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기 당악정재의 하나로, 태종의 덕을 칭송한 「근천정사」를 노래하며 추는 춤
『태종실록』 권3에는 1402년(태종 2) 6월 9일 영사평부사(領司平府事) 하륜(河崙)이 근천정과 〈수명명(受明命)>의 악장 두 편을 지어 올리니 태종이 교서를 내려 칭찬하였다고 전한다. 1411년(태종 11) 태종(太宗, 1367~1422, 재위 1400~1418)은 1393년 (태조 2)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이 지은〈몽금척(夢金尺)>과 〈수보록(受寶籙)>은 꿈 얘기와 도참설(圖讖說)이므로 악장의 첫머리로 삼을 수 없으니 하륜이 지은 근천정과 〈수명명〉을 악장의 첫머리로 삼을 것을 명하였다.
근천정이 연행된 시기는 세종조(1418-1450) 초기로 추정된다. 『세종실록』에는 근천정의 악장이 노래로 연주된 사례ㆍ관현(管絃)의 기악곡으로 연주된 사례가 전해져, 근천정은 주로 노래로 불리거나 관현악곡으로 연주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근천정이 정재로 연행된 사례는『세종실록』에는 1432년(세종 14) 5월 회례연에서 동남(童男; 무동)들이 〈무고(舞鼓)〉와 더불어 근천정을 연행했다는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이후의 전승 상황은 사료(史料)가 발견되지 않아 파악이 어렵다. 20세기 초반에는 연행이 단절되었다.
근천정은 『악학궤범(樂學軌範)』(1493)을 토대로 김천흥(金千興, 1909~2007)에 의해 복원되었다. 1982년 10월 13일 국립극장 대극장에서 열린 국립국악원의 전통무용발표회에서 공연된 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ㅇ 내용 근천정은 태종이 잠저(潛邸; 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 또는 그 기간) 때 중국 조정에 들어가 황제의 오해를 풀어 나라의 백성 모두가 이를 기뻐한다는 내용이다.
ㅇ 구조
근천정의 구조는 당악정재의 형식을 따른다. 당악정재는 의장(儀裝)에 해당하는 의물(儀物)을 사용하고 있어 매우 웅장하며 화려하다. 근천정의 도입부에서는 죽간자(竹竿子)가 무용수를 이끌고 입장하고 진구호(進口號)를 노래 불러 정재의 개장(開場 : [엶ㆍ시작])을 알린다. 전개부에서는 무용수들이 춤과 의례(儀禮)를 행한다. 무용수들은 정재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치어(致語)나 사(詞)로 노래하고, 주제에 맞도록 춤을 추거나 의식(儀式)을 행한다. 종결부에서 다시 죽간자가 등장하여 퇴구호(退口號)와 절을 하고수장(收場 : [끝마침])을 알린다. 근천정은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명확한 회귀의 순환 구조로 연행된다. 진행은 집박 악사의 박(拍)을 신호로 전환된다.
ㅇ 진행절차
『악학궤범』 권4에는 근천정의 초입배열도(初入配列圖) 및 작대도(作隊圖)와 함께 술어(述語)를 기록하여 춤의 진행을 소상히 전하고 있다.
〈도입부〉
전대(前隊)에 일렬대형(一列隊形)으로 늘어선 봉족자(奉簇子) 한 명과 봉죽간자(奉竹竿子)두 명이 족도(足蹈) 하며 앞으로 나간다. 죽간자가 진구호로 춤의 시작을 알리고 나면, 족자는 그 자리에 남고 죽간자는 좌우로 갈라선다.
〈전개부〉
일렬횡대로 늘어선 후대(後隊)의 선모(仙母)와 협무(挾舞) 두 명이 족도(足蹈) 하며 나가서고, 선모와 협무가 오른손을 치켜들고 치어를 한다. 치어가 끝나면 선모와 좌(左)ㆍ우(右) 협무는 악절에 따라 염수족도(斂手足蹈)하여 「근천청사」를 부른다. 창사를 마치면 좌(左)협무와 우(右)협무가 순차적으로 나와 손을 폈다가 염수족도하고, 선모와 대무(對舞)ㆍ배무(背舞)하고 북쪽을 향하여 춤추며 나간다.
