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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사전(보기) | 국립국악원

국악사전

선비음악

  • 작성일2014-11-16

【정의】조선 조 중기 이후 식자층에서 즐겼던 음악을 가름하는 말.

【유래 및 역사】선 전기에는 왕권 강화를 위해 유교를 국가의 이념으로 삼았으며, 음악을 통치를 위한 기능적 수단으로 활용하였다. 즉 악은 풍속을 변화시키고 백성들을 화합하기 위한 이념이었기 때문에, 모든 국가의례에는 반드시 악을 사용했으며,악 정책이나 음악에 대한 생각 등이 모두 유교의 이념을 실현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었다. 이런 것을 이른바 ‘예악 사상’이라 하는데, 예악 사상에 묶이는 음악은 자연히 감성적인 음악과는 거리가 있으므로 그 음악은 감정의 기복이 크지 않은 쪽으로 제한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음역은 한 옥타브 반을 넘지 않았고, 속도가 빠르지 않았으며, 음형도 단순하고, 경건하고 장중하며 ‘낙이불류(樂而不流)하고 애이불비(哀而不悲)’한 음악이 그 시대 음악의 통념이었다.

 그러나 조선조 후기에는 이러한 사상이 인간 중심적이고 보다 감상적인 것으로 바뀌게 된다. 이익(1681~1763)은 성호사설에서 “사람들이 싫증을 내어 느린 음악을 버리고 빠른 음악을 좋아하는” 점을 지적하고 있고, 홍대용(1731~1783)은 “음악의 미(美)는 미(味)와 같다”고 해서 음악의 아름다움이 관념적인 것이 아니고 감각을 통해서 느끼는 것이라고 보았다.

 정래교(1681~1759)의 완암집에는 가자 김천택, 금사 김성기전이,(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강세황(1713~1791)의 표암유고에는 양금과 관련한 기록이, 홍대용(1731~1783)의 담헌서에는 청나라에서 견문한 음악 관련 기록들이 있다. 또 성대중(1732~1812)의 시문집 청성집에는 그가 교유한 홍대용, 박지원, 김억, 김용겸, 등 유춘오 악회에 관한 풍경이 기록되어 있고, 이영유(1743~1804)의 문집 운소만고에는 김성기에 관련된 내용이 있다.

 또 1610년 양덕수가 편찬한 양금신보는 거문고 익보로서 선 전중 의식에 사용된 음악이 아닌 순수 간 음인 만대엽, 중대엽 등 가곡이 실려 있고, 새로운 표현 양식인 역안법이 정착되어 있기도 하다.

【내용】한국 전통음악은 음악사적으로 조선조 전기 예(禮)에 속하는 악(樂)으로 각종 의식과 함께 연주되었던 궁중음악과, 중기 이후 민간에서 성장하게 되는 민간 음악으로 크게 구분되는데,비 음악은 이 두 부류의 가운데에 속하는 성격을 가진 음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조선조의 지식층이라 할 수 있는 선비들은 조선조 전기의 음악적 생각을 따르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감성적인 음악 쪽으로도 생각을 열어놓다. 그들은 거문고(금, 琴)를 직접 연주하지 않더라도 나쁜 것을 금(禁)한다는 뜻으로 집에 비치해두기도 했으며, 거문고를 직접 배우거나 시를 지으면서 음악을 즐기기도 했다. 그리고 음악을 잊지 않기 위해서 직접 악보를 남기거나 시문집 등에 관련 기록들을 남겼다. 선 후 문집에는 당시 여항의 문인이나 유명 악사, 화가 등의 전기가 기록되어 있다. 조선조의 문인들은 직업 전문가가 아닌 애호가로서 음악을 즐겼고, 오락보다는 수신(修身)을 위한 목적으로 실내에서 가능한 음악을 즐겼다.

 이들은 가곡이나 영산회상 등을 주로 즐겼는데, 소위 풍류방 음악으로 지칭된다. 풍류방의 주인은 주로 거문고를 연주하고 그 밖의 다른 악기들을 연주할 수 있는 직업 전문가를 초빙해서 음악회를 열었다. 현재 연주되는 영산회상 중 첫 곡인 상령산에서는 맑은 마음으로 관조하는 듯하여 조선조 선비의 중용의 덕과 온화함이 느껴지며, 조금 빨라진 뒷곡으로 가면 완만한 흥취가 일어난다.

【필자】김해숙

【참고문헌】전지영,조선시대음악담론(민속원,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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