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화(黑靴), 오피화(吳皮靴), 오화(烏靴)
흑피화는 목화의 일종이다. 발볼을 덮는 신울에 더해 발목과 종아리를 감싸는 신목이 있는 형태의 신을 화(靴) 혹은 목화라 한다. 목화는 평상시 착용하는 흑색과 국상(國喪)에 착용하는 백색이 있다. 악무복에서의 목화는 모두 흑색이다. 흑피화는 흑색 가죽으로 만든 목화이다. 명칭은 흑피화ㆍ흑화ㆍ오피화(吳皮靴)ㆍ오화(烏靴) 등이 나타난다.
○ 유래, 쓰임, 용도
신은 신울만 있는 형태와 신울에 신목이 붙은 형태로 양분된다. 전자는 리(履)나 혜(鞋)로 통칭하고, 후자는 화(靴)로 통칭한다. 화는 또 ‘목화’로 통칭하기도 한다. 주재료는 가죽ㆍ전(氈)ㆍ융(絨), 직물 등을 쓰지만, 그 중 검은색 가죽을 쓴 것이 흑피화이다. 악무복에서의 화(靴)ㆍ흑화(黑靴)ㆍ오화(烏靴)ㆍ오피화(吳皮靴)ㆍ수화자(水靴子)가 두 목화에 해당한다. 이들 모두 검은색이다. 수화자의 ‘수(水)’는 오행(五行)에서 북방에 배속되고, 북방의 색은 흑색이다. 따라서 수화자도 ‘흑화자’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조선 시대 품급 내의 관원은 공복(公服)이나 상복(常服. 혹은 ‘시복’)을 입을 때 목화를 신는 것이 기본이었다. 악인도 잡직 정6품까지 오를 수 있고, 정직(正職)을 받을 경우 1품을 내려 정7품을 받았기 때문에 일반 관원의 공복 제도를 적용받았다. 『경국대전』(성종 15년. 1484)에서 7품 관원의 공복은 복두, 녹포(綠袍), 흑각대(黑角帶), 목홀(木笏)에 흑피화로 규정했다. 공연을 위한 악사의 복식은 조선 세조 9년(1463)에 종묘제례의 악무를 문무 보태평(保太平)과 무무 정대업(定大業)으로 정하면서 전악(典樂)이 복두, 녹삼(綠衫), 오정대(烏鞓帶), 흑화를 입도록 정했다. 홀이 제외된 점과 흑각대가 아닌 오정대를 쓰는 점이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흑피화를 포함한 품급 관원으로서의 공복이 공연복에 그대로 적용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국조오례의』(성종 5년. 1474)에서는 속악 악사 복식을 세조 때와 같게 규정하면서 신의 명칭은 ‘흑피화’라 했다. 『악학궤범』(성종 24년. 1493)에서는 아악 악무복에 화가 없고, 속악에서만 확인된다. 속악 악사의 공복은 세조 때 정한 차림이 그대로 유지되고, 이 외 협률랑의 ‘시복’과 악사의 사모(紗帽), 흑단령, 품대 차림이 있는데, 이 시기의 ‘시복’은 곧 사모, 흉배를 부착한 흑단령, 품대 차림을 의미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흑색 목화를 신는 것이 기본이다. 악공은 화화복두(畵花㡤頭), 소화(小花) 흉배를 부착한 홍주삼(紅紬衫), 오정대 차림인데, 신은 명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복두와 단령옷인 홍주삼의 형태를 감안하면 흑화를 신었을 개연성이 크다. 또 가동의 예복인 두건, 흑단령, 금동녹혁대와 광다회대 차림에 흑피화가 착용되었다. 무동도 단령옷에 꽃무늬가 있는 화(재료를 보면 흑피화)를 신었다.
