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굿에서 불리던 무가(巫歌)인 성주풀이를 통속화한 민요
성주풀이는 원래 성주굿에서 부르던 무가였는데, 이것이 후에 변화를 겪으며 다양한 장르로 확대된 것이다. 성주풀이가 무가에서 변화하여 통속민요화된 과정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고사광대 걸립패의 고사소리 뒷소리로 불린 성주풀이가 창우집단의 일원인 잡가광대에 의해 통속화되어 불린 것이라는 의견이며, 또 다른 하나는 본풀이로 불리던 성주풀이가 오신(娛神) 및 송신(送神) 등 다양한 기능으로 굿에서 확대 사용되었고 이로 인해 고사광대소리 및 잡가꾼의 남도잡가로 그 범위가 확장되었다고 하는 의견이다.
성주풀이가 소리꾼들에 의해 민요로 불린 것은 근대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송만갑(宋萬甲, 1865~1939)이 전국을 유랑하며 〈육자백이〉와 성주풀이를 부르던 것이 갑신정변(甲申政變, 1884) 이전이라는 그의 자서전 기록을 통해 이름난 명창에 의해 불린 성주풀이의 인기를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본래 무가였던 성주풀이를 소리광대들이 부르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이전부터이다. 1915~1916년에 집중적으로 나온 잡가를 모은 잡가 전집에도 성주풀이가 등장하므로, 이를 통해 잡가꾼들에 의해 가창되었던 남도잡가 성주풀이의 유행을 확인할 수 있다. 일제 강점기 유성기음반을 통해서도 성주풀이가 다수 발매되었는데, 이는 서울 무가의 민요화와 대중화에 따른 영향으로 볼 수 있다. 당시 성주풀이를 녹음한 가창자는 근대 5명창으로 꼽히는 김창룡(金昌龍, 1872~1935)을 비롯하여 김창환(金昌煥, 1854~1927), 박녹주(朴綠珠, 1906~1979) 등 판소리 명창들이었다.
유성기음반 발매에 비해 경성방송국 국악방송에서는 성주풀이가 드물게 연행되었는데, 이는 당시 남도잡가로 소개되며 활발하게 방송되었던 〈육자배기〉나 〈보렴〉 등과는 비교된다. 성주풀이를 비롯하여 〈보렴〉ㆍ〈화초사거리〉ㆍ〈육자배기〉ㆍ〈자진육자배기〉ㆍ〈흥타령〉ㆍ〈개구리타령〉ㆍ〈새타령〉 등은 2001년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남도잡가’로 지정되어 현재에 이른다. 남도민요라는 갈래명은 1940년대 경성방송국과 유성기음반에서 분류하던 내용에 따른 것이다.
민요 성주풀이는 3소박 4박의 굿거리장단으로 부르며, 남도민요이지만 육자배기토리가 아닌 서울ㆍ경기 지역의 음조직인 경토리로 구성되어 있다.
에라 만수(萬壽) 에라 대신(大神)이야 대활령(大活靈)으로 설설이 나리소서
에라 만수 에라 대신이로구나 놀고 놀고 놀아 봅시다
아니 노지는 못 허리라
이 댁 성주는 와가 성주 저 집 성주는 초가성주
한테 간에 공댁 성주 초년 성주 이년 성주
스물일곱에 삼년 성주 서른일곱 사년 성주
마지막 성주는 쉬흔 일곱이로다
대활령으로 설설이 나리소서
에라 만수 에라 대신이야
반갑네 반가워 설리춘풍이 반가워
더디도다 더디도다 한양행차가 더디어
남원옥중 추절이 들어 이화추풍이 날 살려
에라 만수 에라 대신이야 대활령으로 설설이 나리소서
왕왕헌 왕왕헌 북소리는 태평연월을 자랑허고
둘이 부는 피리소리 쌍봉황이 춤을 추고
소상 반죽 젓대소리 어깨춤이 절로 난다
에라 만수 에라 대신이야 대활령으로 설설이 나리소서
성주풀이는 무가 성주풀이를 소리광대나 잡가꾼들이 불러서 통속민요화한 곡으로 무가의 장르 확장 및 대중화라는 측면에서 그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남도잡가: 전라남도 무형문화재(2001)
김혜정, 「씻김굿에 나타난 성주풀이의 사용 양상과 의미」, 『한국음악연구』 51, 2012. 이보형, 「통속민요성주풀이 발생에 대한 고찰」, 『한국민요학』 13, 2003. 이용식, 「성주풀이의 민요화 과정에 드러난 남도 음악인의 음악관에 대한 담론」, 『한국무속학』 27, 2013. 최은숙, 「성주풀이 민요의 형성과 전개」, 『한국민요학』 9, 2001.
정서은(鄭諝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