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의, 단령, 단령의, 처용의
처용무를 연행할 때 무용수가 착용하는 겉옷으로서 둥근 깃이 달려 있다. 깃 모양으로 인하여 ‘단령’ 또는 ‘단령의’라고도 하며 각각 오방색 바탕에 옷 전체에 화려한 꽃무늬가 그려져 있다.
처용무는 신라 시대 처용설화에서 비롯하여 1인무에서 고려 시대에는 2인 대인무로, 조선 시대에는 세종 대에 이르러 5인무로 확대되었고 이후에는 학무ㆍ연화대무 등의 다른 정재들과 합설되어 연행되기도 하였다.
처용무복의 의는 흑포에 사모를 착용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세종 대에 이르러 오방무로 확대되면서 오방색의 단령을 착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처용무복의 의는 너비가 넒은 단령 깃이 달려있고 그 아래 직사각형의 흉(胷)이 달려있는 것이 일반적인 단령과 다른 점이다. 17세기에는 여전히 좁은 소매와 긴 한삼자락이 확인되나, 19세기 중반에는 단령의의 소매 폭이 넓은 광수로 변하였고, 한삼이 별개로 분리되어 손목에 끼워 착용하였다. 현재 보존회에서 착용하고 있는 의는 덩굴로 둘러싸인 꽃문양이 옷 전체에 수놓아져 있고 현대의 두루마기와 같은 둥근 배래의 소매가 달려 있다. 단령의는 화려한 오방색이 조화를 이루며 처용무복의 핵심이 되는 옷으로서 화려함과 품격이 드러나고 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의의 형태나 각 부분에서 약간씩의 변화는 있었으나 오방색을 기준으로 한 구성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현재도 『악학궤범』을 기준으로 고증한 의를 착용하고 있다.
○ 쓰임 및 용도
성현(成俔)의 『용재총화(傭齋叢話)』에 의하면 처용무는 처음에는 한 사람이 흑포(黑袍)와 사모(紗帽) 차림으로 춤추었다는 기록이 있어 1인무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조 세종대에 이르러 5인무로 확장되었고 그에 따라 오방처용이 오방색의 무복을 착용하게 되었다. 처용무 복식의 일습은 유물이 전해지고 있지 않아 실제 모습을 알 수 없으나 『악학궤범』ㆍ『진작의궤(1828)』ㆍ『진찬의궤(1848)』 등의 기록과 그림을 통해서 그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악학궤범』에 의하면 처용무 복식은 의ㆍ군ㆍ한삼ㆍ상ㆍ천의ㆍ길경ㆍ사모ㆍ대ㆍ혜로 구성되며 『진작의궤(1828)』의 기록에는 의ㆍ말ㆍ군ㆍ상ㆍ천의ㆍ길경ㆍ백피혜ㆍ홍정대의 구성되어 있으며 『진찬의궤(1848)』의 기록에는 의ㆍ말군ㆍ상ㆍ천의ㆍ길경ㆍ흑피화와 금야대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처용무는 학무ㆍ연화대무 등과 합설되어 연행되기도 하였고 무동이나 여기에 의해 연행되기도 하여 시대에 따라 변천이 있었다.
처용무복의 의에는 단령 깃이 달려 있어 처용의 관리로서의 신분을 나태주고 있으나 오방색ㆍ흉(胷)ㆍ만화문ㆍ색동 끝동 등이 일반적인 단령과 차이가 있어 처용무의 제의적 성격과 무용으로서의 예술적 성격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이 도설에 의하면, 처용무복의 의는 단령 깃과 착수형 소매로 구성되어 있다. 의의 앞길은 3척, 뒷길은 3척 2촌 5분, 소매의 길이는 2척 7촌 5분으로 이를 포백척(布帛尺, 척=46.80cm, 촌=4.68cm, 분=0.468cm)으로 환산하면 앞길은 140.4cm이고, 뒷길은 152.1cm, 소매 길이는 128.7cm 정도로 소매의 길이가 길고 앞ㆍ뒷길의 길이 차이가 약 10cm 이상 차이나는 단령의이다. 단령 깃의 깊이는 목선에 가까운 조선 전기 단령의 형태와 유사하나 깃 너비가 2촌 5분으로 약 11.7cm인데 일반 관리의 단령 깃에 비해 넓다. 단령 깃의 앞 중심 아래에 사각형의 흉(胸)이 달려있는데, 길이는 9촌(약 42cm), 너비는 2촌 8분(약 13cm)의 직사각형이다. 소매는 진동에서 수구로 가면서 너비가 좁아지는 착수형이고 소매 끝에 색동이 이어져 있다. 앞길보다 뒷길이 더 긴 전단후장형(前短後長形)이며 허리 아래로 옆트임이 있으며 확실치는 않으나 무가 달린 모양을 하고 있다.
