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무(葉舞)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향악정재의 하나로, 소매를 뾰쪽하게 말아 잡거나 검(劍)을 집어 들고, 혹은 오색 한삼을 끼고 첨수(尖袖)라는 무구(舞具)를 들고 추는 춤
조선 후기에 창제된 향악정재로 처음에는 무구 없이 손바닥을 뒤집거나 엎으며 추는 엽무의 형태로 추기도 했으나, 첨수무로 개칭되면서 시기 및 연향에 따라 변화를 주어 추었다. 무용수의 구성과 무구에 따라 소매를 말아 잡고 추는 춤, 첨수라는 무구를 들고 추는 춤, 검을 잡고 추는 춤 등 크게 세 가지 형태가 있다.
첨수무는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1797)에 처음 등장하는데 그 때에는 손에 아무것도 들지 않고 손바닥을 뒤집거나 엎으며 추었기 때문에 속칭 엽무라고도 불렸다. 춤의 형태에 있어서도 순조(純祖, 1790~1834, 재위 1800~1834) 때에는 검을 들거나 첨수라는 뾰족한 삼각형의 무구를 들고 추는 시대별 연향별로 변화를 주어 추어진 춤이다. 『원행을묘정리의궤도』에 의하면 두 명의 여령과 두 명의 동기가 둘씩 마주하여 상대와 겨루는 형태로 춤을 춘다. 순조 무자년(1828)에는 무동 두 명이 양손에 검을 잡고 추었고, 순조 기축년(1829)에는 무동 두 명과 여령 네 명이, 고종 정해년(1887)에는 여령 네 명이 ‘첨수’라는 무구를 들고 춤을 추었다. 즉, 첨수무는 두 명, 네 명으로 구성되었으며 무구로는 첨수 또는 검을 잡거나, 혹은 소매를 말아 잡고 추는 등 변화를 주어 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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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에는 국립국악원 주도하에 1983년 김천흥(金千興, 1909~2007)의 재현 안무로 무대 예술화되어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다. 당시의 첨수무는 검을 잡고 춘 춤으로 『정재무도홀기』를 바탕으로 하여 무대화한 두 명의 검기무로, 중간에 악사가 검을 들고 나와 바닥에 놓으면 무용수가 그 검을 잡고 춤을 추었다.
첨수무는 동일한 춤 이름에 소매를 말아 잡고 추는 춤, 검을 잡고 추는 춤, 첨수라는 무구를 들고 추는 춤이 있으며, 춤을 추는 무용수는 두 명이거나 네 명으로 구성되며, 서로 상대와 겨루는 기본 형식을 갖추고 있는 춤이다. 검을 잡고 추는 춤은 검을 잡기 전까지 맨손으로 추다가 검을 잡고 추는 이중 구조로 되어 있다. 순서는 ① 무동 두 명이 서로 마주 보고 나아가고 물러나며 춤추기 ② 혹은 등지고 마주보고 춤추기 ③ 회선하며 춤추기, 이어 악사가 들어와 검을 뜰 가운데 놓고 나가면, ④ 무릎을 꿇어 앉아 검을 어르다가 집어 들고 춤추기 ⑤일어서서 연귀소(燕歸巢)1와 연풍대(筵風擡)로 춤추기 ⑥ 나아가고 물러나며 춤추기로 구성되며, 점차 고조되는 점층적 구성으로 진행되었다. 무구를 처음부터 설치하는 일반적인 진행 절차와 대별되는 구조이며, 춤 대형에 있어서는 일렬대형을 처음부터 끝까지 유지하며 추는 춤이다. 소매를 뾰족하게 말아 잡고 추는 춤은 네 명이 두 대로 나누어 ① 앞으로 나아가며 춤추기 ② 상대하고 춤[엽무]추기 ③ 손을 빠르게 뒤집으며 무진ㆍ무퇴(舞進ㆍ舞退; 춤추며 앞으로 나아갔다가 뒤로 물러나는 동작) 하고 돌면서 춤추기 ④ 전후 대형ㆍ좌우 대형으로 춤추기 ⑤ 둥글게 돌아 무진ㆍ무퇴하는 것으로 구성된 춤이다. 네 명 구성의 춤도 좌우대형과 전후대형을 기본적으로 유지하면서 좌우선전2하는 상대와 겨루는 형식의 춤이다. 첨수를 들고 추는 첨수무는 순조 『(기축)진찬의궤』(1829)에 의하면 무동 두 명이 양손에 첨수를 잡고 일렬대형으로 서서 두 팔을 옆으로 펴들고 추는 춤이 있으며, 네 명 여령의 춤 구성은 두 대의 좌우대형과 전후대형으로 서서 좌우와 앞뒤가 상대하며 추는 춤이다. 고종 『(정해)진찬의궤(進饌儀軌)』(1887)의 여령 네 명의 춤도 두 대 좌우대형과 전후대형으로 서서 양손에 첨수를 잡고 좌우와 앞뒤가 상대하며 추는 춤이다.
