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과 경기도를 중심으로 전승된 가창유희요
1910년 이후 서울 인근 지역에서 불렸던 민요로, 한일합방 당시 민족의 심정을 담고 있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처음 이 노래가 형성될 당시에는 〈온정타령〉이라는 곡명으로 불렸으며, 사발가로 굳어진 이후에는 이창배(李昌培, 1916~1983)에 의해 저속한 사설은 삭제되고, 사랑을 주제로 한 사설을 보충하여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였다.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에는 많이 불렸으나, 현재는 점점 잊혀 가는 민요 중의 하나이다. 이 곡은 3소박 4박자의 굿거리장단과 반경토리로 구성되어 있으며, 보편적으로 8마디를 메기고 3마디를 받는 유절형식이다.
<사발가>는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 때 유행하던 신민요 중의 하나이다. 1910년 형성될 당시 이 노래의 가사가 ‘석탄백탄 타는데, 연기만 펄펄 나구요’로 시작하기 때문에 <석탄백탄가>라고 불렸다. 1914년에 간행된 이상준의 조선속곡집상권(朝鮮俗曲集上卷)에 수록된 <도라지타령>의 가사 수록 부분에 ‘석탄백탄가곡도이와같고’라는 설명이 부가되어 있고, 곡조 역시 동일해서 <도라지타령>이라 불리기도 했다. 또한 근세 경기명창이었던 박춘재에 의하면 황해도 평산에서 생겨났다고 하여 <온정타령>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그러나 이 노래의 형성과정이나 유래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 역사적 변천 과정 사발가는 1914년의 『조선속곡집상권(朝鮮俗曲集上卷)』과 1916년의 『조선잡가집』에는 〈도라지타령(石炭白炭歌도調는갓소)〉로 기록되어 있는 바, 이 노래가 발생된 초기에는 〈도라지타령〉으로 불렸던 것으로 보인다. 〈도라지타령〉에 ‘石炭白炭歌도調는갓소’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석탄백탄가〉로도 불렸던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근세 명창이었던 박춘재는 황해도 온산에서 생겨난 노래라 하여 〈온정타령〉으로 부르기도 했다. 이와 같이 이 곡은 발생 초기 다양한 곡명으로 불렸다가 1949년 『조선의 민요』에서 현재와 같은 사발가로 곡명이 굳어진 것으로 보인다. 『조선의 민요』에 의하면 사발가라고 칭하는 곡명의 의미를 정확히 알 수 없다고 하였으나, 아마 처음 불리는 가사인 ‘금수강산 삼천리 풍년이 오니 한 사발 두 사발 함포고복이라’에 ‘사발’이라는 단어가 있기 때문에 붙여진 것으로 추측된다. 이 곡이 처음 불릴 당시는 일제강점기 당시 우리 민족의 억눌림 감정을 잘 표현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근래에는 임을 그리는 애타는 마음을 담고 있는 사설로 변화하였다. 이창배의 『한국가창대계』에 의하면, “이 사발가의 사설은 너무 저속하고 음외(淫猥)의 것이 많으므로, 필자가 많이 삭제, 보충하였다.”고 되어 있다.1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현재의 사발가 노랫말은 이창배에 의해 정리된 것으로 보인다. 콜럼비아음반이나 빅타음반 등 1930년대 유성기음반에 경서도명창들에 의해 녹음된 것이 남아 있는 바, 일제강점기 때에는 유행했던 신민요였다. 그러나 현재는 잊혀가고 있는 민요의 하나이다.
1) 이창배, 「한국가창대계」, 홍인문화사, 1976, 185쪽.