〈종결부〉
죽간자 두 명이 족도하며 전대(前隊)로 나와 족자의 양옆으로 되돌아간다. 음악이 그치면 죽간자가 퇴구호를 하고 전대에 일렬로 늘어선 족자 한 명과 죽간자 두 명이 물러간다. 선모도 조금 물러나 좌ㆍ우 협무의 사이에 나란히 선다. 선모와 좌ㆍ우 협무는 무진(舞進)하여 협수무로 춤추고, 물러나 춤을 마친다.
○춤사위
대형은 선모와 좌ㆍ우 협무 두 명의 대무(對舞; 서로 마주보며 추는 춤사위)와 배무(背舞; 서로 등지고 추는 춤사위)로 변화를 꾀한다. 주로 전후대형(前後隊形)으로 무진ㆍ무퇴하며 진행된다. 전대[북쪽]의 선모와 후대[남쪽]의 좌ㆍ우 협무가 서서 치어와 창사를 마치고 나면, 좌협무부터 무진하여 선모와 대무 및 배무를 하고 물러나 복위(復位)한다. 뒤이어 우협무가 무진하여 대무와 배무를 하고 물러나는 이시성(異時性) 대칭의 반복 구성으로 춤을 춘다. 『악학궤범』에는 족도ㆍ염수족도ㆍ무진ㆍ팔수무(八手舞)ㆍ대무ㆍ배무ㆍ협수무(挾手舞)ㆍ무퇴(舞退)ㆍ퇴수무(退手舞)의 춤사위 명칭이 전해진다.
근천정은 총 네 번의 노래를 부른다. 죽간자가 춤을 추기 전에 진구호를 하고, 구호를 부른 뒤에 선모가 태종에 대한 치어를 노래한다. 그리고 협무가 〈금전락령〉의 악절에 따라 염수족도 하면서 「근천정사」를 부른다. 춤을 모두 마치면 죽간자가 퇴구호 한다. 악장은 태종이 왕자 시절에 명나라의 태조를 만난 일을 노래하고 있다. 「근천정사」는 시간 순서로 구성되어 있다. 처음과 끝은 태종에 대한 칭송이고, 중간에는 태종의 업적을 노래한다. 창사는 태종이 명나라 조정에 나아가 천자를 뵈었던 일을 주제로 하여, 태종이 왕으로서의 덕망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원문 | 해설 | |
[죽간자 진구호] | 利覲天庭, 承帝眷之優渥. 이근천정, 승제권지우악. 端膺寶曆, 啓王業之延長 단응보력, 계왕업지연장. 擧有懽忻, 恭陳頌禱. 거유환흔, 공진송도. | 천정(天庭, 명나라)에 문안 인사를 올려 황제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고 바로 보력(寶曆, 천자가 내리는 冊曆)을 받아 길이 이어질 왕업(王業)을 열었으니, 모두들 기쁨에 넘쳐 삼가 찬양하고 축하하나이다. |
[치어] | 太宗以潛邸入覲天庭, 蒙被帝眷禮而遣還. 國之老幼, 懽炘慶忭, 相與歌之也. 태종이잠저입근천정, 몽피제권예이견환, 국지노유, 환흔경변, 상여가지야. | 태종(太宗)께서 왕위에 오르시기 전 안부를 여쭈러 천정(天庭, 明의 황제)에 들어가서 황제로부터 은총과 예우를 받고 돌아오시매, 온 나라의 늙은이와 어린이가지 기쁨에 넘쳐 함께 노래 부른 것입니다. |
[창사] | 「창 근천정(覲天庭)사 일성」 振振王子, 德音孔彰. 진진왕자, 덕음공창. 緝熙其學, 奎壁其章. 즙희기학, 규벽기장. 天子有旨, 邦人震惶. 천자유지, 방인진황. 惟君父使, 不敢或遑. 유군부사, 불감혹황. 旣見天子, 敷納維詳. 기견천자, 부납유상. 貝錦消沮, 國家之昌. 패금소저, 국가지창. 勉勉王子, 夙遵義方. 면면왕자, 숙준의방. 專對來歸, 宗社之光. 전대래귀, 종사지광. 桓桓我王, 壽考而康. 환환아왕, 수고이강. 王子來歸, 其樂無疆. 왕자래귀, 기락무강. | 「창 근천정(覲天庭)사 일성」 성실하고 후덕한 왕자께서는 덕이 크게 빛나고 학문은 찬란하고 문장은 규벽(奎壁, 奎와 壁은 문학을 관장하는 별)에서 타고났네. 천자께서 명을 내리시매, 나라 사람들 두려워 떨었지만, 군부(君父)의 사신이라 감히 혹시라도 지체할 수 없는 터라 천자를 뵙고 소상히 아뢴 뒤에 참소가 씻은 듯 사그라졌으니 나라의 경사로다. 부지런한 왕자께서 일찍 옳은 도리 지키시어 전대(專對, 외교를 독자적으로 처리함)하고 돌아오시니, 종사(宗社)의 영광이로다. 굳세고 씩씩한 우리 임금 수를 오래 누리시고 부디 건강하시기를! 왕자가 돌아오시니 즐거움 한이 없네. |
