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척(金尺), 몽금척지기(夢金尺之伎), 개몽금척지기(改夢金尺之伎)
몽금척은 조선 전기의 당악정재이다. 금척을 든 무용수가 등장하여 여러 무용수와 함께 춤춘다. 금척(金尺)이란 ‘금으로 만든 자’로서 하늘의 명을 상징하는 도구이다. 금척을 든 무용수가 등장하여 여러 무용수와 함께 춤춘다.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이 지은 부르는 악장을 노래하는데, 악장은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 1335~1408, 재위 1392~1398)가 꿈에 금척을 받았다는 내용으로, 금척을 받은 것은 태조가 하늘의 명으로 조선을 개국했다는 것을 상징한다.
몽금척의 유래는 태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 꿈에서 시작되었다. 『태조실록』 1392년 7월 17일의 기사에 따르면, 꿈에 신인(神人)이 금척을 가지고 하늘에서 내려와 말하기를, 경복흥(慶復興, ?~1380)은 청렴하나 이미 늙었고, 최영(崔瑩, 1316~1388)은 강직하나 고지식하니, 금척을 가지고 나라를 바르게 할 사람은 바로 이성계뿐이라 하면서 금척을 주었다. ‘금척’은 ‘금으로 만든 자’인데, 신화에서 자는 만물의 측량과 조절이라는 역할을 하기에, 왕권과 함께 생명력과 규범을 상징했다. 금척을 받는 태조의 꿈이 공연예술로 탄생한 것은 이성계와 함께 조선의 개국에 힘을 쏟았던 정도전을 통해서였다. 1393년(태조 3) 7월 26일에 정도전은 악장 「금척」을 태조에게 지어 올렸고, 세 달 뒤인 10월 27일에 몽금척이 처음으로 공연되었다. 1402년(태종 2)에 몽금척 정재를 국왕과 종친들의 잔치에 쓰도록 정했다. 그러나 태종은 몽금척이 태조 이성계의 실제 덕을 묘사한 내용이 아니라는 점과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예언을 담은 점을 들어 임금과 신하가 함께 하는 연회의 첫 번째 곡으로 사용할 수 없게 하고, 악부(樂府)에만 기록하도록 했다. 이후 1432년(세종 14)의 회례연에서 태종대의 몽금척을 수정하여 개몽금척지기(改夢金尺之伎)를 공연했다. 순조대 『(기축)진찬의궤』에도 “태조께서 잠저(潛邸; 왕위에 오르기 전에 머물렀던 곳 또는 기간)에 계실 때에 꿈에 신인이 금척을 주었는데, 세종조에 이를 본떠서 춤을 만들었다.”라고 하여 세종대에 몽금척을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개몽금척지기’가 등장한 때를 춤을 만든 시기로 본 듯하다. 성종대 『악학궤범』의 향악정재 분류에서는 〈금척〉이라고 기록했다. 영조 병술년(丙戌年, 1766) 진연 때에는 영조가 친히 몽금척 정재의 「유황사(維皇詞)」와 「성인사(聖人詞)」를 지어, 내연에서 악장으로 썼다. 대한제국 시기까지 무동과 여령이 몽금척을 춤추었다가, 20세기 초반에 단절을 겪었다. 현대에 와서 국립국악원의 주도로 복원된 몽금척 정재가 무대화되었다.
몽금척은 꿈에 신인(神人)이 태조 이성계에게 금척을 주었다는 내용의 춤이다. 조선 개국의 정당성을 금척이라는 상징물에 담았다. 두 명이 죽간자(竹竿子)를 들고, 한 명이 족자(簇子)를 들고 앞에 서고, 한 명이 금척을 들고, 한명이 황개(黃蓋)를 들고 뒤에 선다. 열두 명이 좌우로 나누어 두 줄을 만들고, 나아가고 물러서거나 돌면서 춤춘다.
도입부에서 『악학궤범』 금척의 초입배열도처럼 죽간자ㆍ족자ㆍ황개를 중심으로 하여 무용수가 양편에 세로로 늘어서 있다가, 죽간자 두 명이 진구호를 한 뒤에 무용수 열두 명이 두 명씩 이동하여 작대도의 형태처럼 가로로 늘어선다. 진행부에서 금척을 든 자의 치어가 이어지고 열두 명의 좌우대는 「금척사」 제1장을 노래하면서 손을 여미고 ‘족도’라는 발디딤 동작을 한다.
이어 「금척사」 제2장을 노래할 때는 세 번 나아갔다가 물러나는 동작을 한다. 절정부에서 전체 무용수가 왼쪽으로 세 차례 크게 돌면서 〈성인사〉를 함께 노래한다. 종결부에서는 처음의 자리로 되돌아오고, 퇴구호를 하며 마친다.
