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관(華冠)
왕실과 반가 여성들이 예복을 입을 때, 혹은 궁중에서 춤을 출 때 정재 여령 등이 착용하는 화려하게 꾸민 관모(冠帽)
화관이란 넓은 뜻으로는 꽃이나 보석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관모를 의미하며, 좁은 뜻으로는 조선 시대 왕실이나 반가 여성들이 예복에 착용하던 관모, 혹은 궁중잔치에서 정재여령이 착용하던 관모이다. 조화(造花)를 꽂아 장식하거나 그림을 그려 꾸민 것은 춤을 출 때 사용되며, 예복용으로는 각종 보패류로 장식한 화관을 쓰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개성과 평양에서는 신부(新婦)가 혼례에 견사(絹絲)로 만든 꽃으로 꾸민 화관을 썼다. 근대 이후로는 무용수가 예복용 화관을 착용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화관은 아름다운 꽃을 머리에 장식하고자 하는 자연스러운 욕망에서 발생한 것으로 고대부터 여러 지역에서 다양하게 나타난다. 우리나라에서도 통일 신라 시대와 고려 시대에 사용되었던 기록은 있지만, 당시의 화관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 없다. 조선 1431년(세종13) 박연(朴堧)이 회례(會禮)에 쓰이는 정재(呈才)관복 모형을 만들라는 내용 중 화봉관(花鳳冠), 부용관(芙蓉冠) 등의 명칭이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처음 나타난다. 부용관은 『악학궤범(樂學軌範)』 무동관복도설(舞童冠服圖說)에 그림과 기록이 있다. 한편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가화(假花) 만드는 장인인 화장(花匠)을 여섯 명 둔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궁중행사의 장식용만이 아니라 관모에 장식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후 《화성의궤도(華城儀軌圖)》에 화관의 채색 그림이 보이며,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1795) 복식도에는 황초삼(黃綃衫)ㆍ홍초상(紅綃裳) 등과 함께 여령의 복식 중 하나로 그려져 있다.
순조 이후 고종 때까지 『진연의궤(進宴儀軌)』ㆍ『진찬의궤(進饌儀軌)』 등 문헌에도 여령복식ㆍ춘앵전(春鶯囀) 복식으로 화관이 사용된 기록이 남아있다. 『기축진찬의궤(己丑進饌儀軌)』(1829)까지는 화관에 큰 변화가 발견되지 않으나, 『무신진찬의궤(戊申進饌儀軌)』(1848)의 화관부터는 족두리 정도로 작아졌다.
한편 이왕직아악부(李王職雅樂部) 시기부터는 여기들이 무용에 예복용 화관을 착용하기 시작하였다. 현재의 공연에서는 예복용 화관을 쓰는 경우도 있지만 예복용과는 구별되는 춘앵무용 화관을 착용하기도 한다.
○ 쓰임 및 용도
화관은 착용자와 외형적 양식에 따라 예복에 착용하는 의례용(儀禮用)과 궁중정재에서 착용하는 정재용으로 나눌 수 있다. 예복용 화관은 혼례에 신부가 원삼이나 활옷 등의 대례복을 입을 때, 혹은 왕실이나 반가에서 당의와 같은 소례복을 입을 때에도 착용되었다. 정재용 화관은 궁중정재에 참여하는 여기(女妓)와 동기(童妓)의 기본복식이었으며, 춘앵무(春鶯舞) 등에서도 빠지지 않고 착용되는 관모이다. 용도에 따라 다양한 형태가 있었다.
○ 구조와 형태
화관은 기본적으로 두꺼운 종이로 틀을 만들며 겉을 검은 비단으로 싸고 그 위에 장식을 올린다. 예복용 화관은 양옆이 개방된 구조이며, 관리들의 양관(梁冠)과 비슷한 모양인데, 위에 옥판(玉板)과 석웅황(石雄黃)ㆍ밀화(蜜花)ㆍ비취(翡翠)ㆍ진주(眞珠) 등의 보석을 올린다. 궁중정재에서 동기(童妓)용 화관도 예복용 화관과 비슷한 구조이지만 예복용 화관의 경우 보패류를 올려 장식하는 것과 달리 보패류의 장식이 없다.
