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 꾀 내는 대목
판소리 《수궁가》 중 한 대목으로, 토끼의 배를 갈라 간을 내놓으라는 말에 토끼가 꾀를 내어 뱃속에 간이 없다 둘러대는 대목
어서 배를 갈라 간을 내어놓으라는 용왕과, 자신의 배에는 간이 없다 주장하는 토끼의 논쟁 대목이다. 《수궁가》에는 동물들이 등장하여 언변 대결을 벌이는 장면이 많이 등장하는데, 토끼 배 가르는 대목은 지배 계급이자 지식인으로 대표되는 용왕과, 미천한 신분의 무식한 토끼의 대결로, 판소리의 풍자적 성격 및 조선 후기 서민 의식이 잘 드러난다.
1940년에 출판된 정노식의 『조선창극사』에는 송흥록이 맹렬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하여 진주 병사 이경하 앞에서 토끼 배 가르는 대목을 애원성으로 불렀으며, 이로써 좌중이 울음바다가 되었다는 일화를 기록하고 있다. 이 점으로 보아, 19세기 전반 무렵에도 토끼 배 가르는 대목이 불렸던 것을 알 수 있는데, 사설이 전하지 않아 오늘날 불리는 형태와의 유사성은 알 수 없다.
토끼가 수궁에 당도하자, 용왕은 어서 토끼의 배를 갈라 간을 내어 올리라 한다. 수궁에서 벼슬도 하고 안락한 삶을 누릴 기대에 부풀었던 토끼는 자신이 별주부에게 속았음을 알고, 죽을 위기를 넘기고자, 얼른 꾀를 내어 당당하게 배를 따보라 한다. 그런 토끼의 행동이 의아했던 용왕은 분명 곡절이 있다고 여겨 토끼에게 하고픈 말을 해보라 하고, 토끼는 비간(比干)의 고사를 거론하며 자신의 배에는 간이 없다고 한다. 용왕은 토끼의 말이 당치 않다고 꾸짖으나, 토끼는 이에 굴하지 않고 보름이면 간을 내고 그믐이면 간을 들인다는 궤변을 펴고, 결국 용왕은 토끼의 말에 속는다. 용왕과 토끼가 서로 주고받는 사설의 구체적인 내용은 유파에 관계없이 대체로 대동소이하여, ‘성현–의서-토끼 간-밑궁기 내력-별주부 비난’으로 전개된다. 장단은 조금 빠른 템포의 중모리장단으로 되어 있고, 악조는 우조와 계면조가 섞여 사용된다. 대개 왕이 말하는 부분은 평조나 우조로 부르고 토끼가 말하는 부분은 계면조로 불러, 두 배역이 서로 주고받는 대화의 입체감을 살린다. 이와 같이 두 인물의 대화를 서로 다른 악조를 사용하여 부르는 것은, 한 사람의 판소리 창자가 소리함에도 마치 여러 인물이 배역을 나누어 부르는 것 같은 극적인 효과를 살리기 위한 장치이다.
(아니리) 용왕이 분부허시되, “네 토끼 듣거라. 내 우연득병하야 명의더러 물은즉 네 간이 으뜸이라 허기로, 우리 수궁의 어진 신하를 보내어 너를 잡어왔으니, 너 죽노라 한을 마라. 여봐라 토끼 배를 쫙 갈라 간을 내어, 더운 짐에 소금 찍어 두서너 점만 올려라” 토끼가 생각허니, ‘별주부한테 끌려와서 꼭 죽게 되었구나. 에라, 이왕 내가 죽을 바에야 패술이나 한번 쓰고 죽자’ 토끼란 놈이 한 꾀를 얼른 내어 배를 척 내밀며, “자 내 배 따보시오” 용왕이 생각허기를, ‘저놈이 배를 안 때일라고 무수히 잔말을 헐 텐디, 저리 의심없이 배를 척 내민 걸 보니, 필유곡절이 있는 게로구나’ “네가 무슨 말이 있거든 말이나 하려무나” “아니오. 내가 말을 해도 곧이 안 들을테니, 두 말 말고 내 배 따보시오” “야 이놈아. 말이나 허고 죽으려무나” “아니오. 내가 말을 해도 곧이 안 들을 테니, 두 말 말고 내 배 따보시오” 아, 배 따보라고 헐 제 얼른 배 따가지고 간 내 먹었으면 아무 일이 없을 텐디, 꼭 일이 그릇되느라고, “아니, 이놈아. 이왕에 죽을 바에야 말이나 허고 죽으려무나” (중모리) “말을 허라니 허오리다. 