첩리(帖裏, 帖裡, 貼裏), 천익(天翼, 天益), 철릭(綴翼, 裰翼), 세습아(細褶兒), 판습아(板褶兒), 방의(防衣), 첨리(添里), 텰릭
취타수가 초립과 함께 착용하는 옷.
철릭은 상의와 하상(下裳)을 따로 재단하여 허리에서 주름을 잡아 연결한 포이다. 깃은 직령의 곧은 깃이며 소매는 매듭단추, 끈, 시침 등으로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있는 분리형과 분리되지 않고 연결된 통수형이 있다. 색상과 직물에 따라 명칭이 달라지며 복색으로 신분을 구분 짓는다. 황철릭은 조선후기 취타수가 초립과 함께 착용했으며 허리에는 남전대를 띤다.
철릭의 가장 오래된 기록은 고려가요인 「정석가」에서 보인다. “므쇠로 텰릭을 ᄆᆞᆯ아나는 철사(鐵絲)로 주름바고이다”라는 가사가 있다. 이는 싸움터에 나가는 남편을 위해 아내가 철릭을 쇠로 마름질하고 철사로 바느질한다는 내용이다. 또 『삼재도회』에는 철릭을 입은 고려인의 모습이 보이며, 해인사 불복장에서도 요선철릭이 발견되었다. 이는 원과의 교류를 통해 전래된 것으로 고려 중기 이후 착용하기 시작하여, 조선시대에는 1444년(세종 26) 명에서 사여한 왕의 상복으로 곤룡포(袞龍袍)와 같이 답호(褡護)와 철릭이 일습을 이루고 있으며, 문무백관 역시 관복 안에 받침옷으로 입다가 비상시 겉옷을 벗으면 융복이 되었다. 문무백관이 단령 안에 철릭을 입은 모습은 공신화상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또 1449년(세종 31) 의정부에서 올린 의복의 금제조건을 보면, 각전(各殿)과 각궁(各宮)의 별감과 전악서(典樂署)의 악공은 평상시에는 직령의 겹주름 철릭을 입고, 차비할 때에는 단령을 입으며, 지방의 향리는 직령을 입고 서울 안 상림원 별감과 대장(隊長)ㆍ대부(隊副)ㆍ무사(武士)ㆍ서인(庶人)과 외방의 일수양반(日守兩班)ㆍ공(工)ㆍ상(商)ㆍ천례(工商)등은 공통으로 단령을 없애고, 직령겹주름 철릭을 입는다고 하여 철릭이 관복을 대신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생긴 변화로써 1647년(인조 25) 관복제도가 복구되면서 철릭을 다시 융복으로 착용했던 것이다.
한편 조선후기에는 임금이 거둥할 때나 행행(行幸)ㆍ능행(陵行)ㆍ왕실의 동가(動駕) 및 군대의 행진ㆍ진문의 개폐ㆍ통신사의 행렬 등에서 북ㆍ나각ㆍ징ㆍ자바라 등을 연주하는 취타수들이 황초립을 쓰고 황철릭을 입고 남전대ㆍ미투리를 착용하였다. 이는 1778년(정조) 『정아조회지도(正衙朝會之圖)』에서 중앙 계단의 좌우에서 취각을 부는 스물세 명이 황융복을 갖추고 있으며, 1848년〈무신진찬도병〉에서도 초립에 황철릭을 입고 남전대를 띠고 미투리를 신은 취타수의 모습이 확인된다.
이 외에 1795년 정조가 사도세자의 원소(園所)인 현륭원에 행차했을 때의 행렬모습과 행사의 여러 장면을 그린 『화성원행의궤도』에서는 취타수의 복식으로, 〈향교알성도〉에 등장한 취타수는 장식이 없는 황색초립에 황철릭을 입고 있는 반면, 반차도에서는 말을 탄 취타수가 깃털을 꽂은 초립에 황철릭을 입고 남전대를 띠고 있다.
1493년(성종 24)에 간행된 『악학궤범』에는 가동(歌童)이 융복으로 착용한 토홍면포(土紅綿布)로 만든 홑철릭의 도설이 있으며, 둑제를 지낼 때 궁시무(弓矢舞)와 간척무(干戚舞)의 공인이 착용하는 홍면포 또는 청면포로 만든 철릭이 실려 있다. 안감으로는 황포를 사용하였으며, 이를 방의(防衣)로 표기하고 있다.
철릭은 상의(上衣)와 하상(下裳)을 별도로 재단하여 허리에서 주름을 잡아 연결한 포이다. 곧은 깃의 직령이며, 소매는 분리형과 통수형이 있다. 철릭은 의와 상의 길이 및 깃ㆍ 소매ㆍ고름ㆍ주름 등이 시대에 따라 변했기 때문에 시대를 읽을 수 있는 척도가 된다. 즉 15-16세기에는 의와 상의 비례가 1:1, 17-18세기에는 1:1.8~2, 이후 19세기에는 1:3의 비례로 상의 길이가 길어졌으며, 깃의 형태는 칼깃에서 둥근 깃으로 바뀌었다. 소매통도 진동과 비슷하였는데 점차 넓어져 두리소매로 바뀌었다. 고름은 짧고 좁던 것이 넓고 길어졌으며, 주름의 너비는 정교한 것은 1~2mm정도이며 넓은 것은 1.5~3cm이다.
철릭은 상의와 하상이 연결된 포로 허리에 주름을 잡아 몸을 경첩하게 움직이기 편하게 만든 융복이다. 왕에서부터 천례에 이르기까지 모두 착용한 철릭은 소재와 색상에 따라 신분을 구분할 수 있다. 특히 조선 후기 취타수의 복식은 호위하는 대상에 따라 복식의 소재를 달리하는데, 취고수는 황색을 착용하여 다른 군병과 차별화된 모습을 보인다. 이는 황색이 명도가 높아 외부에서 의식을 치를 때 쉽게 눈에 띄는 특징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대취타에 대한 기록은 1612년(광해군 4) 송한교(宋韓嶠)가 쓴 『연병지남(練兵指南)』에서 처음 확인되는 용어로 징을 세 번 치는 것으로 연주의 시작과 끝을 알린다. 또 1795년(정조 19)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에서는 집사가 등채를 두 손에 받쳐 들고 있다가 오른손으로 잡고 머리 위로 높이 들고 ‘명금일하대취타(鳴金一下大吹打) 하랍신다.’라고 호령하면 징을 치고 연주를 시작한다.
『세종실록』 『악학궤범』 『정아조회지도』 〈무신진찬도병〉, 견본채색, 136.1×47.6cm, 국립전주박물관. 고부자,「『악학궤범』 복식연구」, 『국악원논문집』 14, 2002. 박가영, 「『악학궤범』 복식의 착용에 관한 연구」, 『국악원논문집』 16, 2004. 금종속, 『조선시대 철릭』, 단국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1. 염하정, 「조선 중ㆍ후기 훈련도감의 군사복식에 관한 연구」, 『복식』 63(8), 2013. 이은주, 「철릭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 『한국의류학회지』 13(4), 1989.
이민주(李民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