몽금척에서 열두 명의 좌우대 무용수가 「금척사」를 노래하며 세 차례 춤추며 나아가고 물러나는 동작인 ‘금척무(金尺舞)’가 주요한 춤사위이다. 또한 전체 출연진이 「성인사」를 부르면서 왼쪽으로 크게 세 번 도는 ‘좌선회무(左旋回舞)’도 핵심적인 동작이다.
몽금척 악장은 1392년(태조 2)에 정도전이 태조에게 지어 올렸다. 정도전이 지은 금척의 악장은 진구호ㆍ치어ㆍ「금척사」ㆍ퇴구호로 구성되었다. 죽간자의 진구호에서 성대한 덕을 금척으로 찬미한다고 했다. 금척을 든 사람이 하는 치어는 금척을 꿈꾼 것은 천명을 받으려는 상서로운 조짐이라는 내용이다. 치어에 따르면 첫째 문무를 겸하고, 둘째 덕이 있으며, 셋째 지식을 갖추고, 넷째 백성들이 원하는 인물이어야 금척을 받을만하다고 했다. 「금척사」 제1장에서는 “덕이 있어야만 여기에 적임이도다”라며 이성계의 덕을 강조했고, 「금척사」 제2장에서는 “하느님이 백성들의 마음을 헤아리시고, 국가를 다스리게 한 것이오”라며 백성들의 마음을 강조했다. 퇴구호에서는 즐거움의 극치에 이르기 전에, 빨리 경계하는 마음으로 돌아가라는 신하로서의 주문이 깔려있다. 영조 병술년(1766, 영조 42) 진연 때 영조는 몽금척의 창사 「유황사(維皇詞)」와 「성인사(聖人詞)」를 지었다. [죽간자 구호] 奉貞符之靈異, 美盛德之形容. 冀借優容, 式孚宴譽. 봉정부지영이, 미성덕지형용. 기차우용, 식부연예. [죽간자 구호] 길하고 신령스러운 징표를 받들고 훌륭한 덕의 아름답게 형용하겠사오니 바라건대 너그러이 받아들이시어 기리는 이 잔치를 미덥게 만들어 주소서. [금척 치어] 夢金尺, 受命之祥也. 몽금척수명지상야. 太祖潛邸, 夢受金尺. 태조잠저, 몽수금척. 漢陽開國, 聖神休德. 한양개국, 성신휴덕. 于今幾百, 於天萬億. 우금기백, 오천만억. [금척 치어] 금으로 만든 자를 꿈에 보신 것은, 천명을 받을 상서로운 조짐이었지요. 태조께서 왕위에 오르시기 전 꿈에서 금척을 받으시고 한양에서 나라를 여셨으니, 거룩한 후손들의 아름다운 덕이 이제까지 몇 백 년이 되었으니, 아, 천 년 만 년 이어지겠지요. [창사] 惟皇鑑之孔明兮, 吉夢協于金尺. 유황감지공명혜, 길몽협우금척. 淸者耄矣兮, 直其戇, 繄有德焉是適. 청자모의혜, 직기당, 예유덕언시적. [창사] 하늘이 살피신 것이 너무나 밝아 길몽을 꾸는 중 금으로 만든 자를 보았도다. 금 자를 주신 분이 “청렴한 사람[경복흥(慶復興)]은 이미 늙었고 곧은 사람[최영(崔瑩)]은 외곬수니, 덕망 있는 사람[태조 이성계]이 적합한 사람이로다”라고 하였다. 잉창 삼도(仍唱三度 : 6대 12인) 이어 세 번 부른다 帝用度吾心兮, 俾均濟于家國. 제용도오심혜, 비균제우가국. 貞哉厥符兮, 受命之祥 정재궐부혜, 수명지상. 傳子及孫兮, 彌于千億. 전자급손혜, 미우천억. 상제(上帝)께서 우리 마음을 헤아리시어 나라를 고르게 다스리게 하셨도다. 길한 저 징표는 천명을 받을 상서로움이로다. 자자손손 전하여 천억 대를 이어가리라. [회무 창사] 聖人有作, 萬物皆覩. 성인유작, 만물개도. 靈瑞繽紛, 諸福畢至 영서빈분, 제복필지. 長言不足, 式歌且舞 장언부족, 식가차무. 於樂於倫, 君王萬壽 오락어륜, 군왕만수 [회무 창사] 성인이 세상에 나오시니 만물이 모두 우러러 보는도다. 신령스런 조짐이 많기도 많을시고, 상서가 많기도 많은지고 온갖 복이 한꺼번에 몰려드네. 길게 말해도 부족하여 노래하고 또 춤을 추게 되었으니, 즐겁고 또 질서까지 이루었나이다 우리 임금님 만수를 누리소서. [죽간자 구호] 樂旣奏於九成, 壽庸獻於萬歲. 악기주어구성, 수용헌어만세. 未及懽娛之極, 遽回敬戒之心. 미급환오지극, 거회경계지심. 拜辭而歸, 式燕以處. 배사이귀, 식연이처. [죽간자 구호] 음악 연주를 마친 뒤에 만세 누리시기 빌며 술잔을 올렸나이다. 즐거움을 끝까지 누리시기 전에 조심하는 마음을 빨리 되찾으소서. 하직인사 올리고 돌아가며 편안히 쉬시기를 바라나이다. - 원문 출처: 김천흥, 『정재무도홀기 창사보1』 번역: 강명관
