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용(處容), 적용(賊容), 오방처용무(五方處容舞), 처용희(處容戲), 봉황음(鳳凰吟)
신라의 처용 설화에 기원을 둔 향악정재의 하나로, 다섯 명의 무용수가 처용 가면을 쓰고 추는 춤
신라 헌강왕 때 발생한 것으로 전해진다. 조선 시대부터 현재까지 다섯 명의 무용수가 처용 가면을 쓰고, 오색(청ㆍ적ㆍ황ㆍ흑ㆍ백색)의 복식을 입고, 동ㆍ서ㆍ남ㆍ북ㆍ중앙의 오방위나 큰 원을 구성하며 추는 춤이다. 매년 연말에 역신(疫神; 전염병을 옮기는 신)을 물리치기 위한 나례(儺禮) 때 오방처용무를 추었으며, 궁중이나 관아의 잔치 때에도 추었다. 오행(五行) 사상을 춤으로 표현하였다.
처용무는 동해 용의 일곱 아들 중 하나인 처용이 자신의 아내를 탐한 역신을 춤과 노래로써 굴복시키자 처용의 인자함과 너그러움에 감격한 역신은 앞으로 처용의 그림을 문에 붙여두면 그곳에는 절대 들어가지 않겠다고 약속했다는 신라 시대 이야기에서 유래한 춤이다. 사람들은 처용의 모습을 그려서 문에 붙여두면 나쁜 일을 막고, 좋은 일이 생긴다고 여겼다.
성현(成俔, 1439~1504)의 『용재총화(慵齋叢話)』(1525)에 따르면, 처음에는 한 사람이 검정색 베옷[흑포(黑布)]을 입고 사모(紗帽)를 머리에 쓰고 추던 춤이었는데, 뒤에 오방처용무가 되었다고 하였다.
조선 초 세종(世宗, 1397~1450, 재위 1418~1450)은 처용무 음악에 조선 왕조를 찬미하고 태평성세를 기원하며 송축하는 새로운 가사를 붙여 〈봉황음(鳳凰吟)〉이라고 이름 지었다. 이로 인해 처용무는 궁중에서 연행하는 바른 악[정악(正樂)]으로 인식되었다. 또 세조(世祖, 1417~1468, 재위 1455~1468)는 <학무(鶴舞)>와 <연화대(蓮花臺)>, 처용무를 함께 공연하는 <학연화대처용무 합설>로 구성과 인원을 확대하였다.
『악학궤범(樂學軌範)』(1493)에 의하면, 처용무는 매년 연말에 역신을 쫓아내는 행사의식인 나례 때 추었다. 창경궁(昌慶宮)에서는 <학연화대처용무 합설>을 추었고, 창덕궁(昌德宮)에서는 처용무를 추었다. 이때, 민간에서는 이른 새벽에 대문과 창문에 처용 그림을 붙여서 역귀를 쫓았다. 조선 후기 궁중 연향에서의 처용무는 주로 잔치가 끝날 무렵에 추었다. 철종(哲宗) 8년(1857)의 궁중 연향 때도 처용무를 추었으나, 고종(高宗) 때에는 궁중 연향에서 춤춘 기록이 없다. 다만, 『고종실록』 42권(1902년(고종 39) 5월 27일)에 70~80세 노인 신하들을 위로하고 대우하는 기로소(耆老所) 잔치를 베풀 때, 고종이 전례에 따라 처용무가 포함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한 기록이 전할 뿐이다.
1922년 말 순종(純宗) 50세(1923) 탄신 경축 공연을 위해 이왕직아악부(李王職雅樂部)의 이수경(李壽卿, 1882~1955)이 체격이 건장한 아악생 및 아악수들에게 처용무를 전수하여 재현하였다. 광복 후 국립국악원을 설립하고 주도한 이왕직아악부 출신 원로 사범들에 의해 처용무가 국가무형문화재(1971)로 지정되었고, 2009년에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현재, 국립국악원과 (사)국가무형문화재 처용무보존회에서 보존 전승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처용무는 다섯 명의 무용수가 오색(청ㆍ적ㆍ황ㆍ흑ㆍ백색)의 복식을 입고, 음양오행(陰陽五行) 사상에 따른 자연 만물의 변화 모습을 춤에 접목한 것이 특징적이다. 청색은 봄의 기운(氣運)을, 적색(홍색)은 여름, 백색은 가을, 흑색은 겨울의 기운을 사상적으로 표현하였다. 또 황색은 봄ㆍ여름ㆍ가을ㆍ겨울을 모두 주관하는 대지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믿었다. 한편 인간 사회적 면에서 청색은 백성, 적색은 일(사업), 백색은 신하, 흑색은 재물, 그리고 황색은 그들을 모두 총괄하는 임금이라고 여겼다. 예를 들면, 처용무의 일렬작대무(一列作隊舞)는 처용 다섯 명이 처음 등장하여 일렬로 나란히 늘어선 모습이다.
