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변관(皮弁冠)
피변은 무무 공인의 관모로, 무공(武功)을 칭송하는 아악 무무에는 피변에 조주의를 입고 백주중단ㆍ백주군ㆍ금동혁대ㆍ백포말ㆍ오피리를 신으며, 속악 무무인 〈정대업〉 에는 피변에 상의로는 남주의를 입고 하의로는 검은색 연을 두른 적상(赤裳)을 입고, 적말대를 두르고 백포말에 오피리를 신는다. 피변의 옛날 제도는 칠포(漆布)로 각(殼)을 만들었는데, 지금의 제도는 종이를 배접한 후 안에는 세포(細布)를 바르고 검은 칠을 한 후, 밖에는 얼룩무늬가 있는 노루 가죽과 같이 털가죽의 형상을 그리며, 좌우에는 구리로 만든 구름 모양 장식인 운월아(雲月兒)를 붙이고 청색 명주 끈을 단다.
1433년(세종 15) 『세종실록』에 따르면 당나라와 송나라에서는 무무에 모두 평면(平冕)을 썼는데 이에 대해 진양(陳暘)은 면을 쓰고 간을 들고 춤을 추는 것은 천자의 예이므로 『예경』에서는 제후가 면을 쓰고 대무(大武)의 춤을 추는 것을 참람하다고 하였다. 무랑(武郎)이 평면을 쓰고 춤을 출 수 없다고 하여 작변(爵弁)으로는 문을 춤추고 위변(韋弁)으로는 무를 춤추는 것이 가하다고 하였다.
1610년(광해군) 복각된 『악학궤범』을 보면, 피변의 옛날 제도는 칠포(漆布)로 각(殼)을 만들었는데, 지금의 제도는 종이를 배접해서 만들고 안에는 세포(細布)에 흑칠을 한다고 하여 제작 방식이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또 바깥에는 모피의 모양을 그려 마치 얼룩진 노루 가죽과 같이 만들고, 좌우에는 동으로 만든 운월아(雲月兒)를 붙이고 청주(靑紬)로 만든 끈을 달았다. 운월아는 조선 후기 귓돈[耳錢]이라고 하는 것으로 귀 부위에 장식하는 조각이다. 후기에는 구름무늬뿐 아니라 매미, 나비 등 다양한 무늬로 장식했다. 재료로는 밀화, 옥 등을 사용하였으나 세종대에는 공인ㆍ상인ㆍ천인ㆍ하례들에게는 운월아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다. 피변에 사용한 운월아의 재료는 구리이지만 〈정대업〉을 추는 여기가 섰던 투구의 운월아는 도금(度金)한 것으로 보인다.
1667년(현종 9)에 간행된 『종묘의궤』에서는 〈정대업〉(定大業)을 출 때 육일무의 앞에 있는 2행은 검(劒)을 들고 다음 2행은 창(槍)을 들며 다음 2행은 궁시(弓矢)를 드는데, 이들은 모두 피변을 쓴다. 복색은 문무와 같다고 하였으므로 당시에는 문무와 무무의 복색으로 남주의를 입는 것은 같되 관모에서 차이를 두어 무무는 피변, 문무는 개책을 썼다.
이외에도 1828년(순조 28) 『진작의궤』에는 첨수무(尖袖舞)를 추는 양 무동(舞童)이 피변을 쓰고 첨수의를 입고 각기 두 개의 검(劍)을 들고 서로 마주 보고 춤을 춘다고 했다.
1777년(정조 1) 간행된 『악기조성청의궤』에서 피변을 만드는데 들어가는 물목을 보면, 백휴지(白休紙) 2량(兩), 안감으로 사용할 생포(生布) 1척 2촌, 정철(正鐵中絲) 1척 2촌, 어교 1전, 주토(朱土) 3전, 황단(黃丹) 2분, 진분(眞粉) 5분, 아교 2전, 명유(明油) 2사[夕], 탄 5홉[合], 흑주(黑紬) 길이 1척, 너비 5분 2조각이 들어간다. 이 역시 개책이나 진현관을 제작하는 방식과 같으며 다만 주토와 황단, 진분이 더 들어가는 것으로 이는 피변의 무늬를 그리기 위한 물목으로 보인다. 1765년(영조 41) 간행된 『경현당수작시등록(景賢堂受爵時謄錄)』에는 피변관을 보수할 때 각 건당 6분이 든다고 하였다.
『세종실록』『악기조성청의궤』 『악학궤범』 고부자, 「『악학궤범』 복식연구」, 『국악원논문집』 14, 2002. 박가영, 「『악학궤범』 복식의 착용에 관한 연구」, 『국악원논문집』 16, 2004. 이민주, 「조선시대 문헌에 나타난 선잠제향 복식 검토」, 『포은학연구』 19, 2017. 장사훈, 「악복과 무복의 역사적 변천에 관한 연구-특히 악학궤범과 각종 진연의궤를 중심으로」, 『동양음악』7, 1985. 조선시대 왕실문화 도해사전 (http://kyujanggak.snu.ac.kr/dohae).
이민주(李民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