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경(石磬), 옥경(玉磬)
음높이가 다른 열여섯 개의 경(磬)을 나무틀에 매달아 쇠뿔 망치로 쳐서 연주하는 유율 타악기
1116년(고려 예종 11)에 송(宋)나라로부터 들어온 아악기이다. 1425년(세종 7)에 경기도 남양에서 경석(磬石)이 발견된 이후 세종대왕의 명을 받은 박연(朴堧, 1378~1458)이 1427년(세종 9)에 열두 개의 경을 매단 편경 한 틀을 처음 제작하여 올렸다.
이후 1426년(세종 8)부터 1428년(세종 10)까지 528매(33틀)의 경(磬)이 제작되어 궁중의 다양한 의식에 연주되었다. 편경은 크기가 거의 같으나 두께를 다르게 제작하여 음높이를 달리한 ‘ㄱ’ 형상의 경(磬) 열여섯 개를 나무틀인 가자(架子)에 매달아 놓은 악기이다. 오른손으로 쇠뿔 망치인 각퇴(角槌)를 잡고 경의 고(鼓) 부분을 쳐서 연주한다.
1116년(고려 예종 11)에 송(宋)나라로부터 유입된 아악기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석경’으로도 기록되어 있다. 1425년(세종 7)에 경기도 남양에서 경석이 발견되면서 예조(禮曹)에서 옥인(玉人)을 보내 경석을 캐오도록 한 후 시험 제작을 하였다. 세종대왕의 명을 받은 박연이 1427년(세종 9)에 경(磬) 열두 개짜리 석경(石磬) 한 틀을 처음 제작하여 올렸다. 1426년(세종 8)부터 1428년(세종 10)까지 총 528매의 경을 제작해 궁중에서 치르는 다양한 제사에 사용하였으며, 세종대왕은 이때 제작한 조선의 편경이 중국의 것보다 음높이가 더 잘 맞는다고 평가하였다. 이후에도 몇 차례 편경을 제작하였으나 세종조만큼 활발하게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1744년(영조 20) 인정전 화재 이후 악기조성청을 설치해 편종 두 틀, 편경 두 틀을 제작하였으며, 1776년(정조 즉위년)에는 사도세자를 위한 경모궁제례에 사용하도록 경모궁 악기조성청을 설치해 편종 두 틀, 편경 두 틀을 제작한 기록이 있다. 1804년(순조 4)에는 사직악기조성청을 설치한 후 화재로 파손되어 못 쓰게 된 편종, 편경의 종과 경 일부를 제작하였다.
○ 구조와 형태
편경은 악기 틀인 가자와 경으로 구성된다. 경은 ‘하늘이 굽어서 아래로 덮는다’는 뜻을 담아 ‘ㄱ’ 형상으로 제작되었는데 긴 쪽을 고(鼓), 짧은 쪽을 고(股)라 한다. 중국의 편경과는 달리 우리나라 편경은 경편 열여섯 개의 크기를 거의 같게 하고 두께를 달리하여 음의 높낮이를 조절하는 것이 특징이다. 『악학궤범』에 황종ㆍ임종ㆍ청협종 경편의 규격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열여섯 개의 경은 순서에 따라 가자의 윗단과 아랫단에 각각 여덟 개씩 매단다. 아랫단 오른쪽에서 왼쪽으로는 황종(黃:C5)부터 임종(林:G5)에 해당하는 경을, 윗단 왼쪽에서 오른쪽으로는 이칙(夷:G#5)부터 청협종(浹:D#6)에 해당하는 경을 매단다. 가자는 두 개의 가로대 및 가로대를 지탱하는 두 개의 기둥으로 구성된다. 두 개의 기둥 아랫쪽에는 구멍을 뚫은 상자 모양의 방대와 흰 기러기 한 쌍을 올리고 기둥을 꽂아서 고정한다. 흰기러기의 형상은 드높이 멀리까지 들리는 경의 소리를 상징한다. 이 틀의 양편에는 봉두(鳳頭)를 조각하고 세 개의 공작, 치미유소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한다.