의는 오방색의 비단으로 만드는데 방위를 상징하는 색상에 따라 동방처용은 청색, 서방 처용은 백색, 남방처용은 홍색, 북방처용은 흑색, 중앙처용은 황색의 비단을 사용하였다. 단령 깃과 그 아래 달리는 흉(胷)의 색상은 의의 색상과 대비되게 하였는데 청의(靑衣)ㆍ백의(白衣)ㆍ흑의(黑衣)ㆍ황의(黃衣)의 깃과 흉은 홍색 비단으로 만들고 흉의 양 옆선에 녹색 비단 선을 댄다고 되어있다. 또한 백의와 홍의(紅衣)의 깃과 흉을 녹색 비단으로 만들고 흉의 양 옆선에 남색 비단을 댄다고 되어 있는데 홍의를 입는 남방처용은 의와 색이 겹치므로 단령 깃과 흉을 다른 처용의 것과 달리 다른 색으로 한 것으로 보이나 서방처용의 깃과 흉의 색상은 앞에서 이미 홍색 비단에 녹색 비단 선을 댄다고 하였기 때문에 어느 것이 맞는지 확실치 않다. 안감으로 청의ㆍ백의ㆍ흑의에는 홍색 비단을 사용하였고 홍의ㆍ황의에는 남색 비단을 사용하였다.
청의ㆍ백의ㆍ홍의의 소매 끝에는 흑색과 황색의 비단을 잇대어 달았고 흑의에는 흑색과 홍색 비단을 잇대어 달았다고 되어 있다. 황의의 소매 끝 색상은 언급되어 있지 않으나 흑의의 소매 끝 색상만 따로 언급되었으므로 황의 소매 끝 색상도 청의ㆍ백의ㆍ홍의의 소매 끝 색상과 같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를 표로 정리하면 다음의 표와 같다.
동방처용 | 서방처용 | 중앙처용 | 남방처용 | 북방처용 | |
의 | 청색 | 백색 | 황색 | 홍색 | 흑색 |
안감 | 홍색 | 홍색 | 남색 | 남색 | 홍색 |
깃 | 홍색 | 홍색 또는녹색 | 홍색 | 녹색 | 홍색 |
흉/선단 | 홍색/녹색 | 홍색/녹색 또는 녹색/남색 | 홍색/녹색 | 녹색/남색 | 홍색/녹색 |
수구 | 흑색/황색 | 흑색/황색 | 흑색/황색 | 흑색/황색 | 홍색/흑색 |
여러 그림의 기록으로 보았을 때 시대의 변천이나 공연 상황에 따라 처용무복에도 변화가 있었다. 의의 기본 오방색은 유지되었지만 구조와 부분 색상에서는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림상의 표현이라 단정 할 수는 없지만 깃과 소매의 너비에서 변화가 있었으며 소매 끝 색동과 흉이 그려지지 않은 경우도 있었고 원형의 흉배가 달려 있는 경우도 있었다.
『진작의궤(1828)』의 도설에 그려진 의는 『악학궤범』의 것과 비슷하게 그려져 있으나 『진찬의궤(1848)』의 도설에 그려진 의는 그에 비해 소매 폭이 넓어졌고 단령 깃의 파임도 깊어져 있다. 한삼은 의의 소매 끝에 연결된 형태이며, 옆선에 무가 연결되지 않은 형태로 창의(氅衣)와 비슷한 형태로 되어 있다. 흉(胷)이 깃과 분리된 것처럼 보이며 네 가장자리에 모두 선단이 둘러져 있고 옷고름이 달려 있다.
처용무복의 의의 앞ㆍ뒷길과 소매에는 만화(蔓花)가 장식되어 있는데, 꽃을 가운데 두고 덩굴이 둘러싼 모습이다. 꽃의 종류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기록이 없으나 연꽃이나 인당초로 보는 견해가 있다. 현재 착용하고 있는 처용무 복식은 『악학궤범』을 기본으로 하여 고증되었다. 그러나 2 000년 간행된 보존회 기록에 의하면 깃 너비가 좁고 소매도 두루마기와 같은 둥글려진 소매를 하고 있다.
깃과 흉, 소매 끝 색동의 색상도 악학궤범의 기록과는 조금 다르게 고증되었다. 의 표면의 만화도 무궁화꽃 문양으로 수 놓아져있다. 현재 보존회에서 착용하고 있는 의는 기존의 것보다 좀 더 『악학궤범』의 내용과 비슷하게 고증하여 착용하고 있는데 무궁화를 주제로 한 만화문에서 연꽃을 주제로 한 만화문으로 문양이 바뀌었다.
『악학궤범』에 의하면 처용무의 의는 조선 전기의 단령 형태와 유사하다. 다만 조선 초기 관리의 복식과 차별을 위하여 문양 등 세부사항에 차이를 두었는데 넓은 깃 너비와 단령 깃 앞 중심 아래에 부착된 흉과 의 전체에 그려진 만화문이 그것이다. 처용단령의 흉은 그 유래와 의미를 알 수는 없지만 17ㆍ18세기 그림 자료에는 나타나지 않으며, 넓은 소매의 착용도 보이나 대개 좁은 소매를 착용하였다. 처용무복의 의는 관리의 복식인 단령에 오행설에 기인한 오방색이 더해져 처용의 관리로서의 신분과 처용무가 갖는 제의적 성격 등이 드러나 있다. 또한 의 표면의 만화문은 공연 의상으로서의 화려함까지 더해주고 있다. 따라서 처용무복의 의에는 형과 색, 문양 등이 어우러져 유교사상과 오행철학, 예술적 관념이 심오한 조화를 이루는 궁중 정재무복이라고 할 수 있다.
이홍구, 『처용무』, 화산문화, 2000. 한국학중앙연구원, 『조선후기 궁중연향문화 1』, 민속원, 2003. 박진아ㆍ조우현, 「처용무복식의 연구(1): 구조적 특징과 변천을 중심으로」, 『한국의류학회지』 21/1, 1997.
조우현(趙又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