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비어천가를 노래하며 춤추는 세종 때에 창제된 악(樂)ㆍ가(歌)ㆍ무(舞) 종합적 형태의 정재
봉래의는 세종 27년(1445)에 용비어천가가 제작된 이후, 그것을 관현반주에 맞추어 춤추고 노래하는 정재로 만들어졌다. 『세종실록악보』에 〈전인자(前引子)〉ㆍ〈진구호(進口號)〉ㆍ〈여민락(與民樂)〉ㆍ〈치화평(致和平)〉ㆍ〈취풍형(醉豐亨)〉ㆍ〈후인자(後引子)〉ㆍ〈튀구호(退口號)〉로 구성된 봉래의 악보가 전한다. 〈여민락〉은 순한문의 용비어천가를, 〈치화평〉과 〈취풍형〉은 국한문 혼용체의 용비어천가를 노래한다. 각각 백성과 함께 즐기고[여민락], 평화를 이룩하며[치화평], 풍요를 누린다[취풍형]는 세종대왕의 정치이념이 담겨있다. 또한 ‘봉래의’는 성군의 덕치(德治)로 태평성대를 이루면 나타난다는 전설 속의 봉황(鳳凰)이 날아오기를 기원하는 세종의 염원을 나타낸 것이다.
○ 역사 변천 과정
『세종실록』권140∼145에 <봉래의> 악보가 전한다. 여민락은 용비어천가 125장 중 초장∼4장과 125장(졸장), 치화평과 취풍형은 125장 전체를 사용한다. 『세종실록』에는 악보만 있고, 춤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성종대에 편찬된 『악학궤범』(1493) 권5 향악정재 항목에 보인다.
『악학궤범』에 전하는 봉래의에서 여민락은 1초장부터 4장까지와 졸장을 노래하는 곡 전체(음악상으로는 10장)를 사용한다. 그러나 치화평은 1기·2기·3기 중 3기만 연주하고, 그 3기 중에서도 초장부터 16장까지와 125장만을 연주한다. 또한 취풍형도 초장에서 8장까지와 125장만 연주한다. 조선 중기에는 1630년(인조 8)에 봉래의가 연행된 기록만 있을 뿐, 전승이 단절되었다가 조선 후기 1893년(고종 30)에 발간된 『정재무도홀기』에 다시 등장한다.
봉래의는 1901년(광무 5) 고종황제 탄신 50세를 경축하는 만수성절(萬壽聖節)의 진연(進宴)에서 추어졌다. 그러나 모든 면에서 조선 초기보다 확연히 축소되고 변화된 모습이어서, 창제 당시의 역사적 의미와 웅장한 면모는 찾아보기 어렵다. 조선 중기에 봉래의가 지속적으로 연행되지 않았던 것이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이왕직아악부에서 추었던 정재 10종목을 기록한 『무의(舞儀)』, 1931년 6월 조선총독부에 의해 촬영된 《조선무악》 영상에서도 간소화된 형태가 확인된다.
1923년에 설행된 순종황제 탄신 50주년 경축연에서 봉래의 외 8종의 궁중춤 〈가인전목단〉ㆍ〈장생보연지무〉ㆍ〈연백복지무〉ㆍ〈무고〉ㆍ〈포구락〉ㆍ〈보상무〉ㆍ〈수연장〉ㆍ〈춘앵전〉ㆍ〈처용무〉 총 9종이 연행된 이후, 1981년에 국립국악원에서 김천흥(金千興, 1909~2007)에 의해 재현되었으며,
2007년에는 『악학궤범』기록을 토대로 재구성한 <봉래의, 봉황이여 오라!>가 무대 작품으로 공연된 바 있다.
봉래의 음악은 전승과정에서 춤과 함께 큰 변화가 있었다. 창제 당시인 15세기에는 전인자ㆍ여민락ㆍ치화평ㆍ취풍형ㆍ후인자 등으로 구성되었으나, 19세기에는 전인자와 후인자가 없어지고, 취풍형은 가곡의 농(弄)ㆍ계락ㆍ편(編)으로 바뀌었다. 민간에서 즐기던 가곡이 궁중 악무에 사용되었는데, 이러한 현상은 봉래의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오늘날에는 보허자ㆍ향당교주ㆍ도드리ㆍ타령 등의 음악으로 반주한다.
