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찌, 습(拾), 비의(臂衣), 홍단수구(紅緞繡韝)
무용수 옷의 넓은 수구(袖口)를 좁히기 위해 동여매는 천으로 만든 부속복식도구
비구는 소매 넓은 옷을 입을 때 수구를 좁게 하기 위해 천으로 동여매는 부속복식이다. 직사각형 모양의 네 귀퉁이에 끈이 달려 있다. 원래 활을 쏠 때에 소매를 걷어 매는 가죽 띠에서 유래되어 무관(武官)이 융복을 입을 때 착용하였다. 조선 시대에 악기를 드는 차비공인(差備工人)이나 춘앵전(春鶯囀) 여령(女伶)도 겉옷의 넓은 소매통을 정리하는데 비단 천으로 만든 비구를 사용하였다. 다만 활을 쏠 때 한쪽 팔에만 두르는 것에 비해 춤을 출 때는 양팔에 착용하였다.
비구는 원래 군사들이 갑옷이나 융복(戎服)을 착용할 때 소매가 넓어 활동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천이나 가죽 등으로 팔을 감쌀 수 있게 만든 것에서 발생한 것이다. 구(韝)는 팔찌 혹은 활 쏠 때 왼팔을 걷어매는 띠라는 뜻이며, 비구를 비의(臂衣)ㆍ팔찌ㆍ습(拾)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비구는 넓은 소매를 정리하기 위한 부속복식이므로 악기를 드는 차비공인이나 무무(武舞)나 춘앵전 등에서 춤을 출 때 착용하였다. 『악학궤범(樂學軌範)』(1493) 권9 관복도설(冠服圖說)에 홍금비구(紅錦臂韝) 그림과 그 옆에 “순(錞)ㆍ탁(鐲)ㆍ요(鐃)ㆍ탁(鐸)ㆍ응(應)ㆍ아(雅)ㆍ상(相), 독(牘)을 잡는 차비공인이 입는 것”이라고 쓴 설명이 있다.
『국조오례서례(國朝五禮序例)』 권1 길례(吉禮) 아부악현(雅部樂懸)의 도설(圖說)을 보면, 사직(社稷)의 무무(武舞)를 출 때 홍말액(紅抹額)을 머리에 두르고 비난삼(緋鸞衫)ㆍ백주중단(白紬中單)ㆍ백주고(白紬袴)를 입고 백포말(白布襪)을 신은 후 팔에는 홍금비구(紅錦臂韝)를 착용한다고 기록하였다. 『춘관통고(春官通考)』에도 일무(佾舞)의 무무(武舞)에서도 역시 비난삼에 홍금비구를 착용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남자복식으로 사용되던 비구가 조선 후기에는 『순조진찬의궤(純祖進饌儀軌)』(1829)이후 춤을 추는 정재여령(呈才女伶)의 복식으로 계속 등장한다. 『진찬의궤』 공령부분에서 오채한삼(五彩汗衫) 바로 다음에 나오는 ‘홍단수구(紅緞繡韝)’가 복식도에 수록된 비구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이며, 악기풍물(樂器風物)에는 ‘비구’라는 명칭으로 기록되어 있다. 《무신진찬도》에서 춘앵전을 추는 여령이 비구를 착용한 것이 그려져 있다.
복식도의 그림으로 판단컨대 춘앵무의 황초삼은 다른 정재여령이 황초삼보다 소매가 더 넓고 길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를 정리하는 목적으로 사용되었지만 좀 더 화려하게 무늬를 놓았기 때문에 홍단수구라는 명칭이 붙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왕직아악부(李王職雅樂部) 시기의 여기(女妓)의 모습에서 비구는 보이지 않지만 춘앵전을 담당한 기생이 입은 황초삼의 수구에 꽃문양 자수장식은 비구가 사라지면서 이를 대신해 새로 생겨난 장식으로 보인다. 현재의 공연에서는 소매에 자수장식이 있는 황초삼이 자주 착용되며 비구는 생략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오늘날 춘앵전 공연 중에서도 비구를 착용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소매통을 좁게 정리하는데 사용하는 도구인 비구의 크기에 대해 『악학궤범』 권9 관복도설에 실린 홍금비구(紅錦臂韝) 그림 옆에 길이 6촌(寸), 너비 3촌(寸) 5분(分)이라고 쓰여 있다. 재료는 다듬은 흰색 주(紬)를 꿰매어 만들고, 금문(錦紋)을 그리는데, 안은 홍색 주를, 속에는 양모로 만든 펠트 천인 전〔羊毛氈〕을 넣고, 네 모서리에 홍색명주로 만든 끈〔紅紬纓子〕를 단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조선 후기 춘앵무에 착용된 비구는 장식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무신진찬의궤(戊申進饌儀軌)』(1848) 권3의 악기풍물(樂器風物)에 기록된 춘앵전 복식의 비구 한 쌍에 소용된 내용을 보면 안감으로 남대단(藍大緞). 겉감으로 홍공단(紅貢緞) 각 사방 5촌(寸) 두 조각〔片)〕에, 수화(繡畫)감으로 초록남백(草綠藍白) 공단을 각각 사방 4촌 2조각, 끈〔纓子〕은 남다회(藍多繪) 3척짜리 두 건(件)을 달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진찬의궤』의 춘앵전 차비의 비구의 재료에도 시대적 변화가 있는데 『정축진찬의궤(丁丑進饌儀軌)』(1877)년에는 비구 한 쌍에 안감은 남광적(藍廣的) 겉감은 홍광적(紅廣的)으로 『신축진찬의궤(辛丑進饌儀軌)』(1901) 남공단과 홍공단으로 바뀌어 있다.
활을 쏠 때 사용하는 습은 비단으로 만들고 가죽으로 가장자리를 두르는 것에 비해 비구는 천으로 만들고 끈을 다는 것이 특징이며 일반인들도 비구를 착용한 것을 조선 후기 풍속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윤은영, 「궁중정재 춘앵전(春鶯囀) 복식 연구」, 전남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청구논문, 2015.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조선시대 왕실문화 도해사전(http://kyujanggak.snu.ac.kr/dohae/sub/schDetail.jsp?no=D0802&category=E&sWord=%EC%96%B4%EC%8A%B5).
홍나영(洪那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