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다회(廣多繪), 광다회대(廣多繪帶), 광사대(廣絲帶), 조대(絛帶)
선유락(船遊樂)을 추는 집사(執事)가 허리에 둘러 앞에서 묶는 넓은 홍색 띠.
선유락 춤을 추는 무용수[女伶] 중에서 집사가 융복(戎服) 차림을 할 때에 허리를 둘러 묶은 붉은색 띠이다. 문무 당상관이 융복이나 사복(私服)을 할 때 착장하는 허리띠이다. 견사(絹絲)로 만든 실띠[絲帶]의 한 종류로서 납작하면서 폭이 넓은 붉은색 다회(多繪) 좌우 양 끝에 술이 달려있는 형태이다.
광대는 폭이 넓은 허리띠를 말하는데, 광다회(廣多會)ㆍ광다회대(廣多繪帶)ㆍ광사대(廣絲帶) 등의 이칭이 있으며, 현대에서는 광다회로 통용되고 있다. 광대, 즉 광다회는 폭이 넓고 납작한 모양의 허리띠로 견사(絹絲)를 두 가닥 혹은 세 가닥, 네 가닥 등으로 엮어 짠 것이다. 조선시대 문무 관료들이 왕의 행차를 수행하거나 외국에 사신으로 파견되는 경우 등에 입는 융복(戎服)인 철릭의 허리띠로 주로 사용되었다. 특히 붉은색 광다회는 당상관 이상이 착장한 것으로 보여지는데, 『대전전회통(大典會通)』 권지3, 예전(禮典) 의장(儀章) 조에서 당상관은 사복에 붉은 실띠(紅條兒)를 띤다고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권지 79, 장복(章服)에도 ‘『경국대전(經國大典)』 기록에 사복에 입는 허리띠[帶]는 1품에서 3품까지는 홍조아(紅絛兒) 4품 이하는 청조아(靑絛兒)’라고 하여, 신분에 따라 허리띠 색상에 차별을 둔 것을 알 수 있다.
선조 25년(1592) 4월 14일에 융복 착용령을 내릴 때 철릭에 광사대(廣絲帶)를 매도록 하였는데 융복에 착장한 것을 볼 때 광다회임을 짐작할수 있다. 그 제도는 당상관의 사대는 홍색과 자색, 당하관의 사대는 청색과 녹색 광다회이다. 중종 35년(1540) 11월 17일에는 세자가 도난당한 물품들 중에서 대홍광다회(大紅廣多繪)만을 찾았다는 기록이 있다. 『대동야승(大東野乘)』에 실려있는 이제신(1536~1584)의 글에 ‘광다회가 승려들이 띠던 것인데 선비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것이 우려스럽다’고 하였다. 이처럼 광다회는 일찍부터 왕에서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널리 착용하였음이 확인된다.
궁중 의례 참여자들의 복식에도 광다회가 사용되었는데, 광다회-광다회대, 광대-광다회대가 혼용되고 있다. 『악학궤범(樂學軌範)』에는 가동(歌童)의 녹주단령(綠紬團領) 예복에 홍색 명주실[大紅眞絲]로 짠 광다회(廣多繪) 띠를 두른다고 하였으며, 도식에 그려진 ‘광다회대(廣多繪帶)’는 가늘지 않으며 좌우 양끝에 술이 달려있는 형태이다.
조선 후기 『진찬의궤(進饌儀軌)』류에서 선유락 집사는 주립(朱笠)을 쓰고 겉옷으로 남색 철릭을 입고 허리에 진홍광대(眞紅廣帶)를 두르고 신은 수화자를 신었으며 동개와 궁시, 환도와 등편을 패용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는데, 이러한 모습은 조선 후기 당상관의 융복 차림에 해당한다. 「복식도」의 진홍광대는 납작하고 가늘지 않으며 좌우 양끝에 술이 달려있는 형태로 묘사되었다.
○ 쓰임 및 용도
광다회는 견사를 평면으로 납작하게 짠 것으로 폭을 넓게 하여 허리띠로 사용하였다. 조선시대에 왕 이하 사대부들이 관복 또는 편복을 입을 때 다회 허리띠를 착장하였는데, 신분별로 색상의 차별이 있어서 당상관 이상은 홍색, 당하관 이하는 청색이나 녹색 허리띠를 띠었다. 특히 홍색 광대, 즉 홍색 광다회는 당상관이 융복을 입을 철릭에 갖추어 착장하였다. 또한 나라에 잔치[進饌˙진연進宴]가 있을 때, 선유락 정재(呈才)에 참여하는 집사 여령이 융복 차림의 철릭을 착장할 때와 가자가 단령을 입을 때 허리에 둘렀다.
