놋쇠로 만든 둥근 그릇 모양의 악기로, 손에 들거나 틀에 매달아 놓고 둥근 채로 쳐서 소리내는 타악기
놋쇠로 만든 둥근 형태의 금속 타악기로 고대부터 모양새가 흡사한 악기들이 동남아시아 권역의 민족 음악에서 두루 활용되고 있다. 둥근 그릇 모양의 놋쇠에 끈을 달아 손에 들거나 틀에 매달고 채로 쳐 연주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민간음악과 불교 및 무속음악에 널리 사용되었다. 고려 시대부터 행진과 행렬의 고취악(鼓吹樂)으로 사용되었고 조선 시대에는 군영 악대에 편성되어 신호와 행진용 음악을 담당하였고, 《종묘제례악》의 〈정대업지무(定大業之舞)〉와 궁중정재 〈선유락(船遊樂)〉 반주에도 사용되었다. 현재 〈대취타(大吹打)〉에 편성된다.
징은 금정(金鉦) 또는 금(金)이라고도 하며 꽹과리와 함께 고대부터 사용되었다. 금(金)의 중국어 발음 [Jīn]이 우리나라에서 악기 이름으로 정착된 듯하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동남아시아 권역의 민족음악에서 두루 활용되는 악기이다. 인도네시아 ‘가믈란Gamelan’의 ‘공(Gong)’이나 태국의 ‘칭(ching)’, 베트남의 ‘지엥(Chieng)’처럼 모양새가 징과 흡사한 악기가 여러 민속 음악에 활용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일찍이 농악을 비롯한 민간음악에 사용되었다. 고려 시대에는 군대의 취타에 편성한 기록이 있다. 『고려사』에 의하면 고려 때 왕의 행차에 따르는 의장 행렬인 노부(鹵簿)에서 금정이 다른 타악기와 함께 연주되었다. 법가노부(法駕鹵簿)에 금정 열 명, 팔관노부(八關鹵簿)에 금정 열 명이 편성되었다. 조선 시대 『세종실록ㆍ오례』 「군례」 병기에서 정(鉦, 징)과 금을 같다 하였고, 쟁(錚)과 동라(銅鑼)의 명칭도 보인다.
궁중에서는 금을 북[鼓]과 함께 노부에 편성하여 사용하였다. 군영에서는 금과 정의 기능을 구분하여, 『병학지남연의』에서 정은 진퇴를 명(命)하는 악기로, 금은 진퇴를 금(禁)하는 악기라고 했다. 『세종실록』에는 금고(金鼓) 또는 금정(金鉦)이 보인다. 또한 변방의 장수들에게 밤사이 마을을 지킬 때 조두(刁斗)를 치게 하였는데, 조두는 군용도구로 낮에는 취사도구로 쓰이고 밤에는 경비하기 위하여 두드리는 동라라고 하였다. 징은 이처럼 금ㆍ쟁ㆍ정ㆍ동라ㆍ나ㆍ금고ㆍ금정 등의 명칭으로 불리며 주로 군영 악기로 사용되었다. 종묘제례에서는 <<정대업>> 악곡의 끝을 알리는 역할을 하였고 『악학궤범』 「정대업의물도설」에 ‘대금(大金)’으로 수록되었다. <<정대업>> 이 끝날 무렵의 대금 10차(大金十次)가 현행 징이 담당하는 부분이다.
조선 후기에 징은 북, 호적, 자바라, 나발, 나각 등과 함께 군영 악대에 편성되었고, 내취로서 궁중정재 〈선유락〉의 반주에 사용되기도 하였다. 징을 연주하는 사람을 나수(鑼手)ㆍ정수(鉦手)라 하였다. 1711년(숙종 37) 〈조선통신사행렬도 등성행렬〉등에서 징 연주자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 후기의 『여지도서』 중 충청도 수영(水營)지에도 징 연주자 위에 ‘세악(細樂)’이라고 표기한 것이 보인다. 근대에 내취의 일부가 장악과(掌樂課)에 들어온 이후 현재까지 징은 대취타를 연주하는 궁중 악기로 전승되고 있다. 현재 대취타는 ‘명금일하대취타(鳴金一下大吹打)’라는 구호로 음악을 시작하는데, 이때 ‘명금일(鳴金一)’은 징을 한 번 울리라’라는 의미이다. 조선시대 군대의식 관련 자료에는 ‘명금이(鳴金二)’, ‘명금삼하(鳴金三)’로 나타난다. 한편, 징은 농악과 같은 민속 음악, 무속 음악, 불교 음악에서도 중요한 악기로 사용되었다. 농악에서 리듬 절주의 대박이나 대점을 짚어주는 기능을 하고, 무속 음악에서는 무가와 무무를 반주하는 삼현육각에 편성된다. 민속 음악에서는 각 거리 또는 과장의 끝이나 전체 공연의 끝에서 최종 종지(終止)를 알리는 역할을 맡고 있다. 오늘날 악기의 명칭이 징으로 통합되어 전승되고 있으나, 무속에서는 무징ㆍ대영ㆍ대양ㆍ울징 등으로도 부르고, 불교에서는 태징(太鉦)ㆍ금고(金鼓) 등 여러 명칭이 사용된다.
