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높이가 다른 열여섯 개의 종(鍾)을 나무틀에 매달아 쇠뿔 망치로 쳐서 연주하는 유율 타악기
1116년(고려 예종 11)에 송(宋)나라로부터 들어온 아악기이다. 편종과 편경의 제작은 오직 중국에 의존하였었는데 세종조에 이르러 우리 기술로 만들어 사용하게 되었다. 편종은, 크기는 같으나 두께가 달라 음높이가 다른 종 열여섯 개를 나무틀인 가자(架子)에 매단 악기이다. 오른손으로 쇠뿔 망치인 각퇴(角槌)를 잡고 종의 아래쪽에 둥글게 표시된 수(隧)부분을 쳐서 연주한다.
1116년(예종 11)에 송(宋)나라로부터 유입된 아악기이다. 1429년(세종 11) 2월부터 한강에 주종소(鑄鍾所)를 두어 본격적으로 편종을 만들게 되어 필요에 따라 우리의 기술로 제작하여 쓸 수 있게 되었다. 편종을 주조하는 데에는, 종의 음률이 크기에 따라 달라지게 하는 방법, 두께에 따라 달라지도록 옛 제도를 따르는 방법의 두 가지가 있는데 조선에서는 후자의 방법을 채택하였다. 같은 해 11월에는 종 아래편 정면에 둥근 수형의 표시 즉, 수라 일컫는 종의 타격 부위를 고안하였다. 종은 치는 부위에 따라 다른 음을 낼 수 있으므로 악사들이 악기의 다른 곳을 쳐서 음이 맞지 않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1430년(세종 12) 7월에는 가자를 꾸미는 동물 장식을 진양의 『악서』에 의거하여 아악용에는 범, 속악용에는 사자(獅子)의 형상을 만들기로 했다. 이렇게 옛 제도를 바탕으로 하면서 보완의 과정을 거치며 악기가 완성되었다. 편종을 만드는 제도는 대부분 1429년(세종 11) 박연(朴堧, 1378~1458)의 건의로 확정되었고, 그 이후에 주조된 편종도 이를 따른 것이다. 박연과 함께 종의 제작에 공헌한 대표적인 인물로는 남급(南汲, ?~?)을 들 수 있다. 남급은 원래 주자소(鑄字所)에서 구리판을 주조하고 주전소(鑄錢所)를 설치하여 감독하던 인물이었는데 금속제조에 정통(精通)하다는 이유로 악기 제작에 참여하였다. 이후 편종의 제작과 관련된 기록은 몇 차례 있으나 세종조만큼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1744년(영조 20)에는 인정전 화재 이후 악기조성청을 설치해 편종 두 틀, 편경 두 틀을 제작하였으며, 1776년(정조 즉위년)에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위한 경모궁제례에 사용하도록 경모궁 악기조성청을 설치해 편종 두 틀, 편경 두 틀을 제작한 기록이 있다. 1804년(순조 4년)에는 사직악기조성청을 설치한 후 화재로 파손되어 못 쓰게 된 편종, 편경의 종과 경 일부를 제작하였다.
○구조와 형태
편종은 악기 틀인 가자와 종으로 구성된다. 우리나라 편종은 종의 크기를 같게 하고 두께를 다르게 하여 음의 높낮이를 조절하고 있다. 종의 크기는『악학궤범』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열여섯 개의 종은 순서에 따라 가자의 윗단과 아랫단에 각각 여덟 개씩 매단다. 아랫단 오른쪽에서 왼쪽으로는 황종(黃:C4)부터 임종(林:G4)에 해당하는 종을, 윗단 왼쪽에서 오른쪽으로는 이칙(夷:G#4)부터 청협종(浹:D#5)에 해당하는 종을 매단다. 가자는 두 개의 가로대와 가로대를 지탱하는 두 개의 기둥으로 구성된다. 두 개의 기둥 아랫쪽에는 구멍을 뚫은 상자 모양의 방대와 사자 한 쌍을 올리고 기둥을 꽂아서 고정한다. 사자의 형상은 종소리의 웅장함을 상징한다. 이 틀의 양편에는 용두(龍頭)를 조각하고 다섯 개의 공작, 색사유소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한다.
