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춤, 무고(舞鼓), 무수(舞袖), 정자(釘子), 고고무(叩鼓舞)
지방 관아에서 연행되어 온 춤으로, 기녀가 중앙에 놓인 북을 북채로 치면서 추는 춤
고려 시대부터 지방 교방의 기녀들이 양손에 북채를 잡고 중앙에 놓인 북을 치고 북 주위를 돌며 추는 춤이다. 평안도ㆍ황해도ㆍ강원도ㆍ경상도ㆍ전라도 등 지방 교방에서 추어졌고, 지방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북을 치면서 춤추는 형태는 궁중 정재 〈무고〉와 같으나, 지방 교방의 고무는 창사가 없는 경우가 있다.
지방의 고무는 고려 시대에 이혼(李混, 1252∼1312)이 경상도 영해로 좌천되었을 때, 바다에 뜬 나무토막으로 북을 만들어 춤을 춘 것에서 유래되었다. 『낙하생집(洛下生集)』에 따르면, 조선 후기까지 춤의 탄생지인 영해에서 고무가 성행했다. 조선 시대 교방에서 북을 치며 추는 춤은 북춤[고무]ㆍ무고ㆍ무수ㆍ정자ㆍ고고무라는 다양한 명칭으로 불렸고, 여러 지역의 교방에서 공연되었다.
고무는 특히 평양 교방에 소속된 기녀의 춤이 뛰어났다. 평안도는 중국 사신이 오가는 길목으로 사신 접대를 위해 다양한 공연을 했으며, 그 중에서도 북춤은 주요한 공연종목이었다. 1574년(선조 7) 명나라로 가던 허봉(許篈, 1551∼1588)은 사신일행에게 평양감사가 마련한 연회 내용을 『조천기(朝天記)』에 남겼는데, 이 기록에 평양교방 기녀가 고무를 춤추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고무는 『평양지(平壤志)』(1590) 「교방」 항목에도 소개되었다. 당시 평양교방 기생은 백팔십 명으로, 이들은 고무를 비롯한 아홉 종의 춤을 추었다.
평양교방 기녀 네 명이 복식을 갖추어 춤추는 고무는 《평양감사향연도》〈부벽루연회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성천지(成川志)』(1603) 「음악」항목에도 고무에 관한 기록이 보인다. 당시 성천 교방에 소속된 기녀는 12종목의 춤을 추었는데, 그 중 ‘무수(舞袖)’라 표기된 것이 북춤이다. 그 밖에 평안도의 『영변부읍지』ㆍ『정주읍지』ㆍ『초산지』에도 고무에 대한 기록이 있어 평안도의 여러 교방에서 북춤을 추었음이 확인된다.
황해도 교방에서도 고무가 공연되었다. 황주 교방의 고무는 박사호(朴思浩)가 연경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남긴 『심전고(心田稿)』「연계기정(燕薊紀程)에 등장한다. 1829년(순조 29) 3월 26일에 사신일행이 황주의 체인각에 모였을 때, 고무를 비롯하여 〈사자무〉ㆍ〈학무〉ㆍ〈아박무〉ㆍ〈쟁강무〉ㆍ〈포악〉ㆍ〈검무〉ㆍ〈헌반도〉ㆍ〈처용무〉ㆍ〈관동무〉ㆍ〈홍문연〉ㆍ〈선악유기곡(仙樂維其曲)〉을 보았다고 했다. 여러 시조와 수필 등을 엮은 『소수록』에서 해주 기녀 명선이 서술했다는 내용 중에 “돌아서니 북춤이요, 던져 추니 구락이라”라는 대목이 있어 해주교방에서도 북춤을 연행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경기도 화성에서 1796년(정조 20) 10월 16일에 화성 성역 완공을 기념한 잔치에서 추었던 고무가 한글본 의궤인 『뎡니의궤』의 〈낙셩연도〉에 그려졌는데, 이는 쌍(雙)고무의 형태였다.
강원도 교방에서는 가무가 출중하지 않고, 노래로만 명성을 얻는 기생은 없다고 『관동지(關東誌)』「교방」 항목에서 밝혔는데, 강원도 교방이 보유한 춤은 고무를 비롯한 여덟 종목이었다.
전라도 교방에서 춤추었던 북춤은 남원의 읍지인 『용성지(龍城誌)』「교방신증(敎坊新增)」 항목에 소개되었다. 당시 남원교방에는 기생 열다섯 명, 동기 네 명, 전악 두 명, 악공 한 명이 소속되었는데, 기생이 추었던 춤은 ‘고고무(叩鼓舞)’라 표기된 북춤을 비롯한 여섯 종목이었다. 『호남읍지』(1895)에 따르면, 무주부에서도 고무가 공연되었다.
