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궁중정재의 하나로, 무동(舞童)이 춘 검무
공막무는 궁중에서 무동이 추었던 검무의 일종이다. 중국 진(秦)나라 말 항우와 유방의 홍문 잔치[홍문연(鴻門宴)]에서 항우의 부하 항장이 칼춤을 추며 유방을 치려하자 항백이 ‘공은 하지 마시오.[공막(公莫)]’라며 막았다는 데서 유래되었다. 무동 두 명이 양 손에 검을 쥐고, 머리에 고운계(高雲髻; 구름을 본떠 만든 모자)를 쓰고 석죽화(石竹花; 패랭이꽃)가 그려진 초록색 전복을 입고 추었다.
공막무는 1828년(순조 28) 창덕궁 연경당에서 초연되었다. 효명세자(孝明世子, 翼宗,1809~1830)가 어머니 순원왕후(純元王后)의 40세 생신을 축하한 왕실잔치에서 어린 남성 무용수인 무동 두 명이 춘 검무이다. 궁중 검무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795년(정조 19) 화성행궁 봉수당 진찬연을 기록한『원행을묘정리의궤』(1797)이다. 이후 1828년 연향에서는〈첨수무〉와 함께 공막무가 궁중의 검무로 작품화되었다. 이 춤에 대한 설명이 순조 『(무자)진작의궤』(1828)「부편」에 실려 있다.
『잡무곡(雜舞曲)』에서는 건무(巾舞)라고 하였다. 항장이 칼춤을 추자 항백이 소매로 막으며 항장에게 그대는 그러지 마시오[公莫]라고 말한 것에서 비롯됐다. 뒤에 검무가 되었고, 향악에서 사용하였다.
〇 두 무동이 고운계를 쓰고 전복을 입고 각각 두 자루의 검을 들고 서로 마주보고 춤춘다.
公莫舞 雜舞曲云巾舞也. 項莊舞劍, 項伯以袖隔之, 若語莊云公莫. 後爲劍舞, 鄕樂用之.
〇 兩舞童戴雲髻, 着戰服, 各持二劍, 相對而舞.
중국 진나라 말에 항우와 유방이 패권을 다투는데, 홍문의 연회에서 항우의 부하 항장이 검무를 추며 유방을 치려하자, 항백이 소매로 막으며 “공(公)이여 패공(沛公, 유방)을 해치지 마시오(莫)”라고 한 데서 유래되었다. 〈건무(巾舞)〉라 불리기도 했으며, 이 춤이 검무가 되었다는 것이다. 민간에서는 이미 홍문연 고사를 작품화한 항장무가 추어지고 있었기에 그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1828년에 공막무를 춘 무동은 신광협(辛光協)과 김명풍(金命豊)이었다. 1829년부터 궁중에서 추어진 검기무가 여성무용수의 검무라면, 공막무는 남성 무동이 춘 검무였다.
그리고 1894년에 고종이 세자가 21세 된 것을 축하한 내진연과 외진연의 내용을 담은「(갑오)외진연시무동각정재무도홀기((甲午)外進宴時舞童各呈才舞圖笏記)」에 공막무가 기록되어 있고, 무동으로 김천만(金千萬)과 이만수(李萬壽)로 명시되었다. 이후 공막무의 공연은 없었고, 국립국악원 무용단이 2014년에 재현해서 추어지고 있다.
공막무의 내용은 창사가 없기에 악장에 실린 내용으로 본다면, 홍문연에서 항장과 항백이 추었던 칼춤의 고사를 배경으로 한다. 임금에 대한 충성심과 무예정신을 표현하였다. 이 춤의 구성은『(갑오)외진연시무동각정재무도홀기』에 전한다. 공막무 무녕지곡(武寧之曲)을 연주한다.【향당교주】박을 치면 무동 두 명이 서로 마주하여 무작(舞作)하고, 춤추며 앞으로 나아갔다 물러난다. 혹은 등지고, 혹은 얼굴을 대하고 돌면서 춤춘다. 악사가 칼을 갖고 들어와 뜰 가운데에 놓고 좌우로 나가면, 무동 두 명이 마주 보고 꿇어앉아 춤춘다. 칼을 어르다가, 칼을 잡고 번뜩여 회오리바람처럼 돌리며 춤춘다. 모두 일어나서 춤추다가 제비가 둥지로 돌아가는 듯한 연귀소(燕歸巢)와 허리를 뒤로 젖히며 도는 연풍대(筵風擡)를 하고, 춤추며 나아갔다가 물러나면 음악이 그친다. 公莫舞. 樂奏武寧之曲【鄕唐交奏】 ○拍, 舞二人相對舞作, 舞進無退, 或背或面, 回旋而舞. 樂師持劍器, 入置於殿中, 左右而出. 舞二人相對, 跪而舞, 弄劍, 執劍, 飜飄而舞, 幷起立而舞. 鷰歸巢, 筵風擡. 舞進舞退. 樂止.
무동이 춤추는 공막무와 여령이 추는 검기무의 춤 구성이 거의 비슷하다. 한 가지 다른 점은 검기무는 악사가 먼저 검기를 배치한 뒤에 춤이 시작되는데, 공막무는 무동이 서서 맨손 춤을 춘 후에 악사가 등장하여 검기를 두고 나가는 점이다. 검기무에서 바꾸어 선다는 ‘환립(換立)’이 공막무에서 돈다는 ‘회선(回旋)’으로 표기되었다. 춤의 구성을 홀기 내용으로 보면 공막무와 검기무는 같은 춤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공막무의 반주 악곡명은 〈무령지곡(武寧之曲)〉이다. 무(武)는 용맹한 기운을, 령(寧)은 평안을 의미하므로, 무의 기운으로 나라가 평안하기를 기원하는 의미가 악곡명에 담겨 있다. 실제 반주곡은〈향당교주(鄕唐交奏)〉와 〈원무곡(原舞曲)〉으로 표기되었다. 〈원무곡〉이란 원래의 춤 반주곡이라는 뜻으로 〈향당교주〉를 말한다. 현행 국립국악원 무용단의 반주음악은 〈타령〉-〈자진타령〉-〈타령〉-〈자진타령〉으로 구성되었다.
복식은 머리에 고운계9)를 쓰고 초록 바탕에 석죽화(石竹花)가 그려진 전복을 입는다. 또 『(무자)진작의궤』「부편ㆍ공령」에서 은속대(銀束帶; 은장식이 달린 허리띠)를 매고, 호화(胡靴; 검은 색 가죽으로 만든 신)를 신는다고 했다. 무구인 검기(劍器)는 한쪽 날만 세워진 긴 칼이다. 칼등에 돌기를 만들어 털을 달고, 칼손잡이 끝에 유소를 달아 장식했다.
공막무는 궁중에서 무동 두 명이 추었던 검무 중 하나이다. 조선후기 민간에서 연희했던 항장무의 흔적이 남아있으며, 궁중에서 여성무용수가 춘 검기무를 주로 알고 있지만, 남성 무용수가 춘 검무이다. 2014년에 홀기를 토대로 국립국악원 무용단에 의해 재현되어 추어지고 있다.
『(무자)진작의궤』 김영운 편, 『정재무도홀기』,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4. 김영희춤연구소 편, 『검무 연구』, 보고사, 2020. 이의강, 『국역순조무자진작의궤』, 보고사, 2006. 조경아, 「조선후기 궁중 검무의 기록 검토」,『검무 연구』, 보고사, 2020.
김영희(金伶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