○ 음악적 특징 1910년 전후로 불리던 사발가(석탄백탄가)는 유성기음반에 대부분 조선악과 양악 합주의 관현악반주에 맞춰 노래한 형태로 녹음되어 있다. 그러나 콜럼비아음반에 이영산홍과 이진홍이 녹음한 음원2은 장구반주에 맞춰 노래한 형태인데, 후렴이 현재의 굿거리 세 장단과는 달리 두 장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레(re)-미(mi)-솔(sol)-라(la)-도′(do′)’의 5음음계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 구성음 중 생략되는 음이 없으며, 어느 하나의 특정한 음을 요성하지 않고, 곡을 마칠 때에는 하행으로 음계의 제일 아래음인 ‘레’로 종지한다. 이 곡의 음계 상으로만 보면 사발가(석탄백탄가)는 수심가토리에 해당하지만, 시김새의 운용과 곡을 끝마치는 형태는 경토리의 특징이 나타나고 있으므로, 한 곡 내에서 수심가토리와 경토리를 함께 운용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난홍(金蘭紅)이 녹음한 빅타음반이나 오케음반의 사발가는 콜롬비아음반의 녹음과도 다르며 현재의 것과도 다른 반음을 사용하는 애매한 형태로 녹음되어 있다. 결국 이 시기의 〈사발가〉는 서도 〈도라지타령〉의 음계와 경기 〈도라지타령〉의 시김새 활용 양상이 함께 존재하는 혼종성을 지닌 악곡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김옥심(金玉心, 1925~1988)이나 묵계월(墨桂月, 1921~2014)·이은주(李銀珠, 1922~2020) 등 동시대에 활동한 경기명창들의 노래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현재의 사발가는 ‘라(la)-도′(do′)-레′(re′)-미′(mi′)-솔′(sol′)’의 5음음계로 구성되어 있으며, 선율은 순차 진행을 하며, 특정한 음을 떠는 현상이 나타나지 않고, 음계의 제일 아래 음인 ‘라(la)’로 곡을 끝맺는 반경토리의 악곡이다. 장단은 3소박 4박의 경쾌한 굿거리장단이며, 보편적으로 8장단을 메기고 3장단을 후렴을 지닌 유절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2) Columbia 40136-A.
(후렴) 에헤요 어허야 어여라 난다 듸여라 허송 세월(虛送歲月)을 말아라. 1. 금수강산 삼천리 풍년이 오니 한 사발 두 사발 함포고복(含哺鼓腹)이라. 2. 일망무제(一望無際)²넓은 들에 가득이 심은 곡식은 농업 보국(農業報國) 다한 후에 학발양친(鶴髮兩親)을 봉양(奉養)하세. 3. 낙동강 칠백 리 포곡새(布穀鳥) 울고요 이 강산 삼천리 무궁화 피누나. 4. 백두산 천지(天池)가엔 백학(白鶴)이 너울대고 한라산 백록담(白鹿潭)엔 기린(麒麟)이 뛰논다. 5. 정든 임아 오실 테면 버젓하게나 오지요, 꿈속에만 오락가락 구곡간장(九曲肝腸)을 다 태운다.
1910년 이후 신민요로 등장한 사발가는 형성 당시에는 〈도라지타령〉 또는 〈석탄백탄가〉의 곡명으로 불리다가 1940년대 말 사발가라는 곡명으로 굳어졌다. 초창기에는 한일합병 당시의 민족적 정서를 표출하는 내용의 노랫말을 노래하기도 하였으나, 근래에 들어서는 임을 그리는 애 타는 마음을 담고 있는 내용의 노랫말로 변화하였다. 또한 서도의 수심가토리와 경기지방의 경토리가 혼종된 형태의 노래였으나, 현재는 경토리의 하나인 반경토리와 굿거리장단을 활용하고 있어 경기지방 민요의 특징을 잘 나타내는 악곡으로 변화하였다. 사발가는 서울 근교에서 불리던 신민요로 일제강점기 시절 유행하였으나, 현재는 잊혀가고 있는 민요 중의 하나이다.
성경린·장사훈, 『조선의 민요』, 국제음악문화사, 1949. 이창배, 『한국가창대계』, 홍인문화사, 1976. 임정란 편저, 『경기소리대전집 (下)』, 도서출판 무송, 2001. 김인숙, 「통속민요 〈사발가〉의 전통성과 시대성」, 『한국음반학』, 29, 2019.
이윤정(李侖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