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용도, 화용도타령
소설 『삼국지연의』 가운데 적벽대전을 중심으로 영웅들의 쟁투와 군사들의 애환을 엮어 재구성한 판소리
적벽가는 중국소설 『삼국지연의』의 ‘적벽대전’을 중심으로 영웅적 서사와 군사들의 이야기를 병치시켜 새로운 작품으로 재탄생된 판소리이다. 외국소설을 번안하여 만든 최초의 판소리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적벽가에서는 유비ㆍ관우ㆍ장비ㆍ제갈공명ㆍ조자룡 등의 영웅을 긍정적으로 그리는 반면, 조조는 간웅으로서의 부정적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조조는 부하들이나 군사들로부터 조롱받고 비하당하면서 골계적 모습으로 표현된다. 한편 군사들은 전쟁 전후의 인간적인 모습을 드러내면서 작품의 또 다른 주인공으로 떠오른다. 적벽가는 전쟁을 통해 고통받는 군사들을 그림으로써 전쟁의 비극과 허망함을 주제로 드러내고 있다. 적벽가는 양반층의 애호를 받았던 소리로, 19세기 이래 〈삼고초려〉나 〈군사설움〉, 〈새타령〉 등 음악적으로 잘 짜여진 더늠들이 첨가되면서 발전하였다. 적벽가는 현재 동편제 계열의 박봉술제와 서편제 계열의 정응민제, 중고제 계열의 박동진제, 근현대 새롭게 짠 김연수제가 함께 전승되고 있다.
적벽가는 중국의 소설 『삼국지연의』를 바탕으로 하여 유비ㆍ관우ㆍ장비ㆍ제갈공명ㆍ조자룡 등의 영웅들과 그들이 벌이는 사건을 그리는 동시에 적벽대전에 패하여 도망하는 조조를 골계적이고 부정적으로 그리고 있는 판소리이다. 소설 중 적벽대전 부분을 중심으로 사건을 전개하고 있지만, 판소리에서는 전쟁을 치르는 군사들의 이야기가 많이 반영되어 새로운 작품으로 환골탈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송만재(宋晩載, 1788~1851)의 『관우희(觀優戱)』(1843)에는 ‘가을비 속에 화용도로 도망친 조조, 말 위에서 관우가 칼을 쥐고 쳐다보니, 군졸 앞에서 꼬리를 흔들며 아첨하네, 우습구나 간웅이여 모골이 오싹했겠지(秋雨華容走阿瞞, 髥公一馬把刀看. 軍前搖尾眞狐媚, 可笑奸雄骨欲寒)’라고 하여 화용도로 패주하는 장면을 한시로 그리고 있다. 19세기 전반기의 명창 송흥록, 모흥갑, 방만춘, 주덕기 등 많은 명창들이 일찍부터 적벽가를 장기로 삼았다.
○ 내용과 주제 적벽가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유비, 관우, 장비는 도원결의를 하며 천하를 구하고자 뜻을 품고, 제갈공명을 모시기 위해 삼고초려한다. 제갈공명은 유비의 뜻에 감복하여 책사가 된다. 이후 유비는 조조의 군사에게 밀려 피신하고 장판교에서 조자룡과 장비는 승리를 거둔다. 오나라 손권은 유비의 군대와 합세하여 조조를 물리치기로 하는데, 제갈공명은 십만 개의 화살을 얻어 손권에게 신임을 얻는다. 이후 조조는 백만대군을 몰아 적벽강에서 싸움을 준비하는데, 조조 군사들은 전쟁 전날 주육을 포식하며 고향과 가족을 그리워한다. 마침내 제갈공명이 동남풍을 빌어 화공으로 공격하자 조조의 군사들은 몰살하게 되고 조조는 화용도로 패주하여 달아난다. 조조는 도망을 하며 정욱과 군사들로부터 조롱을 당한다. 여러 장수들에게 쫓기다 마지막으로 관우를 만난 조조는 관우에게 지난 날의 인연을 들어 목숨을 애걸하고 결국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도망하게 된다. 