○구조와 형태
울림판이 되는 몸체, 악기를 손에 들기 위해 매단 끈, 징을 쳐서 울리는 채로 구성된다. 징 바닥(징을 치는 면)에 그려진 나이테 모양의 무늬는 ‘상사’라 하고, 징 채가 닿는 부분을 ‘봉뎅이’, 테두리에 해당하는 부분을 ‘전두리’ 또는 ‘시울’이라고 한다. 바닥과 전두리가 연결되는 각진 부분을 ‘귀미’라고 부른다.
징채의 끝은 방울같이 불룩하게 하고 헝겊으로 망태를 씌운다.
-징 바닥의 두께는, 징채가 닿는 봉뎅이 부분이 두껍고, 전두리 쪽으로 갈수록 얇아진다.
-전두리의 너비가 짧으면 파장이 짧아 얕은 소리가 나고, 지나치게 길면 소리가 알맞은 파장을 형성하지 못해 오히려 소리가 나지 않는다.
-전두리 안쪽에 구멍을 뚫어 끈을 꿴다.
○ 음역과 조율법
징은 음역은 약 G2~B2이다. 음고에 따라 암징과 수징으로 구분한다. 두 개의 징을 기준으로 저음은 암징, 고음은 수징으로 하는 상대적인 개념이다.
○ 구음과 표기법
금속 타악기인 징은 대개 ‘징’의 구음을 그대로 사용한다. 강세가 있는 부분은 경음화(硬音化)하여 ‘찡’이라 하고, 약하게 칠 때는 ‘지’, 울림판을 막고 칠 때는 ‘짓’이라 한다.
○ 연주방법과 기법
징은 악기 자체가 가진 소리를 울려주는 것인 만큼 특별히 개발된 연주법은 없다.
손에 들고 서서 치거나, 틀에 매달아 앉아서 친다. 굿을 할 때는 엎어놓고 치거나, 〈시나위〉 합주 시 왼손에 들고 오른손에 채를 잡고 친다. 농악에서는 징을 들고 춤을 추기도 한다. 징을 칠 때 징 가운데 부분을 치기도 하고, 옆모서리를 치기도 한다.
○ 연주악곡
〈대취타(무령지곡)〉ㆍ〈종묘제례악〉ㆍ〈사물놀이〉ㆍ<진도씻김굿 무가>ㆍ<경기도당굿 무가>, <농악>, <불교음악 회심곡> 등에 편성한다.
○ 제작 및 관리 방법 전통적으로 징은 방짜유기 제작방식에 따라 만들어졌다. 구리와 주석의 합금인 청동에 열을 가해 녹여 망치로 두들기고 찬물에 담금질하여 유기를 제작한다. 합금ㆍ바둑 만들기ㆍ네핌질ㆍ우김질ㆍ냄질ㆍ닥팀찔ㆍ제질ㆍ담금질ㆍ울음질ㆍ가질 순으로 그 과정을 거친다. 그러나 징의 제작과정은 제작자에 따라 순서가 정형화되어 있지 않고, 재료의 비율도 정량화되어 있지 않다. 『세종실록』에 금은 동(銅)으로 만든다고 하였고, 『악학궤범』에 대금(大金)은 유철로 만들고, 채는 사슴가죽을 말아서 썼다고 하였다. 오늘날에도 구리와 주석을 합금하여 징을 만든다. 징채는 나무 막대기를 천으로 감싸 만든다.
징은 쇠를 울려서 내는 소리이지만 다른 타악기에 비해 잔향(殘響)이 오래 지속되기 때문에 웅장하면서 은은한 음향이 퍼지는 특징을 가진다. 크기와 두께에 따라 음고(音高)와 음색이 다르고 채로 치는 세기와 방식에 따라 효과도 다르므로, 용도에 따라 사용하는 징의 종류와 연주방식이 다양하다. 군대에서는 신호용으로 사용되었는데 퇴진을 알리는 데 징이 사용되었고, 농악에서는 울림이 길어 다른 악기들의 연주를 감싸 안는 역할을 한다. 제주도 신화인 〈삼승할망본풀이〉에서 징소리는 천신을 감동시키는 악기로 관념화되어 있기도 하다. 징이 독주 악기로 쓰이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농악ㆍ풍물,ㆍ사물놀이편성에서 빠지지 않는 중요한 악기이며, 〈대취타〉 연주 악기로서 전통시대 군영 음악을 계승하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
『국조오례의』 『세종실록』 『악학궤범』 이숙희, 『조선후기 군영악대 취고수·세악수·내취』, 태학사, 2007 성굉모, 「징 음향측정 및 분석」, 국악원 논문집, 1994
오지혜(吳䝷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