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 연행 시 무동이 착용한 연꽃 모양의 관.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세종 13년(1431) 8월 박연이 회례에 사용하기 위한 남악(男樂)과 관복(冠服)으로 당나라때 경운지무(景雲之舞)에서 착용했던 녹운관(綠雲冠)ㆍ화금포(花錦袍)와, 성수지무(聖壽之舞)와 해홍지무(解紅之舞)에서 착용했던 금동관(金銅冠)ㆍ화봉관(花鳳冠)ㆍ오색화의(五色畫衣)ㆍ자비수유(紫緋繡襦)와, 용지지무(龍池之舞)에서 착용했던 부용관(芙蓉冠)ㆍ오색운의(五色雲衣) 등의 무용복과 고려때 부터 전해진 기존의 무용복의 모습을 그려 올렸는데 이 중 경운지무(景雲之舞)와 용지지무(龍池之舞) 등의 무복으로 결정되었고 세종 13년(1431) 9월에 회례연에 사용할 녹운관(綠雲冠)ㆍ부용관(芙蓉冠)을 각각 스물다섯 개씩 만들라는 기록과 세종 15년(1433) 2월의 부용관 열다섯 개와 녹운관 열다섯 개를 더 만들었다는 기록 등으로 부용관이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부용관은 잔치의 성격에 의해 회례연(會禮宴) 때 쓰는 것과 공연(公宴) 때 쓰는 것의 두 종류가 있다.
『악학궤범』에는 세종조에 쓰던 것이나 무동을 폐지한 뒤로 태워 없애 쓰지 않다가 경오년에 무동을 다시 도입한 뒤로 부용관을 다시 쓴다는 기록이 나온다. 따라서 세종 29년(1447)에 무동은 기예에 익숙해 질 때가 되면 바로 장정이 되어 무동 제도를 유지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무동을 없애고 각 연회에 악공을 쓰게 하였으나 박연의 건의에 의하여 문종 즉위년(1450)에 다시 무동 제도가 부활 하였다. 이때의 부용관의 도식이 『악학궤범』에 두 가지 형태로 나온다.
부용관은 회례연(會禮宴)과 공연(公宴)에 사용된 무동(舞童)의 관모이다. 부용(芙蓉) 연꽃을 뜻하는데, 여러 가지 색으로 연꽃이나 모란꽃 등을 그려서 관을 장식한 것이 특징이다. 부용관은 세종 13년(1431) 박연의 건의에 의해 당(唐)나라의 용지(龍池) 춤에 입혀졌던 부용관(芙蓉冠)ㆍ오색운의(五色雲衣) 등을 따라 만들도록 하여 샘플을 만들어 보았으며, 이후 지속적으로 제작되었다. 잠시 제도적 어려움으로 인하여 무동이 폐지되었다가 다기 부활하여 무용관의 착용도 계속 이어졌다. 부용관은 잔치의 성격에 의해 회례연(會禮宴) 때 쓰는 것과 공연(公宴) 때 쓰는 것의 두 종류가 있었다.공연(公宴) 때 사용한 부용관은 배접한 종이로 만들고 안은 옻칠한 베[柒布]로 쌌으며 겉은 금(金)ㆍ은(銀)을 비롯한 여러 가지 색으로 색칠하여 연꽃[芙蓉]을 그려 넣었다. 관의 좌우에는 여러 가지 색의 구슬로 꾸민 영락(纓落)을 달았고, 자황으로 만든 꽃무늬가 찍힌 [印紫黃都多益] 분홍색 비단 끈도 달았다. 회례연 때 썼던 부용관과는 몇 가지 다른 점이 있는데 첫 번째로 형태가 다르며 두 번째로 부용관에 모란꽃을 꽂았으며 세 번째로 관의 좌우에 늘어뜨린 비단 끈의 색이 각각 자주색과 분홍색이다.
부용관은 무동이 착용하는 장식관으로 그 기원은 당나라의 용지춤에서 기원한 고증을 통해 제작되었다. 이후 부용관은 국말까지 이어지며 민간에 까지 퍼져 민간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부용관도 있다. 나중에는 여기들도 착용하였다.
송방송, 『한국음악용어론』, 보고사, 2012. 유송옥, 『한국복식사』, 수학사, 1998.
박민재(朴民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