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두(幞頭), 모라복두(冒羅幞頭)
전악이 쓰는 관모
전악이 쓰는 모라복두는 관리가 공복에 착용하는 복두와 같은 형태이다. 복두는 각이 지고 위가 평평하며 뒤쪽에 양각이 달려 있다. 복두는 중국에서 생겨난 것으로 우리나라에는 통일신라 진덕여왕 때 관복제가 도입되면서 당제(唐制)를 받아들여 사용하기 시작했다. 계급에 따라 차등을 두어 834년(흥덕왕 9) 복식금제를 보면, 6두품은 세(繐)ㆍ라ㆍ견(絹)을, 5두품은 라ㆍ시(絁)견을 착용하였으며, 4두품은 시와 견을, 평민은 견을 사용하도록 규정하였다. 고려 초에는 백관의 공복으로 전각복두를 착용하였으며, 각의 길이는 어깨 너비는 넘을 정도로 길었으나 말엽에는 점차 짧아졌으며, 조선 시대에는 공복 착용이 줄어들면서 특별한 의식 외에는 착용하지 않았다. 다만 악공의 관모로 착용된 복두는 지금까지도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모라복두의 형태는 여러 겹의 종이를 배접하여 2단의 틀을 만들고 겉면을 모라(帽羅)로 싼다. 뒷면에 양각이 있다. 1610년(광해군 2) 『악학궤범』에 수록된 복두는 앞이 낮고 뒤가 높은 2단으로 되어 있으며, 모정 부분이 평평하고 양각은 끝으로 갈수록 넓어진다. 그러나 1829년(순조 29) 『진찬의궤』에 수록된 모라복두는 양각이 위로 올라갔으며 삼각형의 모습을 하고 있다. 또 모정 부분도 약간 둥근 형태로 바뀌었다. 이후 1848년(헌종 14) 『진찬의궤』에는 전악의 복식에 착용한 모라복두의 모습이 2단으로 된 모정 부분이 둥글게 변하고 양각은 각진 형태로 바뀌었다. 또 1892년(고종 29) 『진찬의궤』에는 다시 양각이 둥글게 변해 있어 시대에 따라 복두의 형태에 차이가 있으나 이후 1902년(광무 6) 『진연의궤』에 이르기까지 착용하였다.
복두는 1493년(성종 24) 『악학궤범』에 우방의 악사와 악공 및 아악 등가의 도창악사가 쓴다고 하였다. 이때의 복두는 종이를 배접하여 만들며, 안에는 세포(細布)를 바르고 흑칠을 하고 각(角)이 있다고 하였다. 복두는 모정 부분이 2단으로 구성되었으며, 뒤에 양각이 붙어있는 형태로 아직 모라복두로 구분하지 않고 있으며, 악공은 앞뒤와 양뿔에 채화를 그린다고 하였다.
모라복두가 확인되는 기록은 1719년(숙종 45) 『진연의궤』로 집박(執拍)이 모라복두를 착용한다고 하였으며, 모라복두를 만드는 데 소요되는 재료는 모라(冒羅) 1척 5촌, 내공으로 사용된 생포 2척, 백휴지 3량, 정철중사 3척이 들어간다. 각은 흑초(黑綃)로 만드는데, 길이는 7촌, 너비는 1촌 5분이다. 이 외에 아교 2량, 탄 2승, 송지 5분이 들어간다. 끈을 만들기 위한 모단(冒段)은 길이 1척, 너비 1촌으로 2조각이 들어가며, 뒤를 묶어 각을 연결하는 홍향사 5전과 전칠 1사 5리가 소용된다고 하였다. 이후 1765년(영조 41)에 간행된 『경현당수작시등록』에는, 모라복두 제작에 소용되는 물품으로 모라가 1척5촌이 들어가며, 안감인 내공에 사용되는 직물은 생포(生布) 2척이 소용되었다. 이외에 백휴지 3량, 정철사 3척이 들어간다. 모라복두의 양각을 만들기 위해서는 흑초(黑綃)가 들어가는데, 길이는 7촌이고 너비는 1촌으로 2조각이 들어간다. 이 외에 복두를 만들기 위해서는 아교 2량, 탄 2승이다. 끈은 모단으로 만들며, 길이는 1척이고 너비는 1촌으로 2조각이 들어간다. 송지(松脂) 5분이 들어가며 뒤를 묶을 수 있는 유청(柳靑) 향사(鄕絲) 5전이 들어간다. 끝으로 전칠(全漆) 1석5리가 들어간다고 하였으므로 복두의 형태 및 제작 방식에는 큰 변화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1829년(순조 29) 『진찬의궤』에는 모라복두 1건당 영자를 포함하여 8전 5푼이 들어간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1887년(고종 24)에 간행된 『진찬의궤』에는 모라복두 1건을 사는데 실제 6량이 들어갔으며, 영자의 값으로는 2량이 소요되었다. 이후 1895년(고종 32)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에도 전악의 복식을 장만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을 기록하고 있다. 전악의 복식인 모라복두와 야자대는 3량이며, 승혜(繩鞋)의 값은 5전이다. 녹초삼을 만드는 데에는 녹초 25척이 들어가며, 매척의 값은 1량이고 바느질값은 4전이 들어갔으나 1902년(광무 6) 『진연의궤』에는 모라복두 1건의 값은 7량 3전으로 국상 때 제작한 모라복두와는 차이가 있다. 이는 시대상에 따른 물가의 변화로 이해된다.
전악이 착용하는 모라복두는 녹초삼 또는 청삼과 함께 오정대 또는 야자대, 은야대를 띠고 오피화를 착용한다. 복두의 형태는 시대에 따라 2단으로 된 모정 부분의 변화를 보인다. 조선 초기의 형태는 2단으로 된 모정 부분이 평평하고 각진 형태였으며, 후반에는 모정 부분은 둥글어진 반면 양각은 각진 형태에서 둥근 형태로 바뀌었다.
『(기축)진찬의궤』 『경현당수작시등록』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 『(무술)진연의궤』 『(무신)진찬의궤』 『(정해)진찬의궤』 박가영, 「조선시대 궁중정재복식의 디자인 요소와 특성」, 『한국디자인포럼』 44, 2014. 이민주, 「조선시대 문헌에 나타난 선잠제향 복식 검토」, 『포은학연구』 19, 2017. 조선시대 왕실문화 도해사전(http://kyujanggak.snu.ac.kr/dohae/main/index.jsp).
이민주(李民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