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피혜(白皮鞋)
처용무를 출 때 무용수가 신는 신발
처용무를 연행 할 때 무용수가 착용하는 가죽신이다.
전통 신발의 양식은 일반적으로 신목이 있는 부츠형의 화(靴)와 신목이 없는 단화 형태인 혜(鞋)와 리(履)로 구분되는데, 리는 혜보다 이른 시기부터 사용되던 명칭으로 형태는 같다. 『악학궤범』에 의하면 처용무복에는 혜를 신는다고 되어 있으며 백피(白皮: 흰 가죽)으로 만들고 위에 끈을 단다고 기록되어 있다.
춤출 때 신발이 벗겨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양 볼에 끈을 달았으며 오방처용이 모두 같은 신발을 신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후의 자료에 의하면 화를 신기도 하였으며 현재는 푸른색 바탕에 양옆으로 꽃문양이 수놓아져 있고 신등에 붉은색 술이 달린 신발을 착용하고 있다. 끈은 달려 있지 않고 양 볼 안쪽으로 흰색 고무줄이 달려 있어 춤출 때 신발이 벗겨지는 걸 방지한다.
○ 구조 및 형태
『악학궤범』에 기록된 처용무복의 신발은 흰색 가죽으로 만든 백피혜로 일반적으로 양반 남성들이 신던 신발과 같으나 다만 양 발볼에 끈을 달아 춤 출 때 신발이 벗겨지지 않도록 하였다. 운두가 낮으며 사대부가 부녀자들이 주로 신었던 신발인 운혜처럼 앞코에 이음선이 그려져 있다. 일반적으로 신발(鞋)은 하나로 재단된 신울을 좌ㆍ우 두 장으로 만든 후 앞코와 뒤축에서 연결하여 바닥에 이어 붙여 만들고 앞코와 뒤축 등에 장식 천을 덧대기도 하였다. 주로 여성용 신발인 운혜 또는 온혜의 앞코에 다른 색으로 이러한 장식 천을 덧대었다. 처용무복의 혜의 앞코 부분에 이러한 선이 그려져 있는데 설명에 흰색 가죽으로 만든다고만 기록되어 있어 이것이 장식 천을 덧댄 것인지 신울을 두 조각으로 재단한 것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이러한 처용무복의 혜와 비슷한 구조를 기본으로 한 신발이 『악학궤범』에 또 나오는데 둑제(纛祭)를 지낼 때 창검무(槍劒舞)ㆍ궁시무(弓矢舞)ㆍ간척무(干戚舞)를 추는 공인이 신는 신발인 운혜(雲鞋)이다. 운혜의 설명에 혜는 가죽으로 만들고 겉을 청색 무명으로 싼 후 앞코와 뒤축, 양 옆에 홍색 무명을 붙이고 흰 베로 버선을 만들어 붙이고 양 볼에 끈을 단다고 되어 있어 버선아래의 신발 몸통은 처용무복의 혜와 같은 구조임을 알 수 있다. 화려한 처용무복에 비해 신발은 다소 소박한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후 17ㆍ18세기에 그려진 회화 자료에는 혜와 화가 혼용된 것으로 보이고 19세기 의궤의 기록에 따르면 목이긴 형태의 화를 착용한 기록도 있어 처용무의 신발에 변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진작의궤』(1828)과 비교하여 『진찬의궤』(1848)에는 흑피화로 되어있어 백피혜에서 목화 형태의 흑피화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처용무복이 다시 혜로 바뀌었는데 1964년 간행된 문화재조사보고서에 의하면 신발의 전면(全面)에 꽃문양의 그려져 있으며 신등에 작은 술 장식이 붙어 있다.
현재 착용하고 있는 처용무복의 신발은 푸른색 바탕의 전면(全面)에 꽃문양이 수 놓여 있고 신등에는 붉은색 술이 달려있는데 2000년 간행된 조사 기록에 의하면 술의 크기가 1964년 문화재조사보고서의 도식보다 크게 만들어져 있다.
춤을 출 때의 동작과 간편함을 위해 혜를 신었으며 신발이 벗겨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양 옆에 끈을 달아 묶을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1828년 무자년 『진작의궤』에서는『악학궤범』과 같이 혜를 신는 것으로 기록되었는데 1848년 무신년 『진찬의궤』의 기록에는 화를 신는 것으로 바뀌었다. 또한 현재에는 화려하게 그림이 그려지고 붉은 색술이 달린 혜를 신고 있다. 따라서 처용무복의 신발은 조선전기의 신목이 없는 백피혜에서 조선 후기에는 신목이 있는 흑피화로 바뀌었고 현재는 다시 신목이 없는 혜로 바뀌었으나 화려한 꽃문양과 붉은색 장식 술이 참가 되었다.
『고려사』 『삼국유사』 『악학궤범』
이홍구, 『처용무』, 화산문화, 2000. 한국학중앙연구원, 『조선후기 궁중연향문화 1』, 민속원, 2003. 박진아ㆍ조우현, 「처용무복식의 연구(1): 구조적 특징과 변천을 중심으로」, 『한국의류학회지』 21/1, 1997.
조우현(趙又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