반면 여령(女伶)의 화관은 육각형에 가까우며, 민간에서 사용하던 각 족두리에 가까운 형태이다. 특히 춘앵무 여령의 화관은 양관이나 족두리와 다른 형태이다. 이밖에도 넓은 의미의 화관에 속하는 운관(雲冠), 부용관(芙蓉冠) 등도 있었다.
조선 후기 의궤기록에 실린 화관의 형태를 보면 『기축진찬의궤(己丑進饌儀軌)』(1829)에는 일반 여령의 화관과 춘앵전 여령의 화관에 구분이 없었다. 『원행을묘정리의궤』와 유사한 모양으로 상당한 양의 꽃과 비녀가 사용된 화려한 것이었다. 그러나 『무신진찬의궤(1848)』 부터는 춘앵전 여령과 일반 여령의 화관, 동기의 화관이 모두 모양에 차이가 생겨났다. 동기복식에 수록된 화관은 예복용 화관처럼 관리의 양관과 비슷한 구조이다. 여령의 화관은 각 족두리와 비슷한 형태이고, 춘앵전에 착용하는 화관은 틀만 다른 것이 아니라 좌우에 복숭아꽃을 뜻하는 홍도화(紅桃花)와 당가화(唐假花) 장식도 올라간 형태였다.
ㅇ 재질 및 재료
『무신진찬의궤』 악기풍물(樂器風物)에 화관의 재료와 소요량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 중 춘앵전 차비(差備) 화관을 보면 “화관 한 건에 흑모라(黑冒羅)ㆍ생베(生布)가 사용되었고 여기에 금화문(金花紋)을 장식하는데 금박 다섯 장, 피금(皮金) 1/2장, 입모자(笠帽子) 두 닢(立), 도금한 금수인(金壽人) 한 개가 소요되었다. 그리고 두석화잠(豆錫花簪) 한 개와 쪽비녀 두 개, 비녀댕기(纓)은 주황다회 한 건인데 길이가 3자이고 금종이 한 장이 필요하였다. 그 외에 개구리첩지〔接只蛙簪〕를 꽂았으며, 수공화(首控花) 네 가지에는 당가화(唐假花) 여덟 가지를 더하여 꽂은 것이며, 화공(花孔) 여덟 개는 가는 구리실 2자를 사용하고 화관의 뼈대는 자작나무(椴木) 1척 5촌을 사용하였다. 화관에는 복숭아꽃을 뜻하는 홍도화(紅桃花)와 당가화(唐假花)를 더하여 만들었다.”고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 착용방식
《원행정리의궤도》(1795)의 화관과 같이 어여머리 같은 가체에 꽃장식을 꽂는 형식의 화관은 춘앵무 여령의 화관으로 순조 때인 『기축진찬의궤』(1829)까지 나타난다. 가체를 높이 올리고 그 위에 화관을 얹는 형식은 근대 사진 속 반가 혼례의 신부 모습에서도 확인되기도 한다.
한편 『무신진찬의궤』부터는 족두리와 같은 작은 화관이 여령복식은 물론 춘앵무에도 착용되었다. 쪽 머리에 화관을 얹은 것으로 보인다. 쪽 머리의 경우 첩지 위에 앉히는데, 화관의 양옆에는 비녀 구멍이 있어 작은 비녀를 엇갈리게 꽂아 머리에 고정시켰다.
되기도 한다.
#9 이미지
한편 『무신진찬의궤』부터는 족두리와 같은 작은 화관이 여령복식은 물론 춘앵무에도 착용되었다. 쪽 머리에 화관을 얹은 것으로 보인다. 쪽 머리의 경우 첩지 위에 앉히는데, 화관의 양옆에는 비녀 구멍이 있어 작은 비녀를 엇갈리게 꽂아 머리에 고정시켰다.
『무신진찬의궤』 이후 화관의 크기와 형태에 변화가 생긴 것은 영정조 때 가체(加髢) 금지로 인해 일반 여성들의 머리모양이 순조(1800~1834)년간에 쪽 머리로 변화한 영향이 정재복식에도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조풍연(해설), 『사진으로 보는 조선시대 생활과 풍속』, 서문당, 1986. 강민정, 「조선시대 궁중정재에 나타난 동기복식연구」, 단국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6. 오혜경, 「조선시대 무동복식에 관한 연구」, 단국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6. 홍나영, 「화관에 관한 연구」, 한국복식학회 Vol.50No.3, 2000.
홍나영(洪那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