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기의 당악정재 중 하나로, 세종(世宗)이 명나라 황제에게 왕의 승인 문서를 받은 것을 기뻐하며 감사하는 내용의 춤
조선 전기의 하황은은 명나라 황제로부터 세종이 왕으로 인정하는 문서[고명(誥命)]를 받은 것에 감사하는 내용을 담은 춤이다. 주로 사신을 위로하는 잔치인 사신연 때 연행되었다. 조선 후기 영조(英祖) 19년(1743)에 하황은의 악장을 명나라로부터 조선의 국호를 받은 일과 임진왜란 때 지원군을 보내 준 명나라에 대해 감사하는 내용으로 수정했다. 이후 하황은은 왕실 가족 중심 잔치인 내연(內宴)에 사용하는 춤으로 연행되었다.
하황은은 조선 전기 1419년 세종(世宗, 1397~1450, 재위 1418~1450)이 명나라 황제로부터 조선 국왕으로 인준을 받아 나라 사람들이 기뻐하며, 황제에게 감사를 표현한 내용의 당악정재(唐樂呈才)이다. 당시 상왕이었던 태종(太宗, 1367~1422, 재위1400~1418)이 변계량(卞季良, 1369~1430)에게 명하여 하황은을 짓게 하였는데, 장차 사신을 대접하는 자리에 쓰기 위한 것이었다. 창작 배경은 서문에 “하황은은 석명(錫命)을 받았기 때문이다. 전하께서 부왕의 명령을 받들어 국사를 임시 통치하시다가 이윽고 황제의 고명을 받았기에, 나라 사람들이 즐거움이 넘치어 하황은을 지었다”고 밝혀져 있다.
조선 전기는 명나라에 대한 사대(事大; 크고 강한 나라를 섬김) 외교를 통해 국가의 평화와 안정을 꾀하던 때이므로, 명 황제의 조선 국왕 인준은 국가의 존폐에 영향을 미치는 매우 중대한 일이었다. 하황은은 명 황제가 조선 국왕을 인준한 것에 대해 감사하는 글을 족자에 써서 사신에게 보이려는 의도로 만들어진 춤으로, 사신을 대접하는 연향에 사용되었다. 1537년(중종 32)에도 사신연 때 〈수명명(受明命)〉ㆍ〈하성명(賀聖明)〉과 함께 하황은을 공연한 기록이 있다.
조선후기 영조(英祖, 1694~1776, 재위 1724~1776) 대에는 하황은의 악장을 일부 수정하여 공연하였다. 1743년(영조 19)에 자성(慈聖; 임금의 어머니. 숙종의 계비 인원왕후(仁元王后, 1687~1757)에게 진연을 올릴 때, 이후 1795년(정조 19)의 혜경궁 홍씨(1735~1815)의 회갑연인 봉수당 진찬 때에도 공연하였다. 1829년(순조 29)의 순조의 사순(四旬)을 축하하는 내진찬에서 공연했다. 하황은은 1848년(헌종 14)의 내진찬과 1857년(철종 8)ㆍ1868년(고종 5)ㆍ1873년(고종 10)ㆍ1877년(고종 14)ㆍ1887년(고종 24)ㆍ1892년(고종 29)까지 모두 내진찬에서 여령에 의해 공연되었다. 이후 전승이 단절되었다가 1981년 5월 19일 국립국악원 주최, ‘전통무용 발표회’에서 김천흥(金天興, 1909~2007)에 의해 재현 안무되었고, 이후 국립국악원 무용단에서 전승하고 있다.
하황은은 족자를 든 한 명, 죽간자를 든 두 명, 의물을 든 스물한 명, 선모 한 명, 협무 여섯 명으로 구성되어 음악의 절차에 따라 춤춘다. 조선전기『악학궤범(樂學軌範)』(1493)에서는 의물(儀物)을 든 스물한 명이 무용수를 둘러 선 가운데 춤이 연행되는 형식으로 웅장하고 화려하게 구성하였다. 조선 후기 기록에는 의물의 등장이 생략되었으며, 실제 춤과 노래를 연행하는 인원은 족자를 든 한 명과 죽간자를 든 두 명, 선모 한 명과 협무 여섯 명으로 구성되었다.
