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애(無㝵), 무애희(無㝵戲), 무애지희(無㝵之戲)
‘걸림이 없는 춤’이라는 뜻의 향악정재로, 호리병 모양의 ‘호로’를 무구로 들고 추는 춤
신라 때 원효가 불교의 포교를 위해 만든 춤이다. 원효는 목이 굽은 호로박을 어루만지며 저자에서 노래하며 춤추었는데, ‘걸림이 없는 춤’이라는 의미로 이를 무애라 했다. 고려 때부터 궁중에 유입되어 연향 때 쓰였다. 무용수는 ‘호로’ 혹은 ‘무애’라 불리는 호리병을 들고 춤춘다.
무애무의 기원은 신라 원효(元曉, 617~686)에서 비롯되었다.『삼국유사(三國遺事)』(1281년 추정)에 따르면, 어떤 광대가 큰 바가지를 들고 춤추고 희롱하는 것을 원효가 본떠 도구를 만들고 ‘일체에 걸림이 없는 사람은 단번에 생사를 벗어난다[일체무애인(一切無㝵人), 일도출생사(一道出生死)]’라는『화엄경(華嚴經)』의 구절을 따서 ‘무애(無㝵)’라고 이름하였다. 또 이인로(李仁老, 1152~1220)의 『파한집(破閑集)』(1260)에 따르면, 원효는 천한 사람들 속에 섞여 놀았는데, 목 굽은 호로박을 어루만지며 저자에서 가무(歌舞)하고 이를 무애라 하였다고 하였다. 즉, 본래 무애무는 대중들에게 불교를 전파하기 위한 목적으로 무애를 들고 추는 춤이었다.
고려시대에 무애무는 민간과 궁중에서 두루 연행되었다. 민간에서는 호사가(好事家)들이 목 굽은 호로박에 장식을 하여 두드리며 나아갔다 물러갔다 춤추어서, 밭가는 늙은이도 유희로 삼을 정도였다고 『파한집』에 전한다. 한편 궁중에서 연행된 무애무는 정재(呈才)의 형태로 양식화되었다. 궁중정재 무애무는 전문적인 기량을 가진 기녀가 춤추었고, 관객도 신분이 높은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고려사』「악지(樂志)」‘속악(俗樂)’의 〈무애〉는 검은 적삼에 단장(丹粧)한 두 기녀가 무애를 들고 춤을 추었는데, 서역(西域)에서 온 것이며 〈무애지희(無㝵之戱)〉라 소개했다.
조선 시대에 무애무는 사찰과 궁중에서 공연되었다. 1434년(세종 16)에 회암사 절에서 스님들은 신도를 대상으로 〈무애희(無㝵戲)〉를 춤추었다는 기록이 『세종실록』권 64에 전한다. 불가(佛家)의 말을 썼다는 이유로 무애무를 금해야 한다는 상소가 있었으나, 1449년(세종 31)에도 무애무를 항상 연습하도록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일정 기간 단절을 거친 무애무는 순조대에 새롭게 재창작 되었다. 효명세자(孝明世子, 1809~1830)가 무애무의 창사를 국한문혼용으로 새로 지어, 순조의 40세를 경축하여 열린 1829년(순조 29) 6월 19일 자경전 진찬 때 무동에 의해 연행되었다.
무애무는 대한제국기까지 기녀와 무동에 의해 지속되었다. 20세기 초반에는 기생들에 의해 무애무의 명맥이 이어졌다.
매일신보』 1915년 9월 25일 기사에는 연예관 극장에서 광교조합 기생이 공연하는 무애무 광고가 실렸고, 같은 해 10월 10일의 기사에는 다동조합 기생이 춤추는 무애무 광고가 실렸다. 현대에 들어서 무애무는 김천흥(金千興, 1909~2007)에 의해 재현 안무되었다. 1981년 5월 18~19일 국립극장 대극장에서 열린 ‘전통무용발표회’에서 초연된 이후 무대화된 무애무가 국립국악원 무용단을 중심으로 계승되고 있다.