○음역과 조율법
편경과 함께 십이율(十二律) 사청성(四淸聲)을 연주하는데, 편경은 한 옥타브 위의 청성(淸聲)을 내므로, 두 악기 간 한 옥타브 차이가 난다. 편종과 편경은 한번 갈고 깎아서 조율하면 음이 변하지 않으므로 처음에 조율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악학궤범』에서는, 종과 경이 두꺼워서 소리가 높아 음에 맞지 않으면 갈아서 얇게 하고, 너무 얇아서 소리가 낮아 음에 맞지 않으면 아래 끝을 갈아서 조율해야 한다고 하였다. 길이가 고르지 못한 것은 다시 제작하는 쪽이 낫다고 서술했는데 악기 조율이 상당히 어려운 과정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과거에 종과 경을 만들 때는 먼저 황종 율관을 불어 음률을 잘 아는 사람이 듣고 종과 경의 음이 서로 맞도록 했다.차후에 조율하는 황종의 종과 경은 율관 대신에 먼저 조율한 종과 경의 소리를 들으며 조율한다. 대나무로 부는 것과 금석(金石)의 재료로 제작한 악기의 음색이 달라 구분이 어렵기 때문이다. 다른 율명의 종과 경도 같은 방식으로 조율한다.
오늘날과 같이 현대식 조율 도구가 없었던 과거의 조상들은 음률의 차이를 귀로 듣고 구분하기 위해서 악기의 성음(聲音)을 끊임없이 구분하며 들어보는 수련의 과정을 거쳤다. 이러한 사례는 세종대왕의 세자 시절 스승인 박연의 일화에서 살펴볼 수 있다. 『난계유고(蘭溪遺稿)』중「시장(諡狀)」에 의하면 박연은 어릴 적부터 예악(禮樂)에 뜻을 두고 음악 관련 서적을 연구하면서 더욱이 종률(鍾律)에 정진하였다고 한다. 항상 악기를 치는 형용을 하며 휘파람을 불고, 율려의 성음을 입술로 불기도 하면서 스스로 음악의 오묘한 이치를 깨달은 것이다. 이처럼 꾸준한 정진의 과정을 통하여 음악적 능력을 구비했기에 음률이 정확한 편종과 편경을 제작할 수 있었다.
○구음과 표기법
악기의 구음은 없으며 율명으로 표기한다. ○연주방법과 자세
『악학궤범』에서 아악(雅樂)을 연주할 때는 황종(黃:C4)에서 임종(林:G4)까지는 오른손, 이칙(夷:G#4)에서 청협종(浹:D#5)까지는 왼손을 사용하여 연주하도록 했지만, 속악(俗樂)은 두 손을 편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현재는 악곡에 무관하게 오른손으로 연주한다. 쇠뿔 망치인 각퇴로 종의 수 부분을 쳐서 소리낸다. ○연주악곡
〈여민락만〉, 〈여민락령〉, 〈해령〉, 《종묘제례악》ㆍ 《사직제례악》ㆍ《문묘제례악》과 〈낙양춘〉ㆍ〈보허자〉 등에서 연주한다. ○제작 및 관리 방법
『악학궤범』에는 종의 규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중국의 편종과 달리 우리나라 편종은 열여섯 개의 크기가 같고 종의 두께가 다른 종을 사용해 음의 높낮이를 달리하는 것이 특징이다. 종의 제작과정은 다음과 같다.
1. 종의 모형, 거푸집틀 목형 만들기
요즘은 종을 제작할 때 밀랍과 실리콘을 이용하여 거푸집을 만든다. 그러나 조선 초에 기록된 전통적인 제작방법은 이와는 다르다. 종의 모형과 거푸집을 만드는 형틀은 나무로 제작하고, 거푸집은 고운 흙으로 만든다.
2. 흙으로 거푸집 만들기
거푸집 제작 틀에 목형을 얹고, 흰색의 이연제를 뿌린 뒤 황토와 소금을 섞은 고운 흙을 체에 걸러 제작 틀에 채워 모양을 찍어낸다. 이때 흙을 체로 거르는 이유는 고운 흙을 채워야 종의 모양이 선명하게 찍힐 수 있기 때문이다. 흙으로 만든 거푸집의 표면이 조금 더 곱고 단단해질 수 있도록 불로 그을음을 주어 겉의 거푸집을 완성한다. 이후 가운데 들어갈 중자 거푸집을 만들고, 그 위에 겉의 거푸집을 잘 맞추어 위치하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쇳물을 부으면 종에 구멍이 난다든지 삐뚤어지게 된다. 거푸집이 완성되면 쇳물을 붓는 주입구만 남긴 채 흙으로 거푸집의 사이사이를 꼼꼼히 막는다. 쇳물이나 가스가 새게 되면 종의 모양이 흐트러지기 때문이다.
3. 쇳물녹이기
종의 재료는 구리, 주석(놋쇠), 아연, 납, 인을 일정 비율로 섞어 사용하며 온도가 1200℃ 이상 되어야 쇳물을 녹일 수 있다. 쇳물을 푸는 바가지에는 흑연을 바르는데, 이는 쇳물을 붓는 동안 온도를 유지하고 바가지에 쇳물이 붙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4. 쇳물붓기재료를 넣고 쇳물이 끓기 시작하면 쇳물을 저어 떠오르는 불순물을 제거한 후 거푸집에 쇳물을 붓는다.