선모 역할의 무용수 한 명을 중심으로 무용수 여섯 명은 좌우로 나뉘어 서는 초입배열과 선모를 중심으로 무용수 여섯 명이 두 명씩 북ㆍ서남ㆍ동남으로 원을 만들어 서로 대무하는 작대도를 이룬다. 주요 춤동작은 사수무(四手舞)ㆍ팔수무(八手舞)ㆍ오양선무(五羊仙舞)가 사용되었다.
당악정재인 하황은은 족자와 죽간자가 처음 입장할 때와 퇴장 때 구호(口號)를 연행하고, 선모는 족자에 쓰인 글귀를 노래한다. 하황은의 창사는 조선 전기 『악학궤범』의 것과 조선 후기 영조가 수정한 것이 있는데, 조선 전기의 악장은 『세종실록』 권3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거룩하신 우리 시조, 우리 동방 이루시니, 대를 이을 아들 손자, 명철하신 임금일레. 금옥같은 그 모습에 타고 나신 총명이라. 효도하고 공순하며, 어질고 진실하며, 학문을 널리하여, 날로 더욱 독실하니, 밝고 밝은 부왕께서, 아드님을 아는지라, 근면에 힘이 겨워, 나라 일을 맡기셨네. 황제 폐하 옳다시고, 밝은 명령 내리시니, 머리 숙여 임금이 절하며, 신성하신 황제시어, 신성하신 황제시여, 조선에 은혜 넘쳐, 모두 다 춤을 추며, 그지없이 감격하네. 종묘사직 이어이어, 억만년을 누리소서.” 그밖에 선모와 좌우의 협무 여섯 명이 사언팔구로 된 「하황은사」 3장을 〈금전락(金殿樂) 령〉에 맞추어서 노래하는데, 이 선모 치어가 『악학궤범』에 수록되어 있다. 치어는 하황은 족자에 기록된 것으로, 사신에게 전달하려던 목적으로 불렸던 것으로 보인다. 세종이 부왕(父王)인 태종의 명령으로 국사를 임시로 맡아 수행하고 있다가 마침내 명 황제의 고명(誥命)을 받았기에, 황명에 감사하며 나라 사람들이 기뻐하여 이 하황은을 지었다는 내용이다. 조선 후기의 영조는 선모의 치어를 일부 개작하였는데, ‘조선’이라는 국호를 내린 황제에게 감사하며, 임진왜란 때 도움 주어 나라가 중흥할 수 있었던 일을 찬미한 내용이다. [죽간자 구호] 特荷天子之恩, 乃正厥位. 특하천자지은, 내정궐위. 載歌吾君之德, 以矢其音. 재가오군지덕, 이시기음. 敢冒慈儀, 庸陳口號. 감모자의, 용진구호. [죽간자 구호] 특별히 천자의 은혜를 입어 왕위를 바로잡았습니다. 이에 우리 임금님의 덕을 노래해 그 말씀을 펼쳐 보겠나이다. 감히 임금님의 자애로운 의식에서 구호(口號)를 올립니다. [선모 치사] 國祖開創, 受皇命于朝鮮. 국조개창, 수황명우조선. 逮于中葉, 再蒙恩於我皇. 체우중엽, 재몽은어아황. 新製其章, 永垂皇恩. 신제기장, 영수황은. [선모 치사] 국조(國祖)께서 나라를 처음 여시고 황제의 명(命)으로 나라 이름 조선(朝鮮)으로 받으셨고 중엽에 이르러 우리 황제로부터 다시 은혜를 입어 새로 노래를 지었나니 영원히 은혜를 내리소서. <수악절 창사> 受命朝鮮兮, 定都漢陽. 수명조선혜, 정도한양. 九章輝暎兮, 八音鏘鏘. 구장휘영혜, 팔음장장. 繼繼承承兮, 垂恩東方. 계계승승혜, 수은동방. 再造藩邦兮, 景受皇恩. 재조번방혜, 경수황은. 朝宗屹然兮, 遙拜五雲. 조종흘연혜, 요배오운. 新製其章兮, 續編舊文. 신제기장혜, 속편구문. 重熙綿綿兮, 於萬其年. 중희면면혜, 오만기년. 追慕聖德兮, 繼述光先. 추모성덕혜, 계술광선. 敬作歌頌兮, 拜獻禮筵. 경작가송혜, 배헌예연. <수악절 창사> 나라 이름 조선(朝鮮)으로 정하라는 명을 받들고서 한양 땅에 도읍을 정했으니, 구장(九章)[면류관과 곤룡포에 그리거나 수놓는 9가지 무늬]이 찬란하고 팔음(八音)[쇠․돌․실․대나무․바가지․흙․가죽․나무로 만든 악기의 소리]이 맑게 울리는도다. 