○ 음역과 조율법 편종과 함께 십이율(十二律) 사청성(四淸聲)을 연주하지만 실제로는 한 옥타브 높은 음을 낸다. 편종과 편경은 한번 갈고 깎아서 조율하면 음이 변하지 않으므로 처음에 조율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악학궤범』에서는, 종과 경이 두꺼워서 소리가 높아 음에 맞지 않으면 갈아서 얇게 하고, 너무 얇아서 소리가 낮아 음에 맞지 않으면 아래 끝을 갈아서 조율해야 한다고 하였다. 길이가 고르지 못한 것은 다시 제작하는 쪽이 낫다고 서술했는데 악기 조율이 상당히 어려운 과정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과거에 종과 경을 만들 때는 먼저 황종 율관을 불어 음률을 잘 아는 사람이 듣고 종과 경의 음이 서로 맞도록 했다. 차후에 조율하는 황종의 종과 경은 율관 대신에 먼저 조율한 종과 경의 소리를 들으며, 조율한다. 대나무로 부는 것과 금석(金石)의 재료로 제작한 악기의 음색이 달라 구분이 어렵기 때문이다. 다른 율명의 종과 경도 같은 방식으로 조율한다. 오늘날과 같이 현대식 조율 도구가 없었던 과거의 조상들은 음률의 차이를 귀로 듣고 구분하기 위해서 악기의 성음(聲音)을 끊임없이 구분하며 들어보는 수련의 과정을 거쳤다. 이러한 사례는 세종대왕의 세자 시절 스승인 박연의 일화에서 살펴볼 수 있다. 『난계유고(蘭溪遺稿)』중「시장(諡狀)」에 의하면 박연은 어릴 적부터 예악(禮樂)에 뜻을 두고 음악 관련 서적을 연구하면서 더욱이 종률(鍾律)에 정진하였다고 한다. 항상 악기를 치는 형용을 하며 휘파람을 불고, 율려의 성음을 입술로 불기도 하면서 스스로 음악의 오묘한 이치를 깨달은 것이다. 이처럼 꾸준한 정진의 과정을 통하여 음악적 능력을 구비했기에 음률이 정확한 편종과 편경을 제작할 수 있었다. 역시 음률을 구별하는 능력이 출중했던 인물이다. 『세종실록』의 1433년(세종 15) 기록에 의하면 세종대왕은 새로 제작된 편경의 시연에서 이칙(夷則) 음이 약간 높다고 지적하였고, 박연이 살펴보니 편경에 붓 자국이 남아 있었음을 알게 되어서 이를 갈아내니 비로소 정확한 음이 나게 되었다. 세종대왕도 음률의 미세한 차이를 구분하는 능력을 갖추기까지 부단한 정진의 과정을 거쳤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 구음과 표기법 악기의 구음은 없으며 율명으로 표기한다. ○ 연주방법과 자세 『악학궤범』에서 아악(雅樂)을 연주할 때는 황종(黃:C5)에서 임종(林:G5)까지는 오른손, 이칙(夷:G#5)에서 청협종(浹:Dsup>#6)까지는 왼손을 사용하여 연주하도록 했지만, 속악(俗樂)은 두 손을 편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현재는 악곡에 무관하게 오른손으로 연주한다. 쇠뿔 망치인 각퇴로 경의 고(鼓) 부분을 쳐서 소리 낸다.
〈여민락만〉, 〈여민락령〉, 〈해령〉, 《종묘제례악》ㆍ《사직제례악》ㆍ《문묘제례악》과 ㆍ〈낙양춘〉ㆍ〈보허자〉 등에서 연주한다.
○ 제작 및 관리 방법 경을 제작하는 과정 은 네 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돌을 고르고 검수한다. 돌을 본격적으로 재단하기에 앞서 돌의 균열이나 잡석을 걸러내야 하므로, 눈으로 돌의 무늬를 보고 각퇴로 쳐서 소리를 들어보며 일정한 소리를 내는지 확인한다. 둘째, 본(本)을 그린다. 돌에 ‘ㄱ’ 자 형태를 그리는 작업으로, 『악학궤범』의 황종ㆍ임종ㆍ청협종 경석의 규격 기록에 의거하여 나무판을 재단해 경석 위에 올려 본을 그린다. 열다섯 개의 경석은 그 크기가 거의 같고 두께를 달리하여 음의 차이를 조절하나, 열여섯 번째 ‘청협종’만은 두께뿐 아니라 크기도 다른 경편과 다르다. 셋째, 경석을 자른다. 두 명이 쇠줄을 위아래로 움직임과 동시에 모래(금강사)를 뿌려가며 선에 맞게 자르는데, 석재를 절단할 때는 절단할 부위에 물을 뿌려가면서 진행한다. 물을 뿌리지 않으면 경석도 망가지고 고열로 톱날이 망가지기도 한다. 절단한 경석은 금강사를 묻힌 숫돌 수십 개로 그 면과 모서리를 미세하게 연마한다. 넷째, 경석을 가자에 매달 수 있도록 구멍을 뚫는다. 구멍을 뚫으면 경석의 음높이가 많이 내려가기 때문에, 이 작업은 조율 전에 진행한다. ‘ㄱ’자 돌 꼭짓점으로부터 가로 5cm, 세로 5cm 떨어진 지점에서 각각 수선을 그어서 만나는 점을 돌 재단용 대송곳으로 구멍을 뚫는다. 이때 물과 금강사 가루를 계속 뿌려주는 것이 중요하다.
