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아리랑은 대금의 명인 박종기(朴鍾基, 1880~1947)가 〈남도아리랑〉을 편곡하여 만든 민요로 알려져 있으며, 음악적으로는 〈남도아리랑〉뿐만 아니라 〈산아지타령〉의 특성도 드러난다.
진도아리랑은 일제강점기 전국적으로 유행했던 아리랑소리의 확산과 지역화에 따른 재생산으로 인해 만들어진 소리이다. 진도아리랑의 메기는 소리와 받는 소리의 후반부는 남도지역 향토민요인 〈산아지타령〉에서 비롯되었고, 받는 소리의 전반부는 〈밀양아리랑〉의 영향을 받은 〈남도아리랑〉에서 온 것이라 한다. 따라서 진도아리랑은 〈산아지타령〉 및 〈남도아리랑〉 등 기존 민요의 영향 아래 형성된 것이다.
진도아리랑은 1934년 유성기음반(오케 1728)에 처음 그 모습이 보인다. 그 이전에는 관련 기록이나 내용을 찾아볼 수 없고 다만 판소리 명창 김소희(金素姬, 1917~1995)와 명고수 김득수(金得洙, 1917~1990)의 증언에 따르면 박종기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박종기가 일본으로 유성기음반을 취입하러 가는 배 안에서 진도아리랑을 만들었으며 이를 음반으로 녹음하여 발매하였다는 것이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음반 취입 이전에 남도지역을 중심으로 불리고 있던 〈산아지타령〉이나 〈남도아리랑〉을 박종기가 편곡하였을 것으로 본다.
진도아리랑은 일제강점기 유성기음반에 단 3회 취입되었으며, 경성방송국 방송 횟수도 약 11회 정도로 다른 아리랑소리에 비해 출현 빈도가 낮다. 따라서 진도아리랑이 일제강점기에는 대중적인 유행에까지 이르지 못한 것으로 보이며, 오히려 광복 이후에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어 지금까지 남도민요 및 남도잡가의 대표적인 악곡으로 불리고 있다. 통속민요이지만 지역 민요와의 유사성으로 인하여 전라도를 중심으로 향토민요처럼 애창되고 있으며, 2022년에 전라남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진도아리랑은 유절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절과 후렴 모두 세마치 8장단으로 부른다. 음악적 배경으로 보아 경기토리와 메나리토리, 남도토리가 만나서 접변하는 모습을 볼 수 있고, 선율의 음조직은 육자배기토리로 구성되어 있다. 음역은 한 옥타브를 넘어 완전4도 위까지 올라가는 넓은 음역대를 넘나든다.
진도아리랑의 노랫말은 부르는 창자에 따라 그때마다 다르게 불리기도 한다. (후렴)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 문경새재는 웬 고개인고 구비야 구비야 눈물이 난다 치어다 보니 만학(萬壑)은 천봉(千峯) 굽어 보니 백사지(白沙地)로다 임이 죽어서 극락을 가면 이내 몸도 따라가지 지장보살(地藏菩薩) 다려가오 날 다려가오 우리 임 뒤따라서 나는 가네 원수야 악마야 이 못쓸 사람아 생사람 죽는 줄을 왜 모르나 저놈의 계집애 눈매 좀 보소 속눈만 뜨고서 발발 떠네 왜 왔던고 왜 왔던고 울고 올 길을 왜 왔던고
이창배, 『한국가창대계』, 홍인문화사, 1976, 887~888쪽.
진도아리랑은 일제강점기에 새롭게 재편곡되어 통속민요로 널리 알려졌지만, 지역 민요와의 유사성으로 인해 향토민요와 같이 향유되는 다양한 모습을 가졌다. 향토민요와 통속민요, 잡가 등 음악의 장르 확산과 변화를 보여주는 악곡이므로 음악사적인 측면에서도 큰 가치가 있다.
전라남도 무형문화재(2022)
이창배, 『한국가창대계』, 홍인문화사, 1976. 김혜정, 「산아지타령 계열 악곡의 음악적 존재양상과 의미」, 『한국민요학』 21, 2007. 김혜정, 「진도아리랑 형성의 음악적 배경」, 『한국음악연구』 35, 2004. 나경수, 「진도아리랑 형성배경」, 『광주ㆍ전남의 민속연구』, 민속원, 1998. 이보형, 「아리랑소리의 근원과 그 변천에 관한 음악적 연구」, 『한국민요학』 5, 1997. 이용식, 「진도아리랑의 대중화 과정에 끼친 대중매체의 영향에 관한 연구」, 『한국민요학』 39, 2013. 정서은, 「일제강점기 소리미디어에 등장하는 지역아리랑 연구」, 『한국음악사학보』 68, 2022.
정서은(鄭諝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