광다회는 넓은 다회라는 뜻이다. 『대전회통』에 의하면 짜는 끈을 ‘다회(多繪)’라 하였고 끈 만드는 것을 ‘다회친다’ 라고 하였다. 경국대전(經國大典)(1484)에는 경공장(京工匠)에 편성된 다회장(多繪匠)이 있어 각종 끈목을 짜는 기능을 갖춘 장인이 있었다. 다회는 대부분 여러 올의 명주실로 엮어 짠다. 용도에 따라 굵기를 맞춰서 짜는데, 끈목의 둘레가 둥근 것이 동다회(童多繪)이며, 넓고 납작한 것이 광다회(廣多繪)이다. 역어유해(譯語類解) (1682)와 방언유석(方言類釋)(1778)에는 편조(扁絛)를 ‘너븐다회’라고 언해하고 있다. 단면을 둥글게 짠 끈목을 동다회라 하였다. 재물보(才物譜) (1798)에는 편조대(扁絛帶)를 ‘납다흔띠’라고 하여 세조대와 구별하였다. 광다회의 형태가 넓고 두께가 얄팍한 다회에 해당됨이 확인된다. 조선 후기 『진찬의궤(進饌儀軌)』류에서 선유락 집사가 착장한 진홍광대는 납작하고 가늘지 않으며 좌우 양끝에 술이 달려 있는 형태로 그려져 있는데 이는 조선시대 15~17세기의 유물에서 보이는 끈목이 넓은 조대와 그 형태가 유사하다. 대표적인 유물로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소장의 강대호(姜大虎:1541-1624) 묘 출토 광다회가 있다. 길이 297cm, 너비 1.8cm 의 크기로 넓고 납작한 모양으로 견사를 8가닥으로 엮어 짠 것이다. 끈목의 끝에 24.5cm의 긴 술이 달려있는데 망(網) 장식 속에 석영을 넣어주어 반짝이는 빛을 띤다. 조선 후기로 가면서 광다회 끝의 망 장식이 사라지고 대신 다회의 끝을 일정 부분 풀어주어 술을 만든 형태로 변하였다.
광다회는 대부분 견사를 엮어 만들었다. 좌우측 끝에는 술 장식이 있는데 다회 끈목과 술 사이에 망 장식을 하기도 하였다. 망 장식에는 금편(金片)이나 백운모(白雲母) 및 석영(石英)을 넣어 금빛이 어른거리도록한 장식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앞에서 말한 강대호의 광다회 술 장식에 사용된 석영이다.
『(기축)진찬의궤』(1829)를 비롯한 19세기 『진찬의궤』의 공령(工伶)에는 선유락 집사 여령이 남사철릭에 착장한 허리띠는 진홍(眞紅) 성성전(猩猩氈, 성성이의 피로 물들인 붉은빛의 전(氈)) 광대(廣帶)가 마련되어 있으며 품목(稟目)에는 재료 일습이 마련되었다. 광대의 재료는 끈감으로 진홍색 선성전[眞紅猩猩氈]이 있으며, 양쪽 끝에 달린 술[垂兀]은 구름 문양[雲角]을 역었다. 홍색모사(紅絨冒絲)ㆍ금지[紙金四張]ㆍ남색실[藍眞絲]의 재료가 사용되었다.
문무 당상관이 융복이나 사복 차림을 할 때 허리를 둘러준 붉은 색의 넓고 납작한 허리띠로 왕실 진찬 행사에 참여하는 참가자들도 착장하였다. 특히 선유락 집사가 융복 차림을 할 때 착장한 진홍광대는 당상관용 홍색 광다회를 의미하는 것으로, 호령하는 집사가 철릭을 입고 허리에 넓은 허리띠를 착장함으로서 최소한의 예를 표현하여 위의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박성실, 「朝鮮後期 進爵儀軌˙進饌儀軌類의 服飾 硏究」, 『조선후기 궁중연향문화 권2, 한국학중앙연구원 편』, 민속원, 2005. 김시재, 「조선시대 조대의 형태적 특징과 제작법에 관한 연구」, 성균관대학교 가정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8. 설지희, 「한국 다회(多繪)의 전통과 기술의 변모」, 한국전통문화대학교 대학원 문화유산융합학과 석사학위논문, 2018.
이명은(李明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