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발(響鈸/響撥/響鉢)
향발무는 ‘동발을 울리며 추는 춤’으로, 관아 교방의 기녀가 양손의 엄지손가락과 가운데 손가락에 각각 향발을 매어 부딪쳐 소리를 내며 추는 춤이다. 향발은 놋쇠로 만든 작은 바라처럼 생겼는데, 사슴 가죽을 매달고 오색실로 매듭 끈을 드리웠다. 향발무는 조선 시대 궁중에서도 활발히 연행되었고, 지역 관아에서는 사신연 및 지역의 잔치에서 공연되었다.
조선 시대에 여러 교방에서 향발무를 공연했다. 특히 중국 사행길의 길목이던 평안도 교방에서는 중국을 오가는 사신을 위한 잔치가 자주 열렸고, 주요한 춤 종목 중 하나로 향발무가 공연되었다. 1574년(선조 7)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허봉(許篈, 1551∼1588)은 평양감사가 마련한 연회 자리에서 향발무 등의 춤을 보고 재주가 시끄럽고 떠들썩하다고 평했다. 윤두수(尹斗壽, 1531~1601)의 『평양지(平壤誌)』(1590)에 따르면, 평양 교방에 소속된 기생은 180명이었고, 이들의 춤 공연 종목은 향발무를 비롯하여 〈포구락〉ㆍ〈무고〉ㆍ〈처용〉ㆍ〈발도가〉ㆍ〈아박〉ㆍ〈무동〉ㆍ〈연화대〉ㆍ〈학무〉 등이었다. 『몽유연행록(夢遊燕行錄)』(1848)에 따르면, 1848년(헌종 14)에 청나라 사신으로 가는 일생을 위해 평양에서 공연이 벌어졌으며 기생 40~50명이 긴 소매를 끌며 쌍쌍이 춤을 추었는데, 공연된 종목에는 향발무도 포함되었다. 『성천지(成川志)』(1603)와 『성천속지(成川續志)』(1656), 순조대 이후에 편찬된 『영변부읍지(‘寧邊府邑誌)』, 고종대 편찬된 『정주읍지(定州邑誌)』에서도 향발무의 존재가 확인된다. 경상도에서는 경주와 진주 교방에서 향발무를 추었다. 경주 교방의 향발무는 『당주집』권5에 나오는데, 네 명의 기녀가 양손에 유소를 늘어뜨린 붉은 목패를 잡고 장단에 맞추어 춤춘다고 하였다. 진주 교방의 향발무를 기록한 『교방가요(敎坊歌謠)』(1865)에는 향발무의 무구만 언급되어 있다. 『관동지(關東誌)』 「교방」에는 강원도 기생 중 가무가 출중하지 않고 노래로 명성을 얻는 이는 없다고 했는데, 기생이 추었던 춤 종목에 향발무가 있었다.
관아 교방의 향발무에 대한 기록이 자세하지 않아, 대략의 춤 특징만 파악할 수 있고 상세한 내용은 알기 어렵다. 먼저, 이후연(李厚淵, 1798~?)은 〈선루별곡〉에서 성천의 강선루에서 펼쳐진 향발을 “쟁쟁소리 향발(響鈸)일다”라고 한글로 표현했다. 향발무를 춤추면서 중간에 향발을 치는 ‘쟁쟁소리’가 향발무의 특징임을 나타낸 것이다. 다음으로 성천 교방을 중건하고 1795년에 평양감사로도 활동했던 김재찬(金載瓚, 1746~1827)이 〈제여악도(諸女樂圖)〉에 쓴 향발무에 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경쾌한 향발 소리에 메아리 이는데/ 조금만 금빛 구슬은 동글동글/ 한 곡조에 문득 돌아서는데/ 소리는 손가락 끝에 있구나.” 첫 구절에 ‘경쾌한 향발 소리’를 부각시켜, 소리가 주는 울림이 향발무의 특징임을 표현했다. 마지막 구절에서 ‘소리는 손가락 끝에 있구나’라고 하여 손가락에 달린 작은 향발에서 경쾌한 향발 소리가 나온 것임을 강조했다. 궁중의 향발무와 마찬가지로 관아 교방의 향발무는 작은 향발을 치면서 나는 청명하고 경쾌한 소리로 흥겨움을 더하는 춤이었다.
『교방가요』에 따르면, 향발무 무구인 향발은 놋쇠로 만든 바라[銅鈸]처럼 생겼다. 지름 한 치 한 푼이며, 뒤쪽에 사슴 가죽을 매달고 오색실로 매듭 끈을 아래로 드리워 양손에 매고 춤을 춘다.
향발무는 향발이라는 작은 타악기에서 ‘쟁쟁’하고 청명하게 울리는 소리와 춤이 함께 어우러진다는 특징이 있다. 청량감 있는 소리로 청각적 효과가 두드러졌던 향발무는 여러 지방관아의 교방에서 인기리에 향유되었던 춤으로서 의의가 있다.
임형택, 『옛노래, 옛사람들의 내면풍경』, 소명출판, 2005. 배인교, 「조선후기 지방 관속 음악인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8. 이종숙, 「조선시대 지방 교방 춤 종목 연구」, 『순천향 인문과학논총』 제31권, 2012. 이지양, 「18세기 중국 사행길의 악무공연」, 『연행의 사회사』, 2005.
조경아(趙京兒)