에는 삼현육각(三絃六角)의 풍물잡이를 앞세우고 길놀이를 하면서 진행되었다고 한다. 반주곡은 타악기를 중심으로 굿거리로 네 마치의 굿거리를 중심으로 사용한다. 그 외에 세마치ㆍ염불ㆍ타령ㆍ도드리 등의 장단을 장면에 따라 곡을 바꾸어가며 연주한다. 노래는 극의 전개에 따라 필요할 때 부르는데, 〈문둥탈〉 마당에 “자탄가”, 〈농창탈〉 마당에서는 “사랑가”과 “아리랑” 등을 부른다.
○ 춤 구성 춤은 ‘〈덧뵈기춤〉’으로 경상남도의 전통적인 춤사위이다. 덧뵈기춤사위를 바탕으로 배역에 따라 그 성격을 표현하는 춤으로 나타난다. 통영오광대에서 가장 특징 있는 춤은 〈문둥이춤〉으로 문둥이의 생태와 애환을 표현한다. 〈말뚝이춤〉은 동작과 도약이 크고 베김새가 힘찬 건무(健舞)이다. 장재봉은 〈문둥이춤〉과 〈말뚝이춤〉의 명수였다. 양반춤은 유연한 동작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나 원양반을 제외한 양반의 춤은 희극적인 인물의 성격에 따라 우아한 멋보다 익살스러운 맛을 드러낸다. 〈작은어미(제자각시)춤〉과 〈할미춤〉은 남성이 배역을 맡아서 춤을 춘다. 〈제자각시춤〉은 여성무의 우아함에 맵시를 부려 교태를 보이고, 〈할미춤〉은 팔을 크게 벌리고 엉덩이를 심하게 흔들어 외설적인 동작으로 익살스럽게 춘다. 남성이 여성을 나타내면서 추는 춤이라는 점에서 패러디적 요소가 강하다. 통영오광대에서는 모든 등장인물이 함께 어울려 추는 군무가 각 과장이 끝난뒤 또는 대목과 대목 혹은 마당과 마당을 연결하는 구실로 추어진다.
통영오광대는 1900년대 초반부터 계를 통해서 전승해온 연행자들의 명단의 분명한 것이 특징이다. 이로 인해서 전승계보를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통영오광대의 구성 중 양반의 수가 많고 양반의 이름도 매우 풍자적이다. 대부분의 가면극에서 세 명의 양반이 등장하고 많은 경우에도 다섯을 넘지 않는 데 비해, 통영오광대에서는 고성오광대와 함께 가장 많은 일곱 명의 양반이 등장한다.
다른 탈놀음에 비하여 양반에 대한 풍자와 조롱이 심하게 표현되는데, 양반의 이름에서도 이러한 비판의식이 드러난다. 등장한 양반들은 비정상적인 신체적 특징으로 표현되는데, 원양반ㆍ둘째양반ㆍ홍백양반ㆍ먹탈(검정양반)ㆍ손님(곰보양반)ㆍ삐뚜르미(비틀양반)ㆍ조리중 등의 작명(作名)이 양반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폭로하는 의식이 반영되어 있다.
〈영노탈〉마당과 〈포수탈〉 마당에서 동물 또는 상상의 존재들이 다수 등장하는 특징이 있다. 이때 통영오광대의 영노는 타 지역의 비비와 같으면서 인간(양반)을 잡아먹는 결말로 차별성을 갖는다. 사자와 담비는 벽사의식무적 내용을 배경으로 한 것이지만, 통영오광대에서만 포수의 등장으로 사자가 총에 맞아 죽는 내용으로 볼 때 동물퇴치적 성격이 있으나 퇴색하고, 놀이적 면모가 더 강하다고 할 수 있다.
〈농창탈〉의 경우 타 지역의 〈할미 마당〉에 비해 일물 구성이나 갈등구조가 복잡한 양상을 드러낸다. 〈할미 마당〉에서 새로운 생명에 대한 예찬은 아이를 통해서 드러난다. 큰어미인 할미가 극 중에서 무당으로 설정되어서 영감을 찾기 위해 〈용왕산제굿〉 등 무속적 행위를 하는 데서 무계 출신과 오광대 놀이 집단과의 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세시절기에 연행되던 것에서 점차 봄과 가을에 놀이적 요소가 강조되는 것을 통해 탈놀이의 기능에 대한 변화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무형문화재 이야기 여행』, 문화재청, 2016. 『(중요무형문화재) 탈춤대사집』, 한국문화재보호협회, l981. 『통영오광대』, 화산문화, 2001. 『한국전통연희사전』, 국립민속박물관, 2014. 『한국민속예술사전: 민속극』, 국립민속박물관, 2016. 강용권, 『야류ㆍ오광대』, 형설출판사, 1977. 정상박, 『오광대와 들놀음 연구』, 집문당, 1986. 송석하, 『한국민속고』, 일신사, 1960. 문화재청(www.cha.go.kr) 문화재청국가문화유산포털(www.heritage.go.kr) 통영오광대 홈페이지(www.okwangdae.com)
김은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