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고지기(舞鼓之伎), 북춤, 고무(鼓舞), 고고무(叩鼓舞), 무수(舞袖), 정자(釘子)
고려 시대부터 전래된 향악정재로, 무용수들이 바닥의 북틀에 설치한 북을 치면서 추는 춤
고려시대부터 현재까지 이어지는 향악정재의 하나로, 무용수가 북채를 잡고 음악의 절차에 따라 북을 치고 북 주위를 돌면서 추는 춤이다. 처음에는 지방에서 연행되기 시작하여 궁중으로 유입되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왕실의 잔치, 사신을 맞이하는 잔치, 임금과 신하의 잔치 등 다양한 연향 때에 기녀나 무동이 춤추었다.
처음에 무고는 궁중이 아닌 지방에서 먼저 연행되기 시작하였다. 『고려사(高麗史)』「악지(樂志)」에 따르면, 고려의 재상인 시중(侍中) 이혼(李混, 1252∼1312)이 충선왕(忠宣王, 1275~1325, 재위 1298~1313) 대에 경북 영해(寧海)의 목사(牧使)로 좌천되었을 때, 바다에 떠 있는 나무토막으로 북을 만들었는데 북의 소리는 굉장했고, 춤은 변화가 많았다.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권근(權近, 1352~1409)은 ‘영해부 서문루기(寧海府西門樓記)’에서 이혼은 북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춤추는 절차까지 가르쳤으며, 지방을 순찰하는 관료들이 영해에 오면 반드시 구경하는 춤이었다고 했다. 무고는 고려 궁중으로 수용되어 정재의 형태를 갖추고 조선 시대까지 이어졌다. 조선 후기에는 군신간의 잔치인 외연에서는 무동이, 왕실 여성과 친인척들이 참여하는 잔치인 내연에서는 기녀가 춤추는 제도가 정착되었는데, 외연에서 무동이 주로 추었던 춤에 무고가 포함되어 있다. 무고는 여러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 궁중에서 무고지기(舞鼓之伎)로 지칭하기도 했고, 평안도 성천에서는 무수(舞袖), 황해도 황주에서는 고무(鼓舞), 해주에서는 북춤, 전라도 남원에서는 고고무(叩鼓舞), 경상도 경주에서는 정자(釘子)라고 했다.
20세기 초반에는 이왕직아악부가 중심이 되어 무고를 전승했으며, 1931년 조선총독부 주도로 촬영된 흑백 무성영화 《조선무악(朝鮮舞樂)》 에 무동이 춤추는 무고가 수록되었다. 한편, 민간에서는 기생들에 의해 무고가 활발히 공연되었다. 1913년 고종의 62세 생신잔치에서는 광교기생조합과 다동기생조합의 기생들이 무고를 비롯한 여러 정재를 춤추었으며, 이후 기생조합과 권번의 기생은 정재의 전승자로서 극장에서 무고를 공연했다. 현대에는 국립국악원을 주축으로 무대화하여 전승하고 있다.
○내용 『고려사』「악지」에서는 무고를 “춤의 변화가 많아서 마치 쌍 나비가 훨훨 꽃을 에워싸고 감도는 듯하고, 두 용이 성내어 여의주를 다투는 듯하니, 악부(樂部)에서 최고이다”라고 평했다. 무고는 나비의 부드러운 움직임과 용의 날쌘 움직임처럼 상반된 미감을 담아낸 춤이다.
○구성
도입부에 악사가 북과 받침대 및 북채를 자리에 놓는다. 무용수가 앉아서 맨손으로 춤추다가 전개부에서 북채를 쥐고 앉아서 춤춘다. 진행부에서 무용수는 일어나 북 주위에서 춤을 추다가 북을 치면서 춤추는 점층적 전개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종결부에서 무용수가 절을 하고 나간다. 20세기 초반 이왕직아악부 시절까지도 춤의 시작과 끝에 절을 하였으나, 현재는 무용수가 절을 하지 않는다.
○구조
고려시대에는 북 한 개에 무용수 두 명이 한 쌍을 이루어 춤추었으나, 조선 전기에는 연향에 따라 무용수와 북의 수가 다양하게 나타난다. 북 여덟 개에 무용수 여덟 명이 출연하기도 했고, 북 네 개에 무용수 네 명, 북 한 개에 무용수 두 명이 배정된 경우도 있었다.
조선 후기에는 연향에 따라 무용수가 네 명부터 열여섯 명까지 다양하게 구성되었다. 무용수의 수와 관계없이 북은 대개 한 개로 고정되었으며 북을 두 개 놓는 〈쌍무고〉가 드물게 있었다. 북을 치는 무용수는 원무(元舞)로, 그 곁에서 춤추는 무용수를 협무(挾舞)로 구분 짓기도 했다. 협무가 꽃을 들고 추는 형태는 20세기 초반 이왕직아악부 시절부터 등장했다.
○주요 춤사위
각종 의궤에서 공통적으로 “각자 북채를 잡고 음악의 절차에 따라 북을 치면서 춤춘다”라고 했듯이, 무고의 주요 춤사위는 북을 치면서 추는 춤이다[격고이무(擊鼓而舞)]. 『악학궤범(樂學軌範)』(1493)에는 무용수 전체가 왼쪽으로 북의 주위를 크게 돌면서 북을 치는[回舞擊鼓] 춤사위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그림이 수록되어 있다.