조선 후기에는 악사, 악공, 가자[가동] 복식에 흑(피)화가 계속 착용된다. 전기에 확인되지 않았던 악공의 화는 1615년 『공성왕후부묘도감의궤』 <반차도>에서 흑색이 확인된다. 이후 말기까지 다양한 자료에서 악공의 흑화가 확인되지만, 순조 9년(1809) 『기사진표리진찬의궤』의 악공 도상에서는 예외적으로 백색 리(履)가 확인되기도 한다. 이 외, 숙종 36년(1710) <숭정전진연도>의 악공과 가자, 숙종 46년(1720) <경현당사연도>의 가동, 같은 해 <어첩봉안도>의 고취 도상에서 흑화 착용이 확인된다.
연향의궤에서는 순조 28년(1828) 무자진작부터 광무 6년(1902) 임인진연까지 악사와 악공의 화 도식이 나타나는데, 신분과 시기에 따른 형태적 차이는 크게 나타나지 않는다. 순조 29년(1829) 기축진찬, 고종 29년(1892) 임진진찬, 광무 6년(1902) 임인진연에는 가자의 화 도식이 있고, 이 역시 형태는 큰 차이가 없다. 명칭은 모두 ‘흑피화’나 ‘흑화’로 나타나지만, 순조 28년 『(무자)진작의궤』의 악공복에서는 ‘오화’라 하였다. 한편, 『(무자)진작의궤』는 효명세자 주관으로 모후인 순조비 순원왕후의 40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2월에 국가적 차원에서 거행된 자경전 진작례와 생일을 맞아 6월에 거행된 연경당 진작례 두 건의 연향이 기록되어 있는데, 자경전 진작례 때의 전악, 악공, 각 차비의 신은 ‘흑피화’ 도설이 그려져 있고 연경당 진작례 때의 전악, 악공, 무동의 신은 ‘오화’ 도설이 그려져 있다. 그 흑피화는 신울 양쪽이 총 여섯 조각으로 된 육합화(六合靴)의 형태이고, 오화는 양쪽이 각각 한 조각으로 구성된 단순한 형태이다. 따라서 흑피화와 오화는 모두 목화의 일종이지만, 후기 연향례의 악무복에서 형태가 구분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국가 의례로 거행된 자경전 진작례에 좀 더 정교한 구조로 이루어진 ‘흑피화’를 착용하고, 사(私)적인 의미의 왕실 의례로 거행된 연경당 진작례에 단순한 구조의 ‘오화’를 착용한 것을 근거로 보면, 흑피화가 등급이 높고 오화가 그보다 등급이 낮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제례의 아악의 전체 악무복과 속악의 일부 악무복에서 오피리(烏皮履)로 규정되었던 신은 1920년대 이후 모두 목화로 바뀌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유교적 예(禮)의 실행에서 악무와 복식은 핵심적 요소라 할 수 있다. 예의 구현을 위해 유가에서 고례(古禮)에 기본으로 정한 신은 신울만 있는 리(履)의 형태였다. 그러므로 특히 제례악에서 화가 아닌 오피리를 규정했다. 화는 북방 유목민족으로부터 유입되었기 때문에 본래 유교적 의례의 예복에 포함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것이라 여겼던 듯하다. 그런데 의례 거행을 위해 오랫동안 실외에 있을 때 온도, 습기, 착용감 등을 고려하면 리보다 화가 더 적합했던 것으로 보이며, 이로 인해 근대에 오피리가 모두 화로 바뀐 것으로 볼 수 있다. 고대인들이 유념한 ‘예의 구현’을 생각하면 적합하지 않을 수 있지만, ‘착용 편의’를 위한 선택이라 이해할 수 있다.
『세종실록』 『세조실록』 『임하필기』
고유정, 「조선시대 궁중악인 복식 연구」,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5. 이은주, 「조선시대 품대의 구조와 세부 명칭에 관한 연구」, 服飾61/10, 2011. 정영란, 「受爵儀軌에 나타난 儀禮와 服飾 연구-佾舞服을 중심으로」, 단국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5.
최연우(崔然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