『악학궤범』에서 당악정재로 분류된 몽금척은 주로 당악을 반주음악으로 썼으며, 시기에 따라 변화했다. 1393년(태조 3) 7월 26일에 처음 공연되었을 때는 기존 당악 선율을 썼다. 성종대 『악학궤범』에서 금척의 반주음악은 당악인 〈오운개서조인자(五雲開瑞朝引子〉ㆍ〈최자령(嗺子令)〉ㆍ〈금척령(金尺令)〉ㆍ〈소포구락령(小抛毬樂令)〉이었다. 조선 후기 『(을묘)정리의궤』에서 반주음악은 〈여민락(與民樂)〉, 〈청평악(淸平樂)〉이었으며, 『정재무도홀기』에서 반주음악은 〈보허자령(步虛子令)〉, 〈향당교주(鄕唐交奏)〉로 당악과 향악을 함께 사용했다. 현대에 국립국악원의 재현 공연에서는 〈보허자〉와 〈삼현도드리〉를 반주음악으로 쓴다.
몽금척 무동과 여령만 입는 복식은 없었고, 시기별로 정재 공연자의 기본 의상을 입었다. 여령은 조선 전기에 큰 잔치에서는 붉은 의상[丹粧]에 치장을 했으며, 규모가 작은 잔치에서는 흑장삼을 입었다고『악학궤범』에 기록되었다. 조선 후기에『(기축)진찬의궤』에는 화관(花冠)을 쓰고, 상의로 초록단의(草綠丹衣)에 황초단삼(黃綃單衫)을 입고, 하의로 안에 남색상(藍色裳)과 겉에 홍초상(紅綃裳)을 입고, 홍단금루수대(紅緞金縷繡帶)를 두르고, 오색한삼(五色汗衫)을 끼고 초록혜(草綠鞋)를 신었다.
무용수가 드는 주요 의물로는 죽간자ㆍ금척ㆍ족자(簇子)ㆍ황개(黃蓋)가 있다. 금척은 금색 자의 형태로 “하늘이 금척을 내리니 천명을 받을 상서이다”라는 뜻의 천사금척 수명지상(天賜金尺 受命之祥)이라는 여덟 자를 새겼다. 족자는 생초(生綃)로 만들어서 유황사(維皇詞)를 쓰고, 위아래에 홍릉(紅綾)과 백릉(白綾)으로 장식하고 유소(流蘇)를 드리워서 붉게 칠한 장대에 걸었다. 황개는 황색으로 만든 삼층 우산 형태의 의물이다.
또한 몽금척을 춤출 때의 의물로, 좌우 양편에 인인장(引人丈)ㆍ용선(龍扇)ㆍ봉선(鳳扇)ㆍ작선(雀扇)ㆍ미선(尾扇)이 세워졌으며 정절(旌節)이 사이사이마다 끼워져 있다. 개(蓋) 네 개도 세워졌다. 이 의물들은 권위를 더해주는 역할이었다.
조선 건국에 이성계와 뜻을 함께 했던 정도전이 지은 「금척」을 악장으로 부르며 춤춘다는 특징이 있다. 조선 개국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꿈에 신인이 나타나 이성계에게 천명의 상징인 ‘금척’을 주었던 일을 정재로 표현했고, 대한제국 때까지 지속적으로 공연되었다. 이는 천명으로 조선을 세운 태조의 공적을 드러내는 동시에 어렵게 개국한 조선을 잘 지켜나가라는 경계의 의미를 춤에 담았다는 의의가 있다.
국립국악원, 『궁중무용무보: 10집』, 국립국악원, 2003 성무경ㆍ이의강 번역, 『완역집성 정재무도홀기』, 보고사, 2005. 이혜구 역주,『신역 악학궤범』, 국립국악원, 2000. 이흥구ㆍ손경순, 『한국궁중무용총서: 4』, 보고사, 2009. 조경아, 「정도전 악장 정재의 가무악 요소에 담긴 상징과 비유」, 『무용역사기록학회』 33, 2014.
조경아(趙京兒)