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림통 둘레에 용이 그려진 북으로, 북면을 위로 향하게 허리에 매고 두 개의 채로 연주하는 타악기
고려 시대 이래 행악에 사용된 북과 관련이 있다. 용이 그려진 북통 양쪽에 둥근 고리를 달고 흰 무명천을 꿰어 허리에 매고 북의 가죽 면을 위로 향하게 하여 양손에 각각 북채를 쥐고 연주한다. 임금 행차나 군대에 활용되던 군례 악기로 임진왜란 이후에는 군영 악대에 편성되었고, 현재는 〈대취타〉 연주에 사용된다.
용고는 고려 시대부터 사용된 군례용 악기인 행고(行鼓)와 관련이 있다. 중국 송나라 서긍(徐兢, ?~?)의 『고려도경』 「병기」에, 고려에서 군대가 행진할 때 연주된 북으로 ‘행고’가 보인다. 북의 형태는 아악(雅樂)에 쓰이는 부[搏拊]와 닮았는데 울림통[中腔]이 조금 길고 구리 고리와 자주색 띠로 허리 아래 매었다고 하였다. 함께 사용된 악기로는 금요(金鐃)와 호가(胡笳) 등이 소개되었으며, 이는 고려 시대 군영에서 사용된 징, 태평소로 추측된다. 『세종실록』 1451년(문종 1) 군대의 편제를 지휘할 때도 ‘고’와 ‘행고’가 사용되었다. 『세종실록ㆍ오례』 「군례」 ‘병기’에도 비(鞞)와 고(鼓)가 소개되었는데 ‘비’는 군대가 행진할 적에 말 위에서 치는 북이라고 했고, ‘고’는 설명이 없지만 그림에 의하면 북통 둘레 양면에 둥근 고리가 있는 것이 현행 용고의 형태와 같다. 다만 북통 둘레에 용의 그림은 없다. 이러한 군례용 악기들은 세조 이후 《정대업》 연주와 길례(吉禮)의 종묘 헌가(軒架)와 가례(嘉禮)의 전정헌가(殿庭軒架)에 편성되면서 궁중 의례에서도 사용되었다.
성종 때 편찬된 『악학궤범』 「정대업지무의물도」에 수록된 대고(大鼓)ㆍ소고(小鼓) 역시 북통에 둥근 고리가 있는 것이 용고와 닮았다. 다만 북통 둘레에는 붉은색을 칠하고 모란을 그렸는데, 고리는 도금하고 홍색끈을 달았으므로 『고려도경』의 행고 및 『세종실록ㆍ오례』의 병기 고와 일맥상통한다. 김홍도(金弘道, ?~?)의 그림으로 전하는 <평양감사향연도>에서도 붉은색의 북을 사용하는 취타악대를 볼 수 있다.
조선 후기에는 군영에 취고수(吹鼓手)를 두어 북을 사용하였으나 그 명칭이 ‘고’일 뿐, ‘용고’라는 명칭이 보이지 않는다. 군영에서 사용한 북은 『악학궤범』에 대고ㆍ중고ㆍ소고, 『만기요람』에는 대고ㆍ대행고ㆍ중행고ㆍ소행고 등으로 소개되었고, 국왕 친위부대인 용호영에는 북통을 용으로 장식한 화룡대고ㆍ화룡행고 등이 있었다. 1985년 을미개혁 이후 군사제도 개편으로 기존의 군영 악대가 해산되었다. 이 때 취타악기 일부가 궁중음악기관인 장악과(掌樂課)에 이속되었고, 군영에서 사용하던 ‘행고’도 궁중에서 ‘대취타’를 연주하는 악기로 전승되면서 ‘행고’가 ‘용고’라는 명칭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1917년 함화진(咸和鎭, 1884~1949)은 『조선악개요』에서 취타악기를 구군악(舊軍樂)으로 분류하고, 그 편성 악기 일곱 중 북을 ‘용고’라 소개하였다. 1921년 다나베 히사오의 『조선아악요람』에도 취타악기의 북이 ‘용고’로 되어 있다.