1) 제비가 둥지에 돌아간다는 의미로, 춤이 시작되었던 처음의 자리로 돌아가며 양팔을 벌리고 뒤로 물러나는 춤사위 2) 두 팔을 앞으로 지어 여미고 한 발을 내딛어 무릎을 굽히며 몸을 앞으로 숙였다가 무릎을 펴며 뒤로 젖히는 동작
첨수무 복식과 무구는 시대별로 변화되었다. 『원행을묘정리의궤』에 의하면 여령 두 명의 복식은 화관, 황초삼, 홍초상, 수대, 한삼이며, 동기 두 명의 복식은 합립을 쓰지 않고 새앙머리에 홍색의 댕기, 유소, 금화라대, 단의, 홍라상, 홍초말군을 입었다. 순조 28년 『(무자)진작의궤』의 검을 잡고 추는 무동 두 명은 공작우가 달린 피변을 쓰고 소매통이 좁은 직령의 녹문첨수의를 입고 그 위에 홍자문반비의를 입었다. 홍자문반비의는 뒷솔기가 터지지 않은 세 자락의 옷으로 앞자락의 길이가 뒷자락보다 짧은 것이 특징이다. 허리에는 남전대를, 발목에는 자색행전을 두르고 청색버선을 신었다. 순조 『(기축)진찬의궤』권3 공령조에 의하면 첨수를 든 무동 두 명의 복식은 머리에 부용관을 쓰고, 녹색단령, 홍질남선상을 입고 두석녹정대를 두르고 화화흑화를 신었다. 순조 『(기축)진찬의궤』, 고종 『(정해)진찬의궤』, 고종 『(신축)진작의궤』(1901)의 첨수를 든 여령 네 명의 복식은 기본적으로 화관을 쓰고 황초삼과 홍초상을 입었으며, 수대를 매고 한삼을 사용하거나 오색한삼에 초록혜를 신기도 하였는데, 고종 『(신축)진찬의궤』(1901)에 의하면 상의를 녹초단삼으로 변화를 주어 입었다. 첨수무는 무구의 종류와 무용수의 성별, 인원수에 따라 시대별로 다채롭게 연출되었다.
첨수무는 조선 후기에 창제된 향악정재로 무구와 어우러지는 활달한 춤사위와 상대와 겨루는 대형으로 역동적 미감을 담아내는 춤이다. 시기와 연향에 따라 무구가 변화하였는데, 특히 검을 들고 추는 춤에서는 일반적인 검무와 달리, 검을 악사가 중간에 들고 들어와 설치한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맨손으로 추는 춤에서 검과 첨수로 이어지는 무구의 변화 양상이 이채롭다.
손선숙, 『조선왕조 의궤 정재도의 무용기록』, 역락, 2019 손선숙, 『한국 궁중무용사』, 보고사, 2017 남후선․김순영,「보상무, 첨수무, 헌천화 복식의 복색사상」,한국의류산업학회지, 8, 2006
김경숙(金敬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