○내용
무애무의 내용은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승려가 신도들 앞에서 추었던 포교의 춤으로, 신라 때 원효가 무애무를 처음 춘 이후 조선 전기 세종대까지 이어졌다. 포교를 목적으로 춤추었던 무애무는 유희성이 두드러졌다. 둘째는 고려 때부터 궁중 연향에서 기녀와 무동이 추었던 춤으로, 격식과 절차를 갖춘 정재이다. 무용수가 호로(葫蘆)를 잡고 북향하여 나아갔다 물러났다 하며 춤춘다.
○구성
고려시대 무애무의 구성은 도입부에 기녀 두 명이 등장하여 절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진행부에서 기녀 두 명이 「무애사」를 부르면, 여러 기녀들이 화답하여 노래했다. 절정부에서 기녀 두 명은 앉아서 무애를 잡고 춤추고, 서서 춤추고, 무애를 놀리며 나아갔다 물러났다 하며 춤추었다. 종결부에서 기녀 두 명이 절하고 퇴장했다. 조선 후기 무애무는 시작과 마무리에 절을 하지 않았다.
○구조
고려 시대에는 기녀 두 명이 춤을 추고, 여러 기녀들이 춤은 추지 않고 「무애사」에 화답하는 노래만 했다. 조선 후기에는 호로를 든 무용수 두 명이 전대(前隊)가 되고, 뒤의 무용수 열 명은 후대(後隊)가 되어 춤을 추면서 화답하는 노래를 불렀다. 전대와 후대는 서로 상응하여 후대 열 명이 둥그렇게 돌면서 춤을 출 때, 전대 두 명은 가운데서 춤을 추었다. 전대를 중무(中舞)라 했고, 후대를 좌우협무(左右挾舞)라고도 했다.
○주요 춤사위 순조 『(기축)진찬의궤』(1829)에 기록된 무애무의 핵심 춤사위는 “호로를 잡고 북향하여 나아갔다 물러났다 하면서 춤춘다”였다. 『(계사)정재무도홀기』에는 앉아서 호로를 잡을 듯 말 듯 놀리는 ‘농호로(弄葫蘆)’, 후대 열 명이 두 팔을 여덟팔 자 모양으로 벌려 춤추는 ‘팔수이무(八手而舞)’ 춤사위가 수록되어 있다.
불가어와 방언이 섞여있던 고려시대 무애무의 창사는 전하지 않는다. 1829년(순조 29)에 효명세자가 지은 무애무 창사는 순조의 장수를 비는 내용이었다. “가업슨 크온 壽가 佛慈가 아니신가(끝없이 오래 장수하시는 것이 부처님의 자비가 아니신가)”는 부처님의 자비로 순조가 장수한다는 것이다. 국한문혼용의 형태로, 창사는 호로를 든 무용수 두 명만 부르는 창사와 후대 열 명과 함께 부르는 병창의 두 종류가 있다. [창사](가곡 편) 성인미채(聖人眉彩)는 전중앙(殿中央)이시니 아악육요(雅樂六么)에 화자무(花字舞)니 준영산하만세(樽暎山河萬歲)이로다 대라천상강선향(大羅天上降仙香)이로이다 [창사](가곡 편) 성인께서 미채(眉彩)[색깔이 있는 눈썹, 요임금의 눈썹이 색깔이 있었다고 함]로 대궐 한 복판에 계시니 아악(雅樂) 육요령(六么令)[당나라 교방(敎坊)의 악곡 이름]에 맞추어 화자무(花字舞)를 추노라. 술 단지에 산과 강이 비치니 만세토록 오래 수를 누리실 것이옵고 대라천(大羅天, 도교에서 말하는 天界의 하나)에서는 선향이 내려올 것입니다. [창사](가곡 편) 남산송백(南山松栢) 빗치 장춘(長春)코 불로(不老)탓다 비노니 성인수(聖人壽)를 도모라 누리쇼셔 아으 만년만만년(萬年萬萬年)에 황도(皇都)가 영공(永鞏)이쇼셔. [창사](가곡 편) 남산의 소나무, 잣나무 빛이 늘 봄 같고 늙지 않도다. 비노니 성인의 수명을 모두 몰아 누리소서. 아으! 