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립(紫笠)
선유락(船遊樂)을 추는 집사(執事)가 쓴 붉은 색 갓.
선유락 춤을 추는 무용수[女伶] 중에서 집사가 융복(戎服) 차림을 할 때에 머리에 갖추어 쓴 붉은 색 모자이다. 원래는 당상관이 융복 차림을 할 때 착용하는 모자이다. 기본적인 형태는 흑립(黑笠)과 같으나 붉은색을 띠고, 입식으로 호수(虎鬚)와 공작우(孔雀羽)를 꽂아 장식하였으며 패영[貝纓, 구슬로 만든 갓끈]을 양쪽 귀옆에 귀 옆에 고리내어 묶었다.
조선시대에 문무관 정3품 이상 당상관 관리가 쓴 붉은 색 갓이다. 융복 차림을 할 때는 입식으로 호수와 공작우를 꽂고, 패영을 하는 등 화려한 장식을 하였다.국가의 큰 잔치[進饌˙進宴]에서 선유락 정재(呈才)에 참여한 집사 여령이 정재복으로 융복 차림을 할 때도 호수와 공작우를 장식한 주립을 썼다.
자립(紫笠)이라는 유사한 명칭도 있으며 문헌에서 볼 때 형태나 기능에서 동일한 붉은색 갓을 의미하여 시대에 따른 색상의 변화로 보인다. 영조 때에 간행된 『속대전(續大典)』(1746) 권3 예전(禮典) 의장(儀章) 조에 의하면 당상관 이상이 착용하는 융복으로 남색 철릭을 입을 때에 패영(貝纓)을 부착한 자립(紫笠)을 갖추었고, 당하관 이하는 흑립(黑笠)에 정영(晶纓)을 하였다. 주립에 부착한 패영은 그 길이가 점점 길어지면서 1750년대 이후 왼쪽뺨 귀옆에 묶어 사용하였는데, 영조 26년(1750) 9월에는 영조가 온양(溫陽)에 거둥할 때는 주립을 쓸 때 패영(貝纓)이 벗겨지지 않게 견영(絹纓, 옷감으로 만든 끈)을 함께 매어 편리함을 더 하도록 하였다.
주립에는 입식으로 호수를 꽂았다. 호수는 호랑이 수염으로 만들었다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원래는 보리 이삭에서 기원한 것인데, 그 시기는 다양한 설이 있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별집(別集) 권13에는 현종((顯宗, 조선 제18대 왕)이 온천에 거둥할 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고종 11년(1874)의 기록에는 성종(成宗, 조선 제9대 왕) 대에 행행할 때에, 송남잡지(松南雜識)』권3에서는 1717년에 숙종(肅宗, 조선 제19대 왕)이 동대문 밖을 행행할 때에 시작되었다는 것으로, 행행하던 백관들이 보리 이삭을 보고서 잘라 꽂았던 것을 시작으로 주립에 호수로 장식하는 규례가 정해졌다고 한다.
『순조실록(純祖實錄)』 34년(1834) 4월에는, 주립에 호수를 삽식(揷植)하는 것은 오래된 풍습이므로 존속해야 한다고 하며 호수를 지속시켰다. 호수와 같이 꽂았던 공작우(孔雀羽)는 공작새 깃털로 만든 것인데,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 권2 의주(儀註)에서 보면, 행행(行幸) 중에는 꽂고 있되, 능(陵)이나 원(園)을 배알하는 동안은 왕과 신하 모두 깃털을 뽑는 것이 정례(定例)였다.
정약용이 쓴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제1집 권9에는 당상관이 융복을 입을 대에 모자는 자종립(紫騣笠)에 호수와 공작깃[孔雀羽]ㆍ전우(巓羽)ㆍ방우(旁羽)로 꾸미고 밀화영(蜜花纓)을 장식하며, 당하관은 오종립(烏騣笠)과 철립(鐵笠)에 장식하였다. 입자의 색깔에 따라 계급의 차이가 있으나 입식의 차이는 없음을 알 수 있다.
순조 34년(1834) 5월에 주립을 말총으로 만드는 것을 금하고 대나무로 붙이고 다만 주색(朱色)으로만 할 것을 규정하였으며, 고종 원년(1864) 7월에는 융복에 착용하던 주립과 호수˙패영을 없애고 그 대신 칠사립(漆紗笠)으로 마련하도록 하여 간소화를 시행하였다. 고종 20년(1883) 1월에 융복이 폐지 되면서 문무관의 주립도 완전히 폐지되었다. 다만 정재복식에서는 주립이 여전히 사용되어 고종의 성수(聖壽) 51세를 축하 잔치 기록인 『진연의궤(進宴儀軌)』(1902)에서 선유락 집사의 주립 기록이 확인된다.