적벽가는 중국소설인 『삼국지연의』의 적벽대전을 소재로 하여 판소리화 되었지만, 서사와 인물 등이 새롭게 재구성되어 연행되었다. 『삼국지연의』가 판소리 적벽가로 변화되면서 달라진 두드러진 특징은 조조의 골계화와 더불어 군사들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그려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원래의 소설이 가지고 있던 부분을 우리의 것으로 개조, 변화시키면서 적벽가는 조조와 같은 인물의 영웅성을 제거하고 이름 모를 군사들의 애환을 골계적으로 그려내었다. 곧 군사들의 시각으로 전쟁을 그려내어 수많은 인명의 희생 위에서 얻어지는 영웅들의 공명이 타당한가를 성찰하고 있다. 이와 함께 군사들이 처한 전쟁의 비극상을 강조함으로써 영웅 중심의 서사와 서민 중심의 서사를 동등하게 그려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적벽가는 원래의 서사 단락과 병치된 조조와 군사의 모습을 통해 영웅과 용맹의 덧없음을 보여 주고 있다. 여기서 설정된 조조와 군사의 관계는 영웅과 개인, 전쟁과 개인, 국가와 개인이라는 대립항을 설정하면서 끊임없이 골계화 된다. 한편 긍정적 영웅상으로 부각되고 있는 유비ㆍ관우ㆍ장비ㆍ제갈공명ㆍ조자룡 등은 원래의 긍정적인 모습을 간직하는 것으로 그려져 간웅과 영웅의 대립 구도를 형성한다. 조조는 긍정적 영웅들에게서는 물론이고, 자신의 책사(策士)와 군사들에게조차 철저하게 조롱당하고 바보 같은 인물로 떨어져 『삼국지연의』의 모습에서 완전히 일탈되고 있다. 적벽가의 서술 시각은 조조의 패주와 권위 추락에 집중되어 있다. 조조는 서사 진행상의 주 인물이며, 주된 골계의 대상이다. 적벽가는 군사들이 전쟁에 참여하는 모습과 군사 개인의 삶에 초점을 둠으로써 전쟁이라는 외적 상황과 그로 인한 삶의 비극을 골계적으로 부각하였다. ‘적벽대전’에서 군사들이 끊임없이 죽어가는 모습을 그린 〈죽고타령〉은 그러한 모습을 잘 보여준다.
가련할손 백만 군병은 날도 뛰도 못하고, 숨 막히고 기막히고, 살도 맞고 창에도 찔려, 앉아 죽고, 서서 죽고, 울다가 웃다 죽고, 밟혀 죽고, 맞아 죽고, 원통히 죽고, 불쌍히 죽고, 애써 죽고, 똥싸 죽고, 가엾이 죽고, 성내어 죽고, 졸다가 죽고, 진실로 죽고, 재담으로 죽고, 무단히 죽고, 함부로 덤부로 죽고, 떼떼구르르 궁굴며 아뿔싸 가슴 탕탕 두드리며 죽고, 참으로 죽고, 거짓말로 죽고, 죽어보느라고 죽고, ‘이놈 네에미’ 욕하며 죽고, 떡 입에다 물고 죽고, 꿈꾸다가 죽고, 한 놈은 선두로 우루루루루루루 나서 이마 우에 손을 얹고 고향을 바라보며, 앙천통곡 호천망극, ‘아이고, 어머니. 나는 죽습니다.’ 물에 가 풍 빠져 죽고, 한 군사 내달으며, ‘나는 남의 오대독신이로구나. 칠십당년 늙은 양친을 내가 다시 못 보고 죽겄구나. 내가 아무 때라도 이 봉변 당하면은 먹고 죽을라고 비상 사 넣었더니라.’ 와삭와삭 깨물어 먹고 죽고, 한 놈은 그 통에 한가한 치라고 시조 반 장을 빼다 죽고, 즉사, 몰사, 대해수중의 깊은 물에 사람을 모두 국수 풀 듯 더럭더럭 풀며, 적극, 조총, 괴암통, 남날개, 도래송곳, 독바늘 적벽풍파에 떠나갈 적에, 일등 명장이 쓸 데가 없고, 날랜 장수가 무용이로구나.
「박봉술바디 송순섭 창본」 최동현 외, 『교주본 적벽가』, 민속원, 2015.