만년 또 만만년 지나도록 나라가 영원히 굳건하기를! [병창](가곡 편) 빗나온 수성(壽星)이 남극(南極)이 아니신가 가업슨 크온 수(壽)가 불자(佛慈)가 아니신가 항사(恒沙) 갓튼 수(數)에 보주(寶籌)를 더옵고져 옥촉(玉燭) 발근 빗티 수역(壽域)에 빗나스니어와 우리들리 태평(太平)을 노라셰라 백년(百年)이 이것고야 천년(千年)이 이것고야 만년우억만년(萬年又億萬年)이 연년(年年) 이것고야 옥력천추장(玉曆千秋長)을 비라와 드리놋다 [병창](가곡 편) 빛나는 ▪수성(壽星)은 남극성[노인의 장수를 상징하는 별. 노인성 또는 수성이라고도 함]이 아니신가. 한없이 오래 수를 누리시는 것은 부처님 자비가 아니신가. 항하(恒河)의 모래알[갠지스 강에 있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모래] 같은 수에 산가지를 더하고져! 옥촛대 밝은 빛이 수역(壽域)[사람마다 장수하는 세상]에 빛나거니와 우리들이 태평시대에 놀았어라. 백년이 오늘 같고 천년이 오늘 같고 만년 또 억만년이 해마다 오늘 같아 우리 임금님 오래오래 사시길 비나이다. - 원문출처: 김천흥, 『정재무도홀기 창사보1』번역: 강명관
무애무의 무동 복식은 『(기축)진찬의궤』「부편ㆍ공령」에서 머리에 각건(角巾)을 쓰고, 홍포와 백색바탕에 흑색으로 선을 두른 중단의를 입고, 남야대를 두르고, 흑색 가죽신을 착용했다. 무애무 여령의 복식은 고종 『(신축)진연의궤』(1901)「공령」에서 여령(女伶)은 화관(花冠)을 쓰고, 상의로 녹초단삼(綠綃單衫)을 입고, 하의로 안에 남색상(藍色裳)과 겉에 홍초상(紅綃裳)을 입고, 홍단금루수대(紅緞金縷繡帶)를 두르고, 오색한삼(五色汗衫)을 매고 초록혜(草綠鞋)를 신었다. 호로(胡蘆)는 ‘무애’라고도 불리며, 신라부터 써왔던 호리병 모양의 춤 도구이다. 무애무가 그려진 《신축진연도병》(1901)과 《임인진연도병》(1902.4)에서 ‘호로’는 모두 붉은색으로 채색되었다. 『(기축)진찬의궤』「부편」에 따르면, 호로 위에 금방울을 매달고 채색비단을 밑에 드리워 장식했다. 『파한집』에는 호로에 관해 “배는 가을 매미처럼 비었고, 목은 여름 자라처럼 꼬부라졌도다. 그 굽힌 것은 사람을 따르는 것이요, 허(虛)한 것은 물건을 용납할 만하도다.”라고 언급되어 있다.
원효가 춤추었던 무애무는 신라에서 기원하여 역사가 오래된 춤이다. 이후 불교적인 색채를 지닌 채 고려 시대에 궁중으로 수용되어 정재의 형태로 조선 전기에 이어졌으며, 사찰에서 무애희의 형태로도 전승되었다. 순조대 효명세자는 부처님께 순조의 장수를 비는 내용으로 창사를 지어, 전승이 끊어진 무애무를 궁중에 다시 선보였다. 무애무를 순조대에 재창작한 것은 조선 후기 실학의 영향으로 우리나라 역사를 재조명하하고자 했던 당시의 역사관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무애무는 긴 역사 속에서 ‘호로’를 들고 춤춘다는 동일성이 있으며, 저자거리ㆍ궁중ㆍ사찰이라는 다양한 공연공간을 거쳐 현재까지 전해진다는 의의가 있다.
국립국악원, 『궁중무용무보: 11집』, 2004. 성무경ㆍ이의강, 『완역집성 정재무도홀기』, 보고사, 2005. 이흥구ㆍ손경순, 『한국궁중무용총서: 3』, 보고사, 2009. 조경아, 「무애무의 기원과 변천과정」, 『온지논총』 13, 2003.
조경아(趙京兒)