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초단삼(黃綃單衫), 몽두리(蒙頭里), 몽도리(蒙道里), 몽두의(蒙頭衣), 나삼(羅衫)
궁중정재에 여자 무용수가 입는 맞깃형식의 노란색의 겉옷
여기(女妓)가 황색의 옷을 입은 전통은 고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 1445(세종 27)년의 기록에서 고려 시대 여기(女妓)들이 황장삼(黃長衫)을 입었다는 것을 볼 수 있으며, 조선 전기의 회화에서도 연회에서 시중을 들거나 춤을 추는 여기들이 황색 옷을 입은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옷을 몽두리라고 부르기도 한 것 같다.
몽두리는 ‘몽두의(蒙頭衣)’라고 기록되기도 하는데 태종 12년(1412) 6월 부녀의 의관제도에 대한 사헌부의 상소에서 처음 나타난다. 이 때 몽두의는 궁궐 내외 하층계급의 부녀자 복식이었다. 조선 시대 기록에 나타나는 몽두리의 용도는 궁중 기행나인의 상복용(上服用) 몽두의ㆍ궁중 여관의 상복용(喪服用) 몽두의ㆍ중첩(衆妾)의 상복용(上服用) 몽두의ㆍ궁중 여령의 정재복용 몽두의로 나뉜다. 몽두리는 일반적으로 낮은 신분의 궁녀와 서민녀들이 착용하였다. 색상은 기행나인의 몽두리에 보이는 홍색과 황색의 몽두리와 국상 중에, 궁중의 여관들이 상복으로 착용한 소색의 몽두리가 있다.
하지만 의궤 기록을 통해 조선 시대 궁중정재를 행할 때 여령이 입던 옷의 정확한 명칭은 황초삼이었음을 알 수 있다. 황초삼이라는 명칭은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1795)의 복식도에서 볼 수 있으며 《화성원행의궤도(華城園幸儀軌圖)》의 채색화로 그려져 있다.
이후 순조 9년(1809)에 제작된 『기사진표리진찬의궤(己巳進表裏進饌儀軌)』와 순조 27년(1827) 『자경전진작정례의궤(慈慶殿進爵整禮儀軌)』에도 황초삼(黃綃衫)이 여령복식으로 기록되고 있다. 『순조기축진찬의궤((純祖己丑進饌儀軌)』(1829) 공령(工伶)조에 “각무(各舞)의 정재여령은 ‘황초단삼(黃綃單衫)’, 춘앵전(春鶯囀) 정재여령은 ‘황초삼’을 입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권수(卷首)에 실린 여령복식 그림 옆에는 황초삼이란 옷의 이름이 기록되어, 황초삼과 황초단삼이 같은 옷임을 알 수 있다.
이후 『헌종무신진찬의궤(憲宗戊申進饌儀軌)(1848)와 고종(高宗) 14년(1877)의 『진찬의궤』, 광무(光武) 6년(1902) 『진연의궤(進宴儀軌)』 까지 황초삼은 화관과 함께 여령의 복식으로 사용되었다.
춘앵전에서 여기(女妓)가 착용한 것은 나삼(羅衫)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소용된 옷감의 내용을 보면 홍색의 안감을 두어 만든 겹옷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형태에는 차이가 없어 정재여령의 황초삼은 홑옷임을 강조하여 황초단삼, 춘앵전의 복식은 나삼 혹은 황초삼으로 불렀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20세기 초반을 거치면서 여령의 황초삼의 색상이 꾀꼬리의 노란색임을 강조하여 ‘앵삼(鶯衫)’으로 부르거나 혹은 ‘몽두리(蒙頭里)’라고 하였다. 또한 황초삼의 형태도 무녀(巫女)가 입는 무복(巫服)의 몽두리와 유사해졌다. 오늘날 국립국악원의 공연에서 춘앵전 의상을 비롯해 황초삼을 입고 공연하는 모습을 쉽게 찾을 수 있다.