조선 전기에 봉래의를 구성하던 음악 중 오늘날에는 여민락 한 곡만 전하고, 치화평과 취풍형은 전승되지 않고 있다. 현재 여민락계통의 음악에는 여민락·여민락만·여민락령·해령 이상 4곡이 있는데, 『세종실록악보』에 전하는 여민락은 현행 여민락만에 해당한다. 현행 여민락은 『세종실록악보』의 여민락 중 125장을 노래한 부분은 없고, 제1∼4장 부분의 선율만 연주되고 있다.
○ 음악적 특징 <봉래의>에서 전인자와 후인자는 죽간자를 든 기녀가 등장할 때와 퇴장할 떄에 노래 없이 관현악기로 연주하는 곡이고, 진구호와 퇴구호는 구호를 읊는 것으로 음악은 아니다. 『세종실록악보』에 전하는 전인자와 후인자는 1행 32정간의 12행 길이로 되어 있다. 전인자는 황종(黃: E♭4)·태주(太: F)·중려(仲:A♭4)·임종(林:B♭4)·남려(南:C5) 5음이 주로 쓰이는 가운데 2행과 11행에 무역(無:D♭5)이, 6행에 협종(夾:G♭4)이 출현하여 7음음계 형태를 띤다. 후인자는 무역(無:D♭5)이 쓰이지 않고, 제4행과 8행에 협종(夾G♭4)이 각각 1회 출현하는 차이가 있다. 순한문의 용비어천가 초장부터 4장까지와 졸장(125장)을 노래하는 여민락은 『세종실록악보』에 1행 32정간 80행의 길이로 되어 있다. 선율은 황종(黃:E♭4)·태주(太:F4)·중려(仲:A♭4)·임종(林:B♭4)·남려(南:C5) 5음음계 평조로 되어 있다. 치화평은 여민락·취풍형과 달리 가사붙임과 선율 등 곡태가 다른 3가지 형태(1기·2기·3기)가 있다. 선율은 흐름은 비슷하지만, 1기가 2기·3기에 비해 1행에 들어 있는 음이 많으며, 말을 짧게 붙이고 소리를 길게 끄는 어단성장(語短聲長)의 가사붙임이 특징적이다. 선율은 남려(南姑:C4)가 중심음이 되는 평조로 되어 있다. 치화평과 취풍형은 음악의 길이에서 큰 차이가 있는데, 치화평에서 2행을 차지하는 길이가 취풍형에서는 1행으로 축소된다. 또한 치화평은 박(拍)이 1행에 한번 들어가지만, 취풍형은 2번 들어간다. 취풍형의 선율은 고선(姑: G4)이 중심음이 되는 평조로 되어 있다.
<『세종실록악보』 봉래의. ©국가기록원 역사기록관> | <『여령정재무도홀기』 봉래의. ©국립국악원> |
○ 형식과 구성 『악학궤범』에는 봉래의를 연행하는 구성과 춤의 절차와 그에 따른 음악에 대한 내용이 전한다. 초입배열도[여민락무도(與民樂舞圖)〕, 치화평무도〔致和平舞圖〕, 취풍형무도〔醉豐亨舞圖〕 등으로 구분하고 그에 따른 연행자의 구성과 배열 위치를 그림 형태로 기록하였다. 초입배열도의 경우에는 죽간자·무원·인무기 그리고 의물을 담당하는 사람까지 총 44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무용수 8명, 무원을 인도하는 죽간자 2명, 의물(儀物)을 드는 사람이 22명 동원되었으며, 무원(舞員) 좌우로인무기(引舞妓) 12명이 배열한다. 월금·당비파·향비파·향피리·대금·장구 6종의 악기 연주자가 1명씩이 좌우로 분립해서 대칭을 이룬다. 춤의 절차는 대체로 무용수 8명이 ①〈여민락〉 무도(舞圖): 남북 2열에서 북향하여 춤추다가 우측으로 회무(回舞: 돌면서 춤을 춤)하여 치화평 대형을 만든다. ②〈치화평〉무도: 동서남북 사방 대형을 만들어, 북쪽 2명이 북향하여 춤추고 대무(對舞: 서로 마주 보고 춤을 춤)ㆍ배무(背舞: 서로 등대고 춤을 춤)하다가 전체가 우측으로 회무하여 위치를 바꾸며 춤춘다. (네 번 반복) ③〈취풍형〉 무도: 동서 2열에서 역시 대무ㆍ배무ㆍ북향하여 춤추다가 회무한 후, 처음 여민락 대형으로 돌아가는 형식이다. 조선 후기에는 〈여민락〉ㆍ〈치화평〉ㆍ〈취풍형〉의 세 가지 기본 대형은 유지되었으나 전반적으로 많은 부분이 생략되었으며 치화평에서 죽간자가 함께 회무하고 남북 두 대(隊)가 서로 교체하는 형식으로 변화되었다.