조선 후기『진찬의궤』 부류의 「정재도」와 「복식도」에는 호수와 공작우를 꽂고 패영한 주립을 쓰고 융복을 입고 호령하는 선유락 집사 여령과 복식 일습이 그려져 있는데, 「복식도」에 그려진 주립은 갓에 네 개의 호수를 꽂고, 모자와 양태를 이은 부분에 중도리를 돌리고, 패영 길게 하여 왼쪽뺨 귀옆에 묶은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 쓰임 및 용도
조선시대에 문무관 정3품 이상의 관리가 쓴 붉은 색 갓으로, 호수와 공작우ㆍ패영을 달아 융복을 입을 때 착용하였다. 패영은 조선 후기로 갈수록 길어져 주립을 쓴 후 늘어진 패영은 왼쪽 뺨에 묶어 사용하기도 하였고 패영(貝纓)에다 견영(絹纓)을 함께 매어 편리함을 더 하도록 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왕실의 진찬 때에 선유락 춤을 추는 호령 집사 여령이 융복 차림에 쓴 모자이기도 하다.
○ 구조 및 형태주립은 붉은색 갓에 호수와 공작우를 꽂아 장식하고 귀 옆에 구슬을 꿰어 만든 갓끈[패영]을 달아 귀 옆에 고리 내어 묶었다. 흑립과 형태가 같고 색상에서만 차이를 보여, 흑립처럼 모자[帽]와 양태(凉䑓)로 구성되어 있으며 변화 과정도 같이한다. 형태는 모자의 높이와 양태의 넓이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조선 초기의 형태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성종대에는 모정이 둥글고 챙이 넓은 형태였다. 연산군대에 모자의 모양이 위는 좁고 아래는 넓은 원통형으로 되었다. 선조에서 광화군 시대에 양태가 가장 넓은 갓이 유행하였으며, 효종 때에는 문을 통과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양태가 넓었다고 한다. 영조와 정조대에는 양태가 비교적 넓으면서 거기에 밀화나 호박 대모 등으로 만든 갓끈[패영]으로 멋을 부렸다. 양태 너비가 순조대 이후 점차 작아지기 시작하면서 대원군의 의관 개정(20세기 전후) 이후 작은 갓이 널리 퍼졌다.
『(기축)진찬의궤』 (1829) 품목(稟目) 조에 기록된 선유락 집사의 주립에 필요한 재료에서 주립의 구조를 알 수 있다. 주립은 갓모자[帽], 갓모자의 테두리에 해당하는 양태(凉䑓)를 기본으로 하고 갓 정수리를 장식한 은입식(銀笠飾), 모자와 양태 이음 부분을 장식한 남색실[藍眞絲]로 만든 중도리[徴道里], 밀화 구슬을 꿰어 만든 갓끈[蜜花貝纓]과 옷감으로 만든 갓끈[宮綃纓子], 은으로 만든 갓끈 연결 고리 [銀纓子]로 만든 후 모자 양쪽 귀와 뒷면에 입식 꽂이를 부착한 후 호수와 공작우를 꽂았다. 이와 같은 선유락 집사 주립의 구성 요소는 무용수라는 특수 역할에 따른 것으로, 전해지는 문무관의 주립 유물에서는 중도리는 확인되고 있지 않는 등의 차이를 보인다.
○ 재질 및 재료주립은 원래는 말총을 엮어 만든 종립(鬃笠, 말총, 당상관 이상)이었으나 순조 대에는 대나무로 만들고 그 위를 붉은색 옷감으로 씌워 만든 사립(紗笠)이 있으며, 고종 대에는 붉은색 칠을 하여 사용하는 등 시대가 변화면서 다양한 재료가 사용되었다. 입식으로 사용한 호수는 호랑이 수염으로 만들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나 후대의 유물은 끝이 뾰족한 나무를 여러 층으로 만들어 호랑이 수염을 형상화하여 만들었다. 같은 입식인 공작우는 공작 꼬리를 모아 부채꼴 모양으로 만든 것이다.
『(기축)진찬의궤』 (1829) 품목(稟目) 조에는 호수에 남색실[藍眞絲]을 달아주고, 공작우에는 초록색 실[草綠眞絲]을 달아주었는데, 실제로 전해지는 유물의 호수와 공작우의 끝에는 끈이 부착되어있다. 이는 모자에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한 것이다. 갓끈인 패영은 조선 후기 『진찬의궤』에서 볼 때 밀화[蜜花貝纓]로 만들었다. 유물은 갓과 패영을 분리하여 전해지는 것이 많으며 재질은 밀화ㆍ산호ㆍ호박ㆍ대나무 등 다양하다.
선유락 집사가 머리에 쓴 주립은 당상관이 사용한 붉은 색 갓으로, 호수와 공작우를 입식하고 끈으로 밀화 패영을 달았다. 무인의 복식과 유사한 것은 배 앞에 늘어서서 호령하는 집사가 지위관의 역할에 맞춘 위의를 보이기 위한 것이다.
갓, 자립, 칠사립, 호수, 공작우, 패영, 선유락, 집사, 철릭, 융복
『속대전』 『여유당전서』 『원행을묘정리의궤』 『朝鮮王朝實錄』 윤빛나ㆍ홍나영, 「조선시대 호수 입식에 관한 연구」, 『韓國服飾 第34號, 2015,12. 국립민속박물관, 『머리부터 발끝까지-모자와 신발 특별전』, 2011. 박성실, 「朝鮮後期 進爵儀軌˙進饌儀軌類의 服飾 硏究」, 『조선후기 궁중연향문화 권2, 한국학중앙연구원 편』, 민속원, 2005.
이명은(李明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