○ 쓰임과 용도
황초삼은 조선 후기 궁중정재를 올리는 여령(女伶)의 기본복식 중 겉옷에 해당되며, 춘앵전복식, 집박(執拍) 및 정재의장(呈才儀仗)을 든 여령이 입는 옷으로도 착용되었다. 각종 춤을 추는 여령과 춘앵전에서의 여기는 머리에 화관(花冠)을 쓰고 초록 저고리와 남색 치마[藍色裳]를 입고 그 위에 홍색 비단 치마[紅綃裳]를 덧입은 후, 황초삼을 입고 가슴에 홍색의 띠를 두르고, 손목에는 오색한삼(五色汗衫)을 끼고 초록혜(草綠鞋)를 신었다.
○ 형태 및 구조
황초삼은 맞깃에 섶이 없이 앞 중심에서 여미며, 양옆에 무가 있다. 뒷 중심선과 옆선에도 트임이 있어 네 자락을 이루며, 어깨에는 색동장식이 있다. 『원행을묘정리의궤』와 『기축진찬의궤』에 수록된 황초삼의 도해를 보면 소매는 모두 길이가 짧은 편이지만, 소매배래의 모양은 차이가 있다. 특히 1848년 『무신진찬의궤』이후로는 옷 모양에 변화가 더욱 뚜렷하며, 옷고름이 달리고 소매의 길이도 길어졌다. 길 옆의 무가 사라진 대신, 뒷 중심선과 옆선 아래에 트임이 있다. 또한 춘앵전 복식으로 사용된 황초삼은 소매통도 조금 넓고 수구에 선장식도 있다.
이와 같은 황초삼의 모양은 『진찬의궤』의 내용을 통해 대한제국 때까지 계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20세기 초반에 들어서는 황초삼의 소매 색동 아랫부분에 자수 장식이 추가되는 변화를 보였다. 소매에 자수가 추가된 모습은 그림엽서에 등장하는 관기의 복식에서 발견할 수 있으며 이러한 양식은 계속 이어졌다.
○ 재질 및 재료 『기축진찬의궤』의 품목(稟目)에는 여령복식에 소요된 소재ㆍ분량ㆍ가격 등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황초삼에는 황초(黃綃) 17척(尺)이가 사용되었다. 안감의 설명이 없는 것으로 보아 홑옷이며 따라서 황초단삼이라 칭하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무신진찬의궤』 악기풍물조에는 춘앵전 차비가 입을 옷 중 나삼(羅衫)이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춘앵전을 추는 여기가 입는 황초단삼의 내용과 완전히 일치한다. 즉, 겉감으로 무늬가 있는 노란색 갑사(甲紗)를 사용하고 안감으로 진홍색의 도류문(桃榴紋) 갑사ㆍ깃〔領〕과 고름[古音]은 자적색(紫的色) 도류문 갑사로 만들며, 양쪽에 있는 색동과 방령(方領)은 진홍ㆍ초록ㆍ자적색의 무늬가 있는 갑사를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황초삼과 유사한 복식에 무복(巫服)으로 착용되는 몽두리가 있다. 蒙頭衣(몽두의)ㆍ蒙頭里(몽두리)ㆍ夢道里(몽도리) 또는 한글 표기 ‘몽도리’ 등으로 표기된다. 20세기 초반을 거치면서 여령의 황초삼과 무복의 몽두리를 모두 몽두리로 부르고 있지만 정재 복식 용어의 올바른 복원이 필요하다. 현재 앞에서 보았던 독일 라이프치히 그라시민속박물관 소장 유물을 제외하고, 국내에는 조선 시대의 궁중정재복식인 황초삼의 유물은 남아 있지 않고, 국립국악원에 기증자료 2점이 있을 뿐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조선후기 궁중연향문화』1,2,3, 민속원, 2005. 윤은영, 「궁중정재 춘앵전(春鶯囀) 복식 연구」, 전남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5. 진덕순ㆍ이은주, 「『의궤』를 통해 본 궁중 검기무 복식」, 『국악원논문집 37집』, 2018.
홍나영(洪那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