봉래의 중 전인자와 후인자는 노랫말이 없다. 죽간자의 구호는 4자 1구 8구의 한시로 되어있다. 여민락은 순한문으로 되어 있는 용비어천가를 노래하고, 치화평과 취풍형은 국한문 혼용체의 용비어천가를 노래한다. 죽간자의 구호와 여민락·치화평·취풍형의 노랫말 중 그 일부에 해당하는 제1장, 2장, 125장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죽간자 진구호> | |
원문 | 번역문 |
염아조종 덕성공륭 念我祖宗, 德盛功隆. 재독기경 탄응성명 載篤其慶 誕膺成命 오만사년 혁혁소선 於萬斯年 赫赫昭宣 영언탄차 유이수가 永言嘆嗟 惟以遂歌 |
우리 조상님을 생각건대 덕은 성대하고 공은 높아 경사로운 일 도탑기도 하신지라천명을 받으시어 아아! 만년토록 밝디 밝게 펼치시니 길이 찬탄하다 침내 노래를 부릅니다. |
원문출처: 김천흥, 『정재무도홀기 창사보1』 번역: 강명관 |
<죽간자 퇴구호> | |
원문 | 번역문 |
천고지후 성덕난명 天高地厚 盛德難名 형저가송 서기상성 形諸歌頌 庶機象成 소관기주 숙옹궐성 簫管旣奏 肅雍厥聲 만성환심 영하승평 萬姓歡心 永賀昇平 |
하늘처럼 높고 땅처럼 두터워 가득한 덕을 이름하기 어려우나 노래로 표현하여 성공을 드러내고자 하나이다. 젓대를 부니☞관을 연주하니, 소리가 점잖고 조화로워 만백성이 기쁜 마음으로 길이 태평한 시대를 축하하나이다. |
원문출처: 김천흥, 『정재무도홀기 창사보1』 번역: 강명관 |
<순한문체> | <국한문 혼용체> | <해석> | |
여민락 | 치화평·취풍형 | ||
1장 |
해동육룡비, 海東六龍飛 막비천소부 고성동부 莫非天所符 古聖同符 |
海東六龍이 샤 일마다 天福이시니 古聖이 同符시니 |
해동에 여섯 용이 나시니 모두 하늘이 도운 바로 옛성인의 일과 일치하셨도다 |
2장 |
근심지목 풍역불올 根深之木 風亦不抗 유작기화 유분기실 有灼其花 有蕡其實 원원지수 한역불갈 源遠之水 旱亦不竭 유사위천 우해필달 流斯爲川 于海必達 |
불휘〮 기픈〮 남ᄀᆞᆫ〮 ᄇᆞᄅᆞ매〮 아니〮뮐ᄊᆡ 곶됴〯코〮 여름하〮ᄂᆞ니〮 ᄉᆞㅣ미기픈 므른 ᄀᆞᄆᆞ래 아니그츨ᄊᆡ 내히이러 바ᄅᆞ래 가ᄂᆞ니 |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으니 꽃 좋고 열매가 많으니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도 끊이지 않으니 시내를 이루고 바다로 가나니 |
125장 |
천세묵정한수양 千歲黙定漢水陽 누인개국 복년무강 累仁開國 卜年無疆 자자손손 성신수계 子子孫孫 城神雖繼 경천근민 내익영세 敬天勤民 乃益永世 오호사왕감차 嗚呼嗣王監此 낙표유전 황조기시 洛表遊畋 皇祖其恃 |
千世 우희 미리 定ᄒᆞ샨 漢水北에 累仁開國ᄒᆞ샤 卜年이 ᄀᆞᇫ 업스시니 聖神이 니ᅀᆞ샤도 敬天勤民ᄒᆞ샤ᅀᅡ 더욱 구드시리이다 님금하 아ᄅᆞ쇼셔 洛水예 山行 가 이셔 하나빌 미드니ᅌᅵᆺ가 |
천세에 미리 정하신 한강 북쪽에 여러 대에 걸펴 어진 더을 쌓아 나라를
여시어 왕조가 끝이 없으시니 선싱이 이으셔도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다스림에 부지런하셔야 더욱 굳으시겠습니다. 임금이여, 아소서, 태강왕처럼 낙수에 사냑을 가 있으면서 조상만 믿으시겠습니까? |
(원문출처: 『세종실록악보』, 『악학궤범』) |
○ 복식
봉래의 복식은 별도의 기록이 없어 기본 복식을 착용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 전기의 여기 복식은 연향의 종류에 따라 조금씩 달랐다. 모든 예연(禮宴)에서 여기(염발기)는 단장(丹粧/단의)에 백말군(白襪裙)ㆍ보로(甫老/裳)를 입고 홍대(紅帶)를 두르며, 머리에 수화(首花)와 칠보잠(七寶簪)ㆍ금차(金釵)를 꽂고 단혜아(段鞋兒)를 신는다. 또 곡연(曲宴), 무과전시(武科殿試), 관사(觀射), 관나(觀儺), 사신동궁연 이하 각 연향, 주봉배(晝奉杯), 유관(遊觀), 사악(賜樂), 예조후대왜연(禮曹厚待倭宴)에서는, 여기가 흑장삼(黑長衫)ㆍ남저고리(藍赤古里)ㆍ백말군ㆍ홍대를 착용하고 머리에 칠보잠ㆍ금차를 꽂고 단혜아를 신는다. 이외에 예조왜야인연(禮曺倭野人宴)에서는 여기가 상복(常服)을 착용한다. 상세 내용은『악학궤범』권 2에, 복식도는 권9에 전한다.