○구조와 형태 용고는 몸체와 채 두 개로 구성된다. 몸체는 양쪽 북면과 울림통으로 구분된다. 울림통은 전체가 빈 공간이고 바깥쪽 둘레에 용이 그려져 있다. 울림통에 달린 둥근 고리 두 개는 어깨나 허리에 매는 끈을 꿰는 데 사용한다. ○구음과 표기법 용고는 두 개의 북면 중 한 면을 양손에 채를 쥐고 치므로 오른손과 왼손의 주법에 따라 구음을 달리한다. 오른손 채로 칠 때는 ‘덩’, 왼손으로 칠 때는 ‘궁’이라 하고, 강세가 있는 경우 ‘떵’이나 ‘꿍’과 같은 경음을 사용한다. ○연주 방법과 기법 울림통에 달린 두 고리에 흰 무명천을 꿰어 어깨에 걸치고 북통이 연주자 허리에 오도록 하되, 왼쪽을 높여 비스듬하게 맨다. 양손에 채 둘을 쥐고 오른손부터 치되 북채 끝이 왼편 겨드랑이 앞을 스치도록 들어 머리 위까지 들어 올렸다가 북채를 떨어뜨리며 내리쳐 연주한다. 양손을 번갈아 친다. ○연주악곡 현재 〈황실대취타〉ㆍ〈별가락〉ㆍ〈국거리(굿거리)〉ㆍ〈대취타(무령지곡)〉에 편성한다. ○제작 및 관리 방법 북은 울림통과 가죽면으로 구성된다. 울림통은 굵은 소나무를 통째로 사용해서 안쪽을 파내어 만드나 요즘은 굵은 소나무가 적어 일정한 두께의 나무판 여러 쪽을 이어 붙여서 만든다. 가죽은 소가죽을 쓰며, 그 질과 두께, 부위에 따라 소리가 좌우되므로 몇 단계의 무두질 작업이 필요하다. 먼저, 가죽 표면의 털을 제거하기 위해 석회물에 담그고, 기름기를 제거하기 위해 닭똥이나 된장물에 담그는 작업을 여러 차례 반복하고, 대패질하여 알맞은 두께로 만든다. 무두질이 끝난 소가죽을 북통의 크기에 맞게 재단하여 가죽을 북통에 메운다. 다음으로 북통과 가죽에 색을 입히고 북통에는 용 문양을 그려 넣는다. 국립무형유산원에서 1981년 제작한 ‘북메우기’ 영상에 북의 제작과정이 담겨있다.
용고는 〈대취타(大吹打)〉를 연주할 때 허리에 매어 두고 치는 북으로 북통에는 용 문양이 그려져 있다. ‘용고’라는 명칭은 20세기 이후에 사용되었고, 고려 시대 이래로 임금의 행차나 군대의 행진에 사용된 ‘행고’와 관련이 깊다. 군영에서 사용되었던 대표적인 신호용 악기인 ‘행고’는 특히 군대의 전진, 출격을 알리는 데 쓰였다. 문헌에서 ‘행고’는 북통 둘레에 둥근 고리를 달아 놓은 것이 특징적이다. 이는 행진하며 연주하기 위해 어깨나 허리에 묶을 수 있는 천을 꿰어 달고 북을 몸에 고정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조선 시대 군영에서 사용된 ‘행고’는 둘레에 붉은 칠을 하고, 모란을 그려 넣었다. 근대 이후 군영악대의 행고를 포함한 취타악기 일부가 장악원으로 이속되었고, 궁중 음악으로 편입되어, 〈대취타〉 연주악기로 전승되고 있다. ‘용고’라는 명칭은 1917년 조선악개요에서 취타악기 북을 ‘용고’로 소개해 놓은 것에서 처음 보이며, 북 둘레에 용이 그려져 있어 ‘용고’라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용고’ 이전에 조선 임금의 친위대인 용호영에서 사용한 화룡대고ㆍ화룡행고와 궁중의식 음악에 사용된 교방고ㆍ좌고ㆍ중고 등도 북통을 용으로 장식한 악기를 사용한 바 있다. 또한 189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와 1900년 프랑스 파리 만국박람회에 출품된 물품 중에도 용 문양으로 장식한 ‘용고’가 포함되기도 하였다. 다만 용 문양을 장식으로 사용했던 ‘용고’와 취타악기 ‘용고’는 구분할 필요가 있다. 현재 용고는 〈대취타〉에서 반복적으로 일정한 리듬을 연주하며 위장대로서의 의욕과 자신감을 고취시키는 행고의 역할을 담당한다. 행악을 연주하던 ‘행고’가 궁중의례악기로 변용되어 대취타의 위엄과 상징을 표현하는 악기로 전승되어 연주되고 있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고려사』 『악학궤범』 『선화봉사고려도경』 『세종실록ㆍ오례』 김성혜, 「1711년 조선통신사 등성행렬도의 취타수 연구」, 『진단학보』 113, 2011. 이숙희, 「조선 후기 취고수 제도의 형성과 전개」, 『국사관논총』 105, 2004. 장경희, 「보물 제440호 통영 충렬사 팔사품(八賜品) 연구」 『역사민속학』 46, 2014
오지혜(吳䝷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