자자손손 대대로 동방에 은혜를 내리시고 번방(藩邦, 朝鮮)을 다시 살리시매 황은(皇恩)을 크게 받았으니, 조종(祖宗)이 산처럼 우뚝 서서 멀리 황제 계신 곳에 절을 올린 뒤 새로 노래를 지었으되 옛 글을 이어 엮었노라. 훌륭한 임금이 끊임없이 나오시어 수만 년에 이르도록 성덕을 추모하고 선왕의 덕을 계술하고 빛내고자 공경히 찬송하는 노래 지어 예(禮) 갖춘 잔치에 절하고 올립니다. [죽간자 구호] 式燕以娛, 禮聿成於旣洽. 식연이오, 예율성어기흡. 俾昌而熾, 壽願享於無疆. 비창이치, 수원향어무강. 樂節將終, 拜辭小退. 악절장종, 배사소퇴. [죽간자 구호] 잔치 베풀어 즐겼으니, 예도 흡족히 이루어졌나이다. 번창하고 불꽃처럼 타오르게 하시니, 끝없이 수를 누리시기를 바라옵니다. 음악이 이제 끝나려 하매 절하며 하직인사 올리고 잠시 물러가렵니다. - 원문출처: 김천흥, 『정재무도홀기 창사보1』번역: 강명관
『악학궤범』에 기록된 하황은의 반주음악은 당악기로 연주하는 당악 계통의 음악이다. 곡목은 〈회팔선인자(會八仙引子)〉·〈금잔자최자(金盞子嗺子)〉·〈금전악령(金殿樂令)〉· 〈중강령(中腔令)〉·〈서최자(瑞嗺子)〉의 순서로 구성되었다. 영조 이후의 하황은 반주 음악은『정재무도홀기』에 〈여민락령〉과 〈향당교주〉로 명시되어 있다. 현재 국립국악원에서는 〈여민락〉·〈보허자령〉·〈타령〉·〈자진타령〉·〈세령산〉을 연주한다.
조선 전기 하황은 복식은『악학궤범』에 수록되어 있는데, 일반적인 여령 복식을 착용한 것으로 보인다. 흰색바지[襪裙]와 남색저고리를 입고 홍색비단에 금화문을 박은 갖가지 색의 끈 여덟 가닥을 드리운 치마를 허리에 두른다. 그 위에 단의(丹衣)를 입고 허리띠[帶]를 맨다. 신발은 홍색으로 된 비단신발[鞋兒]을 신는다.
조선 후기 여자 무용수 복식은 〈조선 시대 진연 진찬 진하병풍 무신진찬도병〉의 채색 그림을 통해 알 수 있다. 머리에 화관(花冠: 꽃이 달려있는 관)을 쓰고 황초단삼(黃綃單衫: 황색으로 된 소매가 짧은 겉옷), 홍초상(紅綃裳: 홍색 허리치마), 남색상(藍色裳: 남색치마), 홍단금루수대(紅緞金縷繡帶: 홍색에 금색 수가 있는 띠), 초록혜(草綠鞋: 초록색 신), 오색한삼(五色汗衫: 다섯 가지 색의 한삼)을 착용하였다.
의물(儀物)은 족자(簇子)ㆍ죽간자(竹竿子)ㆍ인인장(引人仗)ㆍ정절(㫌節)ㆍ용선(龍扇)ㆍ봉선(鳳扇)ㆍ작선(雀扇)ㆍ미선(尾扇)ㆍ개(蓋)가 사용되었다.
하황은의 창작 배경은 조선전기 동북아시아의 정치적 상황과 연관되어 있다. 당시 중국과 조선은 책봉과 조공의 관계에 있었는데, 이는 속국이라는 개념보다는 상대 국가의 왕에 대한 지지 의사를 표명하는 것과 유사한 행위였다. 세종이 명나라로부터 조선의 왕으로 고명 받은 것을 악장과 춤으로 표현한 것은 대외적으로 세종의 정당성을 널리 알리고 중국과의 외교 관계를 강화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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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영(金惠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