이러한 사설은 원전의 모습에서 벗어난 것으로 판소리적 세계관에 기반하여 창조된 것이다. 적벽대전 전야 군사들의 모습은 사기로 충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술잔치 후의 난장판과 고향 생각을 토로하는 것이 그 주종을 이룬다. 주육을 포식한 군사들의 모습은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는 등 어느 곳에서도 전쟁을 준비하는 긴장된 상황을 찾아보기 어렵다. 놀이판이 벌어지는 속에서 누군가의 슬픈 사연이 고백되자, 군사들은 각기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하게 된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전쟁의 승리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미 조조의 군사들에게는 국가의 승패가 문제가 아니라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 자신의 삶이 문제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곧 적벽가는 이어지는 적벽대전 속에서 이름 없이 죽어가는 군사의 모습을 통해 ‘일등 명장이 쓸 데가 없고, 날랜 장수가 무용(無用)’이라는 새로운 주제를 선언하게 된다. ○ 전승과 유파 적벽가는 19세기에 매우 인기있는 작품으로 널리 불렸다. 특히 양반층들의 애호를 받으며 남성 중심의 연행 공간에서 주로 불리웠다. 『조선창극사』에는 적벽가를 잘 불렀던 명창으로 박만순, 정춘풍, 김창록, 서성관, 조기홍, 박기홍, 송만갑, 신명학, 이창운, 박상도, 이동백, 김창룡 등을 들었는데, 이들은 주로 중고제나 동편제 명창들이다. 서편제 박유전이나 후대 한승호 명창, 강산제 정권진 명창들도 적벽가로 이름이 높았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가면서 남성 명창들의 씩씩한 우조 소리보다는 여성적이고 섬세한 계면 소리가 득세하면서 점차 적벽가의 인기도 쇠퇴하였다. 적벽가의 눈대목으로는 〈삼고초려〉ㆍ〈군사설움〉ㆍ〈조자룡 활쏘는 대목〉ㆍ〈적벽화전〉ㆍ〈군사점고〉ㆍ〈새타령〉 등이 있다. 적벽가는 앞부분 〈삼고초려〉 대목이 있는가에 따라 적벽가 계열과 《민적벽가》 계열로 나누기도 하는데, 애초 동편제 소리에는 〈삼고초려〉 대목이 없었으나, 후대에는 거의 〈삼고초려〉 대목을 수용하여 넣었다. 이 대목은 중고제 명창들이 잘 불렀는데, 특히 근대의 명창 김창룡(金昌龍, 1872~1935)이 현재와 같은 〈삼고초려〉 대목의 틀을 잡았을 것으로 보이며, 이동백(李東伯, 1867~1950) 역시 이 대목을 잘 불렀다. 적벽가의 국가무형문화유산 보유자로 박봉술(동편제), 박동진(중고제), 한승호(서편제) 명창이 활약했으며, 현재 송순섭(박봉술제), 김일구(박봉술제), 윤진철(정응민제) 명창이 보유자로 지정되어 있다. 이 외에 김연수제와 임방울제, 이동백제 적벽가도 이어지고 있다.
적벽가는 다른 판소리와 달리 소설 『삼국지연의』를 원작으로 하여 우리의 미학과 정서를 담아 재구성된 판소리이다. 당대 양반층들에게 인기가 높았던 『삼국지연의』를 판소리로 재창조한 것으로, 외국소설 작품을 판소리화한 최초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조선 후기 양반 남성들에게 교양물로 익숙하던 소설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판소리가 설화뿐 아니라 소설을 통해 형성되기도 하였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사설에 한자를 많이 사용하고 음악적인 면에서는 우조 중심의 장중한 음악성을 구현하고 있기 때문에 가장 부르기 어려운 소리로 꼽힌다.
적벽가는 소설의 번안 과정에서 우리의 정서와 표현들을 적절히 포함하고, 원작에는 없었던 군사들의 모습을 〈군사설움대목〉, 〈적벽화전대목〉, 〈군사점고대목〉에 그려 넣으면서 주인공을 영웅이 아닌 서민 군사들로 이동시켰다. 그리고 이를 통해 전쟁의 비극과 허망함을 주제로 다루었다는 점에서 재창조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정욱의 방자적 기능을 통해 조조의 희화화를 강하게 드러냄으로써 간웅에 대한 경계와 비판적 의식을 골계적으로 표현하였다. 현재 적벽가는 창극, 뮤지컬 등으로 계속 재창조되면서 전쟁을 소재로 한 창작 판소리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판소리: 국가무형문화유산(1964) 판소리: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2003)
구사회 외, 『송만재의 관우희 연구』, 보고사, 2013. 김기형, 『적벽가 연구』, 민속원, 2000. 정노식 저ㆍ정병헌 교주, 『조선창극사』, 태학사, 1997. 최동현ㆍ김기형, 『적벽가 연구』, 신아출판사, 2000. 최동현ㆍ최혜진, 『교주본 적벽가』, 민속원, 2015. 최혜진, 『판소리계 소설의 미학』, 역락, 2000.
최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