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모(烏紗帽)
처용무를 출 때 머리에 착용하는 관모
처용무를 연행할 때 무용수가 머리에 착용하는 관모로 일반적인 관리의 사모와 같은 구조와 형태이지만 그 위에 꽃과 복숭아가 장식되어 있으며 가면이 함께 부착되어 있다. 사모는 관리의 공식적인 관모로서 공복에는 복두를 착용하고 상복 및 시복에는 사모를 착용하였다.
사모는 복두에서 파생되어 나온 관모로, 고려부터 조선 시대까지 문무백관이 관복에 착용하였다. 고려 말기 백관의 상복용 관모로 처음 사용하였고, 조선 시대에는 상복이나 시복에 쓰이다가 점차 공복과 예복용 관모로 확대 착용되었다.
『고려사』 「열전」에 의하면 1387년(우왕 13) 3월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설장수(偰長壽)가 명 태조로부터 사모와 단령을 하사받고 돌아와 1387년 6월부터 1품에서 9품까지 모두 관복으로 착용하게 되었다는 내용이 있다. 조선 시대에는 태종 17년(1417) 12월 예조와 의례상정소에 의하여 갓 대신 사모를 쓰게 하였고 세종 8년(1426) 2월 관복 제정 때는 상복과 시복에 사모를 착용하게 하였으며, 공복에도 복두 대신 사모를 착용케 하였다. 또한 고종 때 실시한 복제개혁 때에도 대례복과 소례복에 사모를 착용하게 하였다.
사모는 뒤가 높고 앞이 낮은 2단으로 구성되며 모정부(帽頂部: 머리 부분)의 뒤에는 꽂이 걸이와 두 개의 각이 붙어 있다. 각은 일반적으로 두 겹의 검정 사로 제작하였다.
처용무복의 사모는 이와 같은 관리들이 상복에 착용하는 둥근 모정의 사모와 같은 형태이다. 현재 보존회에서 착용하고 있는 사모와 가면은 『악학궤범』에 의한 고증으로 『악학궤범』의 도설에 있는 그림과 같다.
○ 쓰임 및 용도
처용무는 신라 시대 처용설화에서 비롯하여 1인무에서 고려시대에는 2인 대인무로, 조선 시대에는 5인무로 확대되어 이후 다른 정재들과 합설되었다. 이에 착용하는 복식은 당대의 복식형태를 기본으로 하여 정재로서의 디자인을 가미하여 장식하였다.
처용무의 의는 처음에 사모와 흑포로 출발하여 사모와 단령으로 조선 세종 대에 화려하게 오방처용무로서 연희되고 조선 말기까지 궁중정재로 위치를 잡는다. 이처럼 처용무 복시의 사모는 처용이 갖는 관리로서의 캐릭터 특징을 나타내주는 관모이다.
○ 구조 및 형태
『악학궤범』에 의하면 처용무의 사모는 가면과 함께 구성되는데 사모에 모란꽃, 복숭아 열매와 가지 등을 장식한다.
처용무의 가면은 일반적인 가면에 비해 크게 만들어지며 따라서 사모의 크기도 일반적인 사모에 비해 크게 만들어진다. 처용무의 사모는 대나무 살로 망(網)을 떠서 형태를 만들고 그 위에 종이를 발라 검정색으로 채색하고 금칠로 문양을 그려 장식을 한다. 가면은 피나무를 깎아 만드는데 옻칠한 베로 겉을 싸고 채색하고 양쪽 귀에 납구슬이 달린 주석 귀고리를 단다. 사모를 장식하는 모란꽃은 고운 모시로 만들고 복숭아 열매와 복숭아 나뭇가지는 나무를 깎아 만든다. 시대에 따라 사모와 가면이 분리되기도 하였다.
처용무 복식의 사모는 처용의 관리로서의 신분적 특징을 잘 나타내주는 요소이며 그 위에 모란꽃과 복숭아 등의 형상을 만들어 장식함으로써 처용이 갖는 주술적 특징과 궁중정재로서의 화려함을 표현해주고 있다. 그러나 처용무의 대는 공복에 착용하는 야자대인 반면 관모는 공복에 착용하는 복두가 아니라 상복에 착용하는 사모로 되어있는데 이는 세종 때 공복에도 복두 대신 사모를 착용케 한 점이 반영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홍구, 『처용무』, 화산문화, 2000. 한국학중앙연구원, 『조선후기 궁중연향문화 1』, 민속원, 2003. 박진아ㆍ조우현, 「처용무복식의 연구(1): 구조적 특징과 변천을 중심으로」, 『한국의류학회지』 21/1, 1997.
조우현(趙又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