5. 거푸집제거쇳물을 붓고 가스가 빠지면 바로 거푸집을 제거한다.
6. 외형다듬기 및 조율
거푸집을 제거한 종은 쇳물을 주입했던 쇳물 줄기를 제거하고 외형을 다듬는다. 이때 종의 안쪽을 다듬으면서 제1차 조율을 한다. 흙으로 만든 거푸집으로 인해 종의 표면이 거칠어 끌과 칼 등으로 긁어내는 외형 다듬질에 손이 더 많이 간다. 제1차 조율 시에는 갈아내는 부분이 많으므로 종의 온도가 많이 올라간다. 종의 온도가 올라가면 음높이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도중에 식힌 후 음높이를 확인한다. 며칠 후 제2차 조율을 하고, 일정 기간이 지난 후 정밀 조율하며 마친다.
편종과 편경은 1116년(고려 예종 11)에 송나라로부터 도입된 중국의 아악기이다. 이 두 악기는 오직 중국의 수입에 의존하였는데 세종조에 이르러 우리 기술로 제작하여 쓰게 되었다. 당시에 제작한 편종은 송나라 인종 때 범진(范鎭)이 만든 제조법 즉, 크기에 따라 음이 달라지는 방식이 아닌 두께에 따라 음이 달라지는 옛 제도를 따랐다. 박연과 남급 등 여러 분야의 전문가가 참여하여 구리와 주석을 배합하는 기술을 보완한 결과 맑은 음색을 갖추게 되었고 정교하게 조율하여 기존의 중국 편종보다 음률이 잘 맞는 악기를 제작할 수 있었다. 자주적인 기술로 아악기 제작을 완성함으로써 국가의 품격과 자부심을 높이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이는 예악으로 국가의 조화와 질서를 이루고자 한 세종대왕의 음악 정책과 인재 발굴을 통한 전적인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종과 경의 제작 기술은 오늘날까지도 전승되고 있으며, 2010년과 2011년에는 2008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베트남의 궁중음악 냐냑[雅樂]의 편종, 편경, 특종, 특경을 복원하여 기증함으로써 아악의 진흥에 기여했고 우리나라의 문화 역량을 보여주기도 했다.
○편종의 가치 『경국대전』,『대전회통』에 의하면 공인(工人)이 종이나 경을 만지다가 깨뜨리면 곤장 100대에 도형(徒刑) 3년의 벌을 주었다고 하니 이 악기를 얼마나 소중히 여겼는지 알 수 있다. 전쟁 통에도 악공이 종과 경을 지키기 위해 헌신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홍건적(紅巾賊)의 난’으로 사람들이 송나라에서 들여온 악기를 수호하기 어려웠는데, 어느 늙은 악공이 종ㆍ경 두 악기를 못 속에 던져 넣어서 보존할 수 있었다’라는 이야기가 『세종실록』의 1433년(세종 15) 1월 기사에 전한다.
국립국악원, 『국악기 연구보고서』 2010, 국립국악원, 2010. 국립국악원, 『국악기 연구보고서』 2011, 국립국악원, 2011. 국립무형유산원,『악기장 편종ㆍ편경』, 민속원, 2016. 권오성, 김세종, 『한국음악학학술총서 제2집: 역주 난계선생유고』, 국립국악원, 1993. 김영운,『국악개론』, 음악세계, 2020. 송혜진,『한국악기』, 열화당, 2001. 이장원, 「관직으로 본 난계 박연의 음악 업적 연구 –난계의 관직생활 중심으로-」,『한 국음악연구』67, 2020. 이혜구 역주,『한국음악학학술총서 제5집: 신역 악학궤범』, 국립국악원, 2000. 장사훈,『국악사론』, 대광문화사, 1983. 장사훈,『세종조음악연구 –세종대왕의 음악정신-』, 서울대학교 출판부, 1982. 장사훈,『우리옛악기』, 대원사, 1990. 장사훈,『한국악기대관』, 문화공보부문화재관리국, 1969. 차주환 역주,『고려사악지』, 을유문고, 1986. 국립국악원(https://www.gugak.go.kr) 국립국악원(유튜브)(https://www.youtube.com/channel/UCmN4xFSlmWw-_d2riM-ep0A) 국립국악원(공식블로그)(https://blog.naver.com/gugak1951/221652882238) 조선왕조실록(http://sillok.history.go.kr/) YTN news(https://www.youtube.com/channel/UChlgI3UHCOnwUGzWzbJ3H5w)
이장원(李壯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