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자(快子), 괘자(掛子)
검무⋅검기무 무용수들은 조선 후기 군복에서 비롯된 전복 또는 쾌자⋅괘자를 착용하였다. 전복은 길이가 긴 조끼 형태의 아청색 옷인데 다홍색 안감을 넣은 겹옷이다. 괘자⋅쾌자는 전복에 둥근 맞깃이 달린 옷이다.
조선 후기 지방에서 공연되던 검무가 궁중정재로 처음 등장한 것은 1795년(정조 19)이다.
이후 궁중 여령들도 전복을 착용하였다. 현재는 검기무 무용수들이 전복을 착용하고 있다.
전복은 본래 군복의 구성물로 착용되었던 조끼형의 옷이다. 1795년(정조 19)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에서 처음 궁중에서 공연된 검기무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복식도’에는 검무 복식이 제시되어 있지 않아 전복 도상을 볼 수 없으나 ‘검무 정재도’를 통해 전복을 착용한 여령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후 『(기축)진찬의궤(1829)』부터 마지막 『(임인)진연의궤(1902)』까지 ‘검무’라는 명칭 대신 ‘검기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또 「권수」 도식에 검기무 복식이 도상으로 제시되어 있는데 깃이 없는 전복 대신 맞깃이 달린 ‘괘자’를 착용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현재는 국립국악원이나 지역의 검무, 검기무를 추는 무용수들 모두 깃이 없는 전복을 착용하고 있다.
지방에서 공연되던 ‘검무’가 왕실의 정재로 유입되면서 정조 19년(1795) 『원행을묘정리의궤』에는 ‘검무’라는 이름으로 ‘정재도’가 제시되었다. 이후 순조 29년(1829) 연향을 기록한 『(기축)진찬의궤』부터는 ‘검무’라는 용어 대신 ‘검기무’로 기록되기 시작하였으며 검기무복식 도상도 구체적으로 제시되기 시작하였다. 전복과 유사한 형태의 괘자 도상이 제시되었다. 「품목」 부분에는 전복이라고 기록해 놓고 겉감으로 아청갑사를, 안감으로 진홍갑사를 사용한다고 기록하였으니 색상을 확인할 수 있고 겹옷으로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괘자⋅쾌자와 전복이 유사한 옷이므로 의궤 내에서도 혼동한 흔적이 보인다.
「공령」에는 2월의 내진찬 때 검기무 여령이 머리에 전립을 쓰고 홍초상(紅綃裳) 위에 아청갑사괘자(鴉靑甲紗掛子)를 입고 남전대(藍戰帶)를 두르며 초록혜(草綠鞋)를 신는다고 하였다. 치마⋅저고리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은 당시 여령들이 기본적으로 견마기(저고리의 한 종류)와 남치마를 착용하였기 때문이다. 남치마 위에 앞치마 모양의 홍초상을 둘렀는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기축)진찬도병》에는 검기무 여령은 홍초상 없이 남색 치마만 그려져 있다. 흰색 거들지를 단 초록색 견마기를 입고 그 위에 자적괘자를 입었다. 무신년(1848)부터는 견마기 위에 홍수 달린 몽두리[蒙道里], 즉 협수를 착용하고 그 위에 괘자를 착용하였다.
한편 『(정축)진찬의궤』에는 다른 기록에서 볼 수 없는 연습용 전복 재료가 기록되어 있다. 공연용 전복에는 안팎으로 갑사를 사용한 반면, 연습용에는 겉감에 생초를, 안감에 면주를 사용함으로써 공연용 전복에 좋은 옷감을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검무⋅검기무를 추는 여령의 전복은 정재의 특징을 잘 드러내도록 조선 후기 군관의 복장 일부를 도입한 것이다. 깃의 유⋅무에 따라 괘자와 전복을 구분하기는 하였으나 대체로 형태가 유사하므로 두 명칭이 혼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시대에 따라 사용한 소재는 조금씩 변화하였어도 아청색 겉감과 홍색 안감의 색상은 변함없이 유지되었으며 치마⋅견마기 위에, 또는 협수 위에 착용한 검기무 복장의 대표적인 복식이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현재 괘자⋅쾌자라는 명칭보다는 전복이라는 명칭을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형태 역시 깃이 없는 간편한 구성의 전복으로 변화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 『조선시대 궁중행사도Ⅰ』(국립중앙박물관, 2010) 박가영⋅이은주, 「정조시대의 군사복식과 제도 개선에 대한 논의」(『韓服文化』 7(3), 한복문화학회) 진덕순⋅이은주, 「『의궤』를 통해 본 궁중 검기무 복식」(『국악원논문집』 37, 국립국악원, 2018)
이은주(李恩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