조선 후기 여기의 기본 복식은 화관(花冠)을 쓰고 황초단삼(黃綃單衫)에, ‘속은 남색치마에 겉은 홍치마[裏藍色裳表紅綃裳]를 입고 홍단금루수대(紅緞金縷繡帶)ㆍ오색한삼(五色汗衫)ㆍ초록혜(草綠鞋)를 착용한다. 1829년(순조, 기축년)에는 초록단의(草綠丹衣)가 추가되었다. 〈신축진연도병〉(1901)에 묘사된 봉래의는 기본 복식을 착용하고 있어 시기와 행사 종류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다.
○ 의물ㆍ무구
봉래의에 쓰인 의물과 무구는 『악학궤범』에 관련 내용이 보인다. 그 기록을 보면, 『악학궤범』에 전하는 봉래의에는 죽간자와 인인장 등의 의물이 쓰이는데, 이러한 의물을 사용은 봉래의가 향악정재에 속하면서도 향ㆍ당악정재 혼합 형식을 띠게 하는 요소가 된다. 봉래의에는 인무기가 의물로서 월금·당비파·향비파·향피리·대금·장구 등의 악기를 드는데, 이 도한 다른 정재에서 볼 수 있는 특이점이다.
15세기 봉래의는『악학궤범』에 향악정재로 분류되어 있으나 음악적 면이나 춤의 구성면에서 향ㆍ당악이 혼합된 독특한 형식을 보여준다. 죽간자 및 각종 의물의 등장과 죽간자 구호에 한문시(漢文詩)를 채택하는 등 당악정재 양식의 요소가 들어 있다. 이 외에도 여기가 비파ㆍ피리 등 향ㆍ당악기를 들고 직접 연주하는 인무기의 출현은 봉래의 외에는 없다. 노랫말인 용비어천가가 순한문체와 국한문 혼용체 두 가지 형태가 쓰인 점도 특이하다. 세종대에 봉래의 정재에 속해 있던 여민락은 오늘날 국립국악원을 통해 전승되고 있다. 조선조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6백년 가까운 역사가 있는 악무이다.
『세종실록악보』 『대악후보』 『악학궤범』 『(신축) 진연의궤』 『(임인) 진연의궤』 『(신축) 진찬의궤』 『풍정도감의궤』
국립국악원, 『한국음악학자료총서 제4집: 시용무보, 정재무도홀기』, 국립국악원, 1980. 국립국악원, 『한국음악학자료총서 제20집: 세종, 세조실록 악보』, 국립국악원, 1986. 정신문화연구원, 『정재무도홀기』,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4. 김종수, 「세종조 신악 전승 연구수,」, 『온지논총』3, 1997. 김경희, 「<봉래의>의 역사적 변천과 의미」, 『한국음악연구』 29, 2001. 문숙희, 「세종실록악보 봉래의의 음악적 구성」, 『공연문화연구』 27, 2013. 문숙희·조규익·손선숙, 「가·무·악 융합에 바탕을 둔 <봉래의> 복원 연구」, 『공연문화연구』 28, 2014. 조규익, 「「鳳來儀」악장 연구(1)」, 『온지논총』 31, 2012.
임미선(林美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