[죽간자 퇴구호] | 德維善政, 方聞九功之歌. 덕유선정, 방문구공지가. 樂且有儀, 敢陳六佾之舞. 낙차유의, 감진육일지무. 不懈于位, 永觀厥成. 불해우위, 영관궐성. | 그 덕으로 선정(善政)을 베푸시려 구공(九功)[9가지 선정(善政)의 조목]의 노래를 들으시고 즐겁고 또 예의가 있으시매 감히 육일(六佾)의 춤[가로 세로 6열로 추는, 제후의 춤]을 펼치나이다. 그 지위에 태만하지 않으시어 길이 그 이루심을 보시리라. |
원문: 김천흥, 『정재무도홀기 창사보2』 번역: 강명관
ㅇ 복식
『악학궤범』에는 근천정의 무동관복(舞童冠服)과 여기복식(女妓服飾)이 도식(圖式)으로 전해진다.
무동은 회례연에서 머리에 부용관(芙蓉冠)을 쓰고, 발에는 화(靴)를 신는다. 겉에는 가슴과 등에 흉배를 단 의(衣: [포(袍)])를 입는다. 천은 오방(五方)색인 황(黃)ㆍ녹(綠)ㆍ자(紫)ㆍ남(藍)ㆍ도홍(桃紅)의 비단으로 만들고 안감으로 붉은색 비단을 대어 만들었다. 옷감은 사(紗)나 라(羅)와 같은 비단을 사용한다. 포 안에는 흰색 비단으로 만들고 도련의 가장자리를 검정 비단으로 두른 중단을 받쳐 입었다. 단, 무동은 오방색 비단으로 만든 중단을 입었다. 중단의 허리에는 예복용 치마인 상(常)을 갖추어 입는다. 여기는 머리에 수화(首花)ㆍ잠(簪)ㆍ금채(金釵[금차)를 장식하고 복식은 백말군(白襪裙)을 입고, 남적고리(南赤古里)를 입는다. 그 위에 상(裳)[보로(甫老)])을 입고, 홍대를 매고 겉에는 단의를 입는다. 단의 위에 흑장삼(黑長衫)을 입고 발에는 단혜아(段鞋兒)를 신는다.
○의물
근천정의 의물(儀物은 족자(簇子)한 개ㆍ죽간자(竹竿子) 두 개ㆍ인인장(引人仗) 두 개ㆍ정절(旌節) 두 개ㆍ용선(龍扇) 두 개ㆍ봉선(鳳扇) 두 개ㆍ미선(尾扇) 두 개ㆍ개(蓋) 세 개가 사용된다.
근천정은 조선 초기 정치적 안정을 위해 태종이 임금에 대한 신하의 칭송과 충의의 경계라는 두 가지 목적과 효용에서 연향악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수시로 변하는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점차 연행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류창규, 「태종대 하륜의 악장 창작과 그 정치적 의미」, 『한국사학보』35, 2009. 박가영, 「궁중정재복식에 사용된 한삼의 변천」, 『국악원논문집』 34, 2016. 손선숙, 『한국궁중무용사』, 보고사, 2017. 송방송. 「조선왕조 건국 초기의 정재사 연구」, 『음악과 현실』23, 2002. 신태영, 「조선 초기 창작 정재의 악무와 예악사상-「근천정」, 「수명명」, 「하황은」, 「하성명」, 『동방한문학』 55, 2013.
김기화(金起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