경을 제작한 후에는 조율하여 음을 맞춘다. 전통적인 조율이 악기장의 청력과 감각에 주로 의존하였다면 현재는 표준화된 음고표와 조율 도구 등을 활용한다. 본래 경석을 연마할 때는 금강사를 묻힌 숫돌 수십 개가 사용되었고, 원하는 강도에 따라 거칠기 정도가 다른 숫돌을 사용하였다. 연마 시에는 옆면을 갈면 두께가 얇아져 음이 낮아지고 모서리 부분을 갈면 음이 높아지는 원리를 이용한다. 먼저, 편경의 옆면을 갈아서 음을 낮추는데 본음보다는 낮으나 근삿값에 가깝도록 연마한다. 그리고 고(鼓)와 고(股)의 모서리 부분을 갈아서 음을 높이면서 정확하게 조율한다. 각퇴로 쳐서 음의 높낮이를 맞추면서 여음과 배음을 잡는 등 복합적인 요소를 고려한다. 현대적 방식의 조율은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물을 사용하는 습식조율과 건조 후 이루어지는 건식조율이 있다.
편경은 온도와 습도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아서 음률의 표준이 된다. 1427년(세종 9)까지만 해도 궁중에는 중국에서 들여온 편경이 두 틀밖에 없었으며 나머지는 와경(瓦磬)으로 대체하고 있었다. 따라서 세종대왕의 악기 제작 사업은 중국에서 수입해 악기를 수급하던 방식에서 벗어났다는 의의가 있다. 경기도 남양에서 경석이 발견되어 재료를 공급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고 박연을 비롯한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참여하여 악기를 제작함으로써 중국의 것보다 소리가 좋은 편경을 자체적으로 완성했다. 자주적인 기술로 아악기를 제작함으로써 국가의 품격과 자부심을 높이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이는 예악으로 국가의 조화와 질서를 이루고자 한 세종대왕의 음악 정책과 인재의 발굴을 통한 전적인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경과 종의 제작 기술은 오늘날까지도 전승되고 있으며, 2010년과 2011년에는 2008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베트남의 궁중음악 냐냑[雅樂]의 편경ㆍ편종ㆍ특경ㆍ특종을 복원하여 기증함으로써 아악의 진흥에 기여했고 우리나라의 문화 역량을 보여주기도 했다.
○ 편경의 가치 『경국대전』,『대전회통』에 의하면 공인(工人)이 종이나 경을 만지다가 깨뜨리면 곤장 100대에 도형(徒刑) 3년의 벌을 주었다고 하니 이 악기를 얼마나 소중히 여겼는지 알 수 있다. 전쟁 통에도 악공이 종과 경을 지키기 위해 헌신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홍건적(紅巾賊)의 난’으로 사람들이 송나라에서 들여온 악기를 수호하기 어려웠는데, 어느 늙은 악공이 종ㆍ경 두 악기를 못 속에 던져 넣어서 보존할 수 있었다’라는 이야기가 『세종실록(世宗實錄)』의 1433년(세종 15) 1월 기사에 전한다. 1741년(영조 17) 7월 1일 기사를 토대로 예전에 발견된 경의 재사용 사례를 파악할 수 있다. 장악원 누각 위에 세종 15년 제작된 경이 있었는데, 사직단(社稷壇) 혹은 비변사(備邊司)의 옛터에서 얻은 것으로 추정된다. 승지 김상성이(金尙星) 이를 황단(皇壇)에 쓸 것을 건의했고 영조는 열 개 가량의 경 중에서 쓸 수 있는 것 네 개를 활용하도록 명하였다. 이처럼 편경은 재료가 귀할 뿐 아니라 제작하기도 어려우므로 궁중에서 귀중히 다루던 악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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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원(李壯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