말을 허라니 허오리다. 태산이 붕퇴허여 오성이 음음헌디, 시일갈상 노래 소리 탐학헌 상주임군 성현의 뱃속에 칠궁기가 있다기로, 비간의 배를 갈라 무고히 죽였으나 일곱 궁기 없었으니, 소퇴도 배를 갈라 간이 들었으면 좋으려니와, 만일에 간이 없고 보면은 불쌍헌 퇴명만 끊사오니, 뉘를 보고 달라허며, 어찌 다시 구하리까? 당장에 배를 따서 보옵소서” 용왕이 듣고 진노허여, “이놈 네 말이 모두 다 당치 않는 말이로구나. 의서에 이르기를 비수병즉 구불능식허고, 담수병즉 설불능언허고, 신수병즉 이불능청허고, 간수병즉 목불능시라. 간이 없고야 눈을 들어 만물을 보느냐” “예 소퇴가 아뢰리다. 소퇴의 간인즉 월륜정기로 삼겼삽더니, 보름이면 간을 내고, 그믐이면 간을 들이내다. 세상에서 병객들이 소퇴 곧 얼른허면 간을 달라고 보채기로, 간을 내어 파초 잎에다 꼭 꼭 싸서, 칡노로 칭칭 동여, 영주 석상 계수나무 늘어진 상상가지 끝끝터리에 달아매고, 도화유수 옥계변에 탁족하러 내려왔다, 우연히 주부를 만나 수궁 흥미가 좋다기로, 완경차로 왔나이다” 용왕이 듣고 화를 내며, “이놈 네 말이 모두 다 당치 않는 말이로구나. 사람이나 짐승이나 일신지내장은 다를 바가 없는디, 네가 어찌 간을 내고 들이고 임의로 출입헌단 말이냐?” 토끼가 당돌히 여짜오되, “대왕은 지기일이요, 미지기이로소이다. 복희씨는 어이하야 사신인수가 되었으며, 신농씨 어쩐 일로 인신우수가 되었으며, 대왕은 어이하야 꼬리가 저리 지드란허옵고, 소퇴는 무슨 일로 꼬리가 요리 묘똑허옵고, 대왕의 옥체에는 비늘이 번쩍번쩍, 소퇴의 몸은 털이 이리 송살송살, 까마귀로 일러도 오전 까마귀 쓸개 있고, 오후 까마귀 쓸개 없으니, 인생 만물 비금주수가 한 가지라. 뻑뻑 우기니 답답지 아니 허오리까?” ...[후략]
《수궁가》는 현전하는 판소리 다섯 바탕 중 유일하게 사람이 아닌 동물이 등장하는 이야기이다. 의인화된 동물들의 이야기는 인간 세상의 위계질서와 불합리를 그대로 풍자하고 있는데, 용왕이 자신의 병을 고치고자 토끼를 죽여 간을 빼앗으려는 설정은 수직적 구도에서의 수탈과 탐욕을 보여준다. 토끼 역시 자신의 탐욕으로 자라에게 속아 수궁에 들어와 위기를 맞이하게 되는데, 이는 특정 계층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인간 누구에게나 있는 욕망과 그로 인한 전락의 모습을 풍자하고 있다. 그러나 결국 미천한 신분의 토끼가 고귀하면서도 풍부한 지식을 가진 최상층의 용왕을 지략으로 꺾고 설전에서 승리함으로써, 논쟁 자체는 항거의 성격을 띠게 되고, 수평적 인간관계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질서로 나아가고자 하는 의미를 갖는다.
판소리: 국가무형문화유산(1964) 판소리: 유네스코 인류구전무형유산걸작(2003)
소리 정회석ㆍ채보감수 백대웅, 『수궁가』, 민속원, 2003. 최동현 외, 『한영대역 수궁가 바디별 전집 1~4』, 문화체육관광부ㆍ전라북도ㆍ전주세계소리축제조직위원회, 2010. 김혜정, 「유성준제 수궁가의 전승과 변이 -토끼 꾀 내는 대목의 음악적 존재양상을 중심으로-」, 『판소리연구』 13, 판소리학회, 2002. 이진오, 「19세기 수궁가의 더늠 형성에 관한 연구」, 『공연문화연구』 36, 공연문화학회, 2018. 정충권, 「토끼전 언변 대결의 양상과 의미」, 『판소리연구』 20, 판소리학회, 2005.
신은주(申銀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