이때 청색(백성), 적색(사업), 황색(임금), 흑색(재물), 백색(신하)의 순서로 나란히 선다. 보통 오행의 상생 관계로만 본다면 청ㆍ적ㆍ황색 다음에 백색이 놓이고 그 다음에 흑색이 놓이지만, 조선 전기부터 처용무의 일렬작대는 사회 신분적 특성을 표현하도록 나열되었다. 이는 임금에 의해 다스려지는 유교적 사회원리를 상징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현재의 오방처용무 대형 구성은 일렬작대→사우작대→우선회무→일렬작대→오방작대→좌선회무→일렬작대로 진행된다. 주요 춤 동작은 무릎디피무, 발바디 입무(入舞), 수양수(垂揚手) 무릎디피무, 수양수 오방무 등이다.
『악학궤범』에 전하는 처용무 창사는 「처용가(봉황음)」 3기와 「진작(眞勺)」 3기, 「정읍(井邑)」 급기, 「북전(北殿)」 급기의 순서로 연주되고 노래 불렀다. 하지만 조선 후기 궁중 연향에서는 이들 노래를 하지 않았다. 현재는 「처용가」 1절의 첫 구절인 “신라성대소성대(新羅盛代昭盛代)”를 가곡 〈언락(言樂)〉선율에 얹어 노래하고, 2절의 첫 구절인 “산하천리국(山河千里國)에”를 〈편락(編樂)〉으로 노래하고 있다.
[창사](언락)
신라성대소성대(新羅盛代昭盛大)
천하태평라후덕처용(天下太平羅候德處容)아바
이시인생(以是人生)애 상불어(相不語)시란
이시인생(以是人生)애 상불어(相不語)시란
삼재팔난(三災八難)이
일시소멸(一時消滅)샷다.
신라 성대(盛代) 밝은 성대의
천하태평 나후덕(羅候德) 처용아비여!
이시인생(以是人生)에 서로 말하지 아니하실진대
이시인생(以是人生)에 서로 말하지 아니하실진대
삼재(三災)와 팔난(八難)이
일시에 소멸하도다.
[창사](우편/편락)
산하천리국(山河千里國)에
가기(佳氣) 울총총(鬱葱葱)샷다
금전구중(金殿九重)에
명일월(明日月)하시니
군신천재(君臣千載)에
회운룡(會雲龍)이샷다
희희서속(熙熙庶俗)
춘대상(春臺上)이늘
제제군생(濟濟群生)
수역중(壽域中)이샷다
천리 산하 이 나라에
아름다운 기운이 울창하도다.
금으로 꾸민 구중궁궐 안에서
일월 같은 밝은 덕을 밝히시고,
임금과 신하는 천재일우(千載一遇)라,
구름과 용이 모이셨도다.
화평한 백성의 풍속은
춘대(春臺, 봄 구경하는 높은 곳, 태평성대를 누리는 것을 뜻함)에 있고
수많은 뭇 백성은
장수하는 태평성세에 사는도다.
- 원문 출처: 김천흥, 『정재무도홀기 창사보1』 번역: 강명관
현재 처용무의 반주음악은 〈수제천(壽齊天)〉ㆍ〈언락〉ㆍ〈향당교주(鄕唐交奏)〉ㆍ〈세령산(細靈山)〉ㆍ〈삼현도드리[三絃還入]〉ㆍ〈편락〉ㆍ〈웃도드리〉 순으로 연주하고 있다. 전 과정 공연시간은 25분~30분 정도 소요된다. 공연의 성격에 따라 10여 분으로 짧게 축약하여 춤추기도 한다.
현재의 처용가면과 복식은 『악학궤범』을 근거로 제작하였다. 오방위를 나타내는 청ㆍ적ㆍ황ㆍ흑ㆍ백색의 웃옷[의(依)]을 입고, 안에는 소매 길이가 아주 긴 흰색 저고리[한삼(汗衫)]를 입는다. 바지[말군(襪裙)]는 청ㆍ적ㆍ흑색의 세 가지인데 오방색 웃옷에 배색으로 입는다. 바지 위에는 황초상(黃綃裳)을 입고, 오방처용의 어깨에는 천의(天衣)를 드리운다. 조선 시대에는 길경(吉慶)으로 허리를 묶고 장식했으나, 현재는 착용하지 않으며, 홍정대(紅鞓帶)를 두른다. 사모(紗帽)에는 모란꽃, 복숭아 열매, 복숭아 나뭇가지로 장식하고, 양쪽 귀에 귀고리를 단 처용가면에 사모가 부착된 모습이다.
처용무는 후기 신라로부터 현재까지 1100여 년을 이어 온 유구한 전통춤이다. 처용가면과 복식을 통해 동양의 음양오행 사상과 정서를 표현하는 세계적으로 인정된 고유의 문화유산이다.
국가무형문화재(1971),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2009)
『삼국유사(三國遺事)』 『악학궤범(樂學軌範)』 『용재총화(慵齋叢話)』 김용, 『국가무형문화재 전승자 구술 자서전: 처용무 김용』, 국립무형유산원, 2018. 이흥구 글, 이상윤 사진, 『중요무형문화재 제39호 처용무』, 문화재청, 2000. 처용무보존회 편, 『처용무보』, 중요무형문화재 제39호 처용무보존회, 2008.
이종숙(李鍾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