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靴), 수화(水靴), 수혜자(水鞋子)
선유락(船遊樂)을 추는 집사(執事)가 융복 차림을 할 때 신은 목이 긴 신.
수화자는 화의 일종으로, 무관이 전지(戰地)나 진영(陣營)에 나갈 때는 융복(戎服)을 입을 때 신었다. 백관들이 단령을 입을 때 신어왔던 흑화(黑靴)가 시대별로 길이와 재질의 변화를 보인 것처럼 수화자 또한 비슷한 변화 과정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영조 2년(1726) 10월 8일에 무관들의 신발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무신(武臣)이 흑철릭을 입고 수화자를 신는 것은 움직이고 걷기에 편리하기 위한 것이고, 효종(孝宗, 재위 1649∼1659) 임금이 일찍이 이것을 명하였는데 이제는 모두 해이해져서 신기를 싫어하니 이상하다’는 내용이다. 무관이 흑철릭을 입을 때 신는 수화자라는 신은 장기간 활동에 편리하도록 만들어진 신으로서, 적어도 1600년대부터 신어왔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듬해 1727년에는 무신의 수화(水靴)는 옛날부터의 규정이라고 하면서, 철릭을 입으면 수화를 신고 장복(章服, 백관의 단령을 지칭)을 입으면 항화(項靴, 흑화 추정)를 신도록 하였다.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에서 융복 철릭과 군복 차림에 수혜자(水鞋子)를 신는데 비가 올 때는 유혜자(油鞋子)를 신는다고 하였다. 수화자는 수화(水靴) 또는 수혜자(水鞋子)로도 불렸으며, 무관의 융복과 백관의 상복에 신는 신은 분명 구별되었음이 확인된다. 1777년 이압(李押)의 연행록인 『문견잡기(聞見雜記)』 상(上)에 청인(淸人)이 신은 수화자의 언급이 있다. 청나라에서는 상하 신분의 구분 없이 수화자를 신는데 발목 길이가 길고 좁아서 신고 벗기에 매우 힘들다고 했다. 또 신 바닥은 베를 접어서 만들었는데 극히 두껍고 단단하여 진흙 길을 걸어도 젖지 않는다고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조선의 수화자도 바닥을 두껍게 만들어 물이 새는 것을 방지하는 등 일반 피화(皮靴)와는 조금 다르게 거친 곳에서 활동량이 많은 무관이 신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했을 그것이 추측된다. 이유원(李裕元:1814~1888)의 『임하필기(林下筆記)』 춘명일사(春明逸事)에서 보면 “화자(靴子)가 순전히 피물(皮物)로 하던 것이 뒤에 전(氈)으로 내장(內粧)하고 외부는 청금선(靑錦縇)으로 둘러서 화(靴) 밖에 보이게 하고 고급품은 금단(錦緞)으로 꾸몄으며, 근래의 신제(新制)로서 태조가 어제(御製)한 수화자의 모양과 같다”고 하였다. 시대가 변하면서 수화자의 형태로 변모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문헌 기록으로 볼 때 19세기의 흑화나 수화자는 형태가 유사하고 신목에 특별히 청색의 깃 장식을 하였는데, 그 겉모양이 마치 화정(靴丁, 靴精:화에 신는 버선의 일종)이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처럼 하였다. 이는 왕실의 진연 진찬 때에 무용수가 신은 기록에서 확인된다. 조선 후기 『진찬의궤(進饌儀軌)』류에서 보이는 선유락 집사의 수화자는 여러 조각으로 이어진 신울[鞋 부위]과 깃 장식을 한 신목[襪 부위]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앞축은 뾰족하고 위로 치켜 올라간 형태이다.
○ 쓰임 및 용도
무관이 융복을 입을 때 신었던 신목이 긴 신으로, 왕실의 진찬ㆍ진연 때에 선유락 집사 무용수가 융복 차림을 할 때도 신었다.
○ 구조 및 형태
문무백관들이 단령을 입을 때 신어왔던 흑화가 시대별로 길이와 재질의 변화를 보인 것처럼 수화자 또한 비슷한 변화가 있었으나 현재로서는 조선 후기 『진찬의궤(進饌儀軌)』류에서 융복 차림을 하는 선유락 집사가 시는 수화자를 통해 형태가 확인된다. 복식도에 그려진 선유락 집사의 수화자는 신울과 깃 장식을 한 신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신울은 발등의 띠와 앞코 중심 좌우측 조각으로 이루어져있다.
그리고 앞이 뾰족하고 위로 치켜 올라간 형태로 묘사되어 있다.『(기축)진찬의궤』(1829) 의 가자복식(歌者服飾에서 녹단령(綠團領)에 갖춰 신은 흑화(黑靴)는 앞 부분이 둥글게 묘사되어 전체적인 형태는 유사하면서도 신울 앞쪽의 모양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이를 본다면 19세기 당시 무관의 융복 차림에 입는 수화자와 백관이 단령을 입을 때 입은 흑피화의 형태 또한 이러한 차이를 보였음을 유추할 수 있다.
같은 시기의 유물로 수화자와 흑피화 유물이 전해지는데, 전체적인 형태는 유사하여 흑피로 만든 혜와 말 부분으로 구성된 신목은 청색으로 깃 장식이 되어있고 길이가 짧은 편이며 두꺼운 가죽 밑창이 앞 코까지 올라와 굽어져 있는 모습이다.
『진찬의궤』 복식도에 묘사된 수화자나 흑피화의 차이점이 유물에서도 확인된다. 수화자 유물의 앞코 부분은 뾰족하고 흑피화 유물은 둥글게 된 모습에서 차이를 보인다.
○재질 및 재료
무관이 융복에 신은 수화자는 흑화와 같이 흑피(黑皮)를 사용한 것이 유물에서 확인된다. 같은 종류의 수화자를 신은 여령의 경우, 무관처럼 바깥에서 착장하는 것이 아니므로 형태는 같아도 재질에서 차이를 보일 것으로 추정된다. 『(기축)진찬의궤』(1829) 품목(稟目) 조에는 선유락 정재 여령의 복식에 소용되는 품목과 재료가 기록되어있다. 수화자는 검은색 공단(黑貢緞, 검은색 무늬없는 비단)으로 만들고 상부를 초록색 운문단(雲紋緞, 구름무늬비단)를 장식하였으며 안감과 밑창을 포함한 수화자 두 부(部)를 마련하는데 공전 포함하여 총 9냥이 소요되었다.
무관이 융복 차림을 할 때 신는 신으로, 단령을 입을 때 신는 흑피화와 모양이 비슷하면서 앞코 끝이 뾰족한 것에서 차이를 보인다. 신울의 신 바닥이 딱딱하기 때문에 걷기 편하게 하기 위해 수화자의 앞부분을 위로 들리게 한 듯하다. 진찬 때에 선유락 집사가 철릭을 입을 때 수화자를 신은 것은 지휘관의 역할에 맞춘 융복 차림으로 위의를 보이기 위한 것이다.
『문견잡기』 『여유당전서』 『임하필기』 『조선왕조실록』 국립안동대학교박물관, 『17세기 무관 옷 이야기』, 2005. 곽경희, 조선시대 남자용 革˙布製 신에 관한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청구 논문, 2003. 박성실, 「朝鮮後期 進爵儀軌˙進饌儀軌類의 服飾 硏究」, 『조선후기 궁중연향문화 권2, 한국학중앙연구원 편』, 민속원, 2005.
이명은(李明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