긴 역사를 지닌 무고는 창사가 시대에 따라 몇 차례 바뀌었다. 고려에서 조선 중종대까지는 한글 창사인 〈정읍사(井邑詞)〉를 노래했다. “달님이시어 높이높이 돋으시어( 노피곰 도샤)”로 시작되는 〈정읍사〉는 환한 달빛이 먼 길을 떠난 남편을 밝혀주고, 남편이 위험한 상황에서도 무사히 돌아오기 바라는 아내의 마음을 담은 노래이다. 중종대에는 〈오관산(五冠山)〉으로 바뀌는데, 나무로 깎은 닭이 꼬끼오 하고 울때야 비로소 어머니께서 늙으시라는 효자 문충(文忠)의 노래이다. 무고의 창사는 순조대에 다시 바뀐다. 1829년에 순조의 40세 생일을 맞아 효명세자(孝明世子, 1809∼1830)는 무고 창사를 지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원무 창사]
鏤月爲歌扇, 裁雲作舞衣.
누월위가선, 재운작무의.
因風回雪影, 還似燕雙飛.
인풍회설영, 환사연쌍비.
[협무 창사
寶箏瓊瓊曲, 羯鼓花奴腔.
보쟁경경곡, 갈고화노강.
永新歌宛轉, 蠻舞一雙雙.
영신가완전, 만무일쌍쌍.
[원무 창사]
달을 조각해 노래 부채를 만들고
구름을 잘라 춤추는 옷을 지었구나.
바람에 눈송이처럼 돌더니
이내 제비처럼 쌍을 지어 나는구나.
[협무 창사]
쟁(箏)은 산뜻하고 맑은 가락을 타고
갈고(羯鼓)는 화노(花奴, 여남왕 이진)의 곡을 치네.
고울사, 영신(永新, 歌妓의 이름)의 노랫소리에
쌍쌍이 소만(小蠻, 舞妓의 이름)의 춤을 추네.
- 원문출처: 김천흥, 『정재무도홀기 창사보1』번역: 강명관
반주음악은 『고려사』에 〈정읍악〉로 명시되어 있고, 조선 전기 『악학궤범』에는 정읍 만기-중기-급기로 세분화되었다. 무고는 악사의 장구와 무용수의 북소리가 함께 어우러지는 음악적 특징이 있다. 가장 느린 〈정읍만기〉에서는 장구의 북편과 채편을 모두 치는 쌍성과 장구의 북편을 치는 소리에 따라 무용수가 북을 쳤다. 조금 빨라지는 〈정읍중기〉에는 장구 북편 소리에만 무용수가 북을 치고, 가장 빠른 〈정읍급기〉로 넘어가면 박자를 걸러서 악사가 박을 쳤다. 조선 후기 연향 의궤와 『정재무도홀기』에서 무고의 반주음악은 주로 〈향당교주〉였으며, 그 밖에 〈정읍만기〉, 〈여민락〉과 〈보허자〉가 반주음악으로 쓰이기도 했다. 현재는 〈무고〉의 반주로 〈삼현도드리〉, 〈염불도드리〉, 〈빠른도드리〉, 〈타령〉을 연주한다.
여령 복식의 특징은 기본 의상에 긴 조끼 형태의 쾌자를 사방색으로 만들어 덧입었다는 점이다. 헌종 『(무신)진찬의궤』(1848)「공령」에 따르면, 〈무고〉 여령 복식은 화관(花冠)을 쓰고, 상의로 황초단삼(黃綃單衫)을 입고, 청(靑)ㆍ홍(紅)ㆍ흑(黑)ㆍ백(白) 쾌자[掛子]를 착용했다. 하의로 안에 남색상(藍色裳)을, 겉에 홍초상(紅綃裳)을 입고, 홍단금루수대(紅緞金縷繡帶)를 두르고, 오색한삼(五色汗衫)을 끼고 초록혜(草綠鞋)를 신었다.
무고 무동의 복식은 순조 『(기축)진찬의궤』(1829)「공령」에서 남질홍선상(藍質紅縇裳)과 홍단령(紅團領)을 입고 꽃을 그린 방포(方補)로 장식했다.
무구인 북은 ‘무고(舞鼓)’라는 동일한 명칭으로도 불렸다. 조선 전기에 북이 여덟 개, 네 개가 배정되었을 때는 동쪽-청색, 남쪽-적색, 서쪽-백색, 북쪽-흑색으로 북에 색깔 원을 그려 사방을 상징했다.
무고는 고려 시대부터 지속적으로 공연되었던 향악정재로서, 북소리에서 나오는 청각적 효과가 두드러졌으며 변화무쌍한 춤으로 인식되었다. 부드러운 기운은 봄을 재촉하는 듯하고, 빠르기는 적을 쫓듯 하는 다양함을 갖춘 춤이다. 궁중뿐만 아니라 전국 관아에서 광범위하게 향유된 춤으로서 의미가 크다. 또한 시대적 요청을 담은 무고 창사의 변화를 통해 정재의 역사성을 보여준다는데 의의가 있다.
국립국악원, 『궁중무용무보: 3집』, 국립국악원, 1988. 이흥구ㆍ손경순, 『한국궁중무용총서: 3집』, 보고사, 2009. 조경아, 「무고 정재의 가무악 요소에 담긴 의미와 그 역사성」, 『한국무용사학』 13, 2012. 조경아, 「조선후기 의궤를 통해 본 정재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9.
조경아(趙京兒)