경상도 교방의 고무는 ‘정자(釘子)’로도 불렸다. 1767년에 경주 객사에서 박종(朴琮, 1735~1793)은 경주교방에서 기녀가 추는 신라십무(新羅十舞)의 감상평을 『당주집(鐺洲集)』「유록(遊錄)」에 남겼다. 그중 북춤인 ‘정자’는 “채색한 북을 당의 한 가운데에 두고, 기녀 네 명이 양손에 북채를 잡고, 돌면서 북을 치며 절주를 맞춘다.”라고 소개했다. 진주목사였던 정현석(鄭顯奭, 1817~1899)이 쓴 『교방가요(敎坊歌謠)』(1865)에는 진주교방에서 춤추었던 고무의 모습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경상도 교방의 고무 중에 현재 전해지는 것은 통영의 〈승전무〉와 〈동래고무〉이다.〈승전무〉는 북춤과 칼춤이 결합된 형태가 특징적이다. 〈동래고무〉는 조선시대 동래 감영에서 전승된 북춤으로, 1920년 전후에 동래 권번이 설립되어 고무를 계승했으나 맥이 끊겼다. 이후 1984년에 동래 권번 출신인 김해월(金海月), 석국향(昔菊香)의 고증을 거쳐 1987년에 김온경(金昷慶, 1938~ )이 발굴 시연회를 가졌다. 현재 부산민속예술보존협회에서 전수하고 있다.
○ 내용
고무는 가운데에 설치된 북을 전체 무용수가 북채로 힘껏 내리쳐, 시각적 화려함과 함께 청각적 효과를 동시에 주는 춤이다. 〈선루별곡〉에는 성천교방의 고무에 대해 “화룡고(畫龍鼓) 네 북채는, 굉장하다. 고무이며”라고 언급되어 있고, 홍순학(洪淳學, 1842~1892)의 〈연행가(燕行歌)〉에도 “시원하다 북춤이요”라는 감상평이 있다. 김재찬(金載瓚, 1746~1827)은 〈제여악도(題女樂圖)〉의 ‘무수’에서 “화려한 북을 가운데 두고, 비단 소매 둘러서 있네. 네 개의 북채 일시에 울릴 때, 응당 심장도 함께 떨어지는 듯”이라는 감상평을 남겼다. 북춤에 관해 ‘굉장하다’, ‘시원하다’, ‘심장이 떨어지는 듯’ 이란 평가에서 북채로 내리치는 북소리의 강렬함이 잘 드러난다.
○ 구성
『교방가요』에 수록된 진주교방 고무의 구성을 살펴보면, 도입부에서 북틀과 북채를 중앙에 설치하고 무용수가 절하고 북의 사방에 선다. 무용수는 앉아서 북채를 잡을 듯 말 듯 희롱하며 춤추다가 북채를 잡고 일어나 춤추면서 북에 둘러선다. 진행부에서 처음엔 북채 한 개로 북을 치고 다음에는 두 개로 친 뒤, 무용수들이 몸을 뒤집으면서 북을 친다. 몸을 한번 뒤집고 한번 북을 치는데, 여덟 개의 북채가 마치 번개처럼 현란하게 움직인다. 북이 한번 울릴 때마다 여러 기녀들이 “지화자”를 제창한다. 종결부에서는 무용수들이 북채를 던지고 춤을 추다가 절하고 나간다.
○ 구조
고무의 무용수는 주로 네 명이었다. 현재 〈동래고무〉의 무용수는 북을 치며 춤추는 원무 네 명과 북 바깥에서 춤추는 협무 네 명의 여덟 명으로 구성된다. 경우에 따라 쌍고무의 형식으로 공연하기도 한다.
○ 주요 춤사위
진주교방 고무의 핵심 춤사위는 무용수가 북 주위를 돌면서 몸을 뒤집으며, 북을 치는 동작이다[堯鼓翻身而打]. 절정부에서 박자가 빨라지면서 한번 몸을 뒤집고, 한번 북을 치는 동작[一翻一打]으로 고조되었다. 현재 〈동래고무〉의 춤사위는 머리사위ㆍ부림사위ㆍ맞춤사위ㆍ옆실이ㆍ평사위ㆍ팔수사위ㆍ상대무ㆍ북춤사위ㆍ팔자사위ㆍ인사태 등이 있다.
진주교방의 고무는 절정부에서 북을 한번 울릴 때마다 여러 기녀들이 “지화자”를 제창했다. 현재 〈동래고무〉에서도 북을 치지 않는 네 명의 무용수가 지화자를 노래한다.
고무는 궁중과 지방 교방에서 공유하던 춤 종목이었다. 궁중과 지방 교방에서 북을 치는 형식은 유사하나, 대체로 교방의 고무는 소략한 형태로 진행되었다. 사신이 오가는 길목에 해당하는 지역의 교방에서는 사신을 대접하기 위한 연회에서 고무가 공연되었다. 고무는 전국의 여러 교방에서 인기리에 향유된 춤이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승전무: 국가무형문화재(1968) 동래고무: 부산시무형문화재(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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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아(趙京兒)