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울을 양손에 매달고, 그 방울을 울리면서 신선의 방울소리를 연상하 듯 추는 춤
조선 후기 궁중과 관아의 연향 때 추던 향악정재의 하나이다. 쇠방울[金鈴]을 양손에 나누어 묶어 매달고 음악에 맞추어서 방울을 울리며, 또 노래하면서 추는 춤이다. 지방 관아에서는 방울의 ‘쟁강’거리는 소리로 인해 <쟁강춤>이라고 불렀다. <향령무>라는 이름은 1848년 무신진찬(戊申進饌) 때 연행하기 위해, 헌종(憲宗)이 그 가사를 한문으로 새로 지었는데, 그 내용을 기초한 명칭이다. 국립국악원에서는 헌종이 창제한 가사의 춤을 계승하고 있다.
<향령무>가 궁중에 처음 유입되어 연행된 것은 1828년 6월 1일 연경당(演慶堂) 진작 때이다. 1828년 무자(戊子) 『진작의궤』에 의하면, 6명의 무동(舞童)이 품(品)자 형태로 벌려 서서 각각 10개의 방울을 양손의 손가락에 나누어서 매달고, 음악 박자에 맞추어서 손뼉 치고[抃], 돌리고[轉], 흔들며[搖] 방울 소리를 울리며 춤춘다고 하였다.
이후 1848년 헌종 무신(戊申) 진찬 때에는 4명의 여령(女伶)이 <향령무>를 추었다. 고종조에는 궁중 진찬 및 진연이 있을 때마다 <향령무>를 연행했다. 6명의 무동 혹은 여령이 헌종의 어제(御製: 임금이 지은 글) 창사인 <무두사(務頭詞)>, <중박사(中拍詞)>, <미후사(尾後詞)>를 노래하며 춤추었다.
하항(河沆, 1538~1590)의 『각재집(覺齋集)』에는 진주(晉州) 근방 원당동(元堂洞)에서 베풀어진 수연(壽筵) 때, 진주교방 관기(官妓) 40명, 동기 14명이 잔치에 파견되어 <쟁공>, <처용(處容)>, <선악(船樂)> 등의 춤을 추었다고 하였다. 이 기록을 통해, <쟁공>은 이미 16세기 말 교방 기녀들이 추던 춤임을 알 수 있다. 이후 19세기 문헌에서는 <쟁공무>, <쟁강무>, <쟁무> 등으로 불리며 평양, 황주, 한양 등지에서 연행된 기록을 볼 수 있다. 그중 1828년 연경당 진작 때 궁중에 처음 유입되었고, 헌종의 어제 창사가 지어진 1848년 이래 고종조까지 궁중에서 활발히 전승되었다.
일제강점기 <향령무>는 1920년대부터 이왕직아악부의 아악사 이수경(李壽卿, 1882~1955)에 의해 재연‧전수되었다. 1931년 아악생 출신 무동 6명이 춤춘 <향령무> 기록영상이 ‘조선무악(朝鮮舞樂)’으로 전하고 있다. 현재는 국립국악원에서 재정비하여 무대화 한 <향령무>가 전승되고 있다.
〈향령무〉는 무용수 6인이 2명씩 3대로 나뉘어 품(品)자의 형태로 벌려 서서, 양손에 쥔 방울을 울리면서 추는 춤이다. 가곡 〈계락〉 반주에 맞추어서 〈무두사〉, 〈중박사〉, 〈미후사〉를 노래하는데, 방울을 울리며 연주하는 행위가 곧 춤동작을 이룬다. 品 대형에서 무릎을 꿇거나 동‧서‧북향으로 방향을 바꾸어 가며, 방울 소리와 함께 노래하며 춤추는 단조로운 구성이다. 춤동작으로는 염수족도(斂手足蹈), 척요(尺腰)가 있으며, 좌타장(左打場), 우타장(右打場), 좌정수(左呈手), 우정수(右呈手), 합정수(合呈手), 수수쌍불(垂手雙拂) 등은 방울을 울리는 방법의 손동작이다
현재의 〈향령무〉 창사는 헌종이 1848년 당시 대왕대비인 순조(純祖)의 비 순원왕후(純元王后)의 육순(六旬: 60세)과 왕대비인 익종(翼宗)의 비 신정왕후(神貞王后)의 망오(望五: 41세)를 축하하는 진찬례를 위해 새로 지은 한문 가사이다. 무신(戊申) 『진찬의궤(進饌儀軌)』의 「악장(樂章)」조에 〈향령〉의 창사 〈무두사〉, 〈중박사〉, 〈미후사〉가 3편 실려있다.
〈무두사〉는 잔치가 열린 궁전에 신선(神仙)들이 내려와서 두 왕모를 위해 장수를 기원한다는 내용이다. 〈중박사〉는 신선이 산다는 요지(瑤池)로부터 방울 소리가 들리고, 전설의 선녀 비경(飛瓊)이 춤추는 가운데 신령한 방울 소리 울리며 신선의 수레가 달려온다는 내용이다. 〈미후사〉는 군왕인 헌종이 옛날 초(楚)나라의 노래자(老萊子)처럼 깊은 효심으로 두 왕모의 만수를 매년 축원한다는 내용의 노래이다. 현재는 〈무두사〉 1곡만 여창가곡으로 연주하고 있다.
〈향령무〉 복식은 의궤를 통해 볼 수 있는데, 무동과 여령의 것이 각각 정해져 있었다.
1828년 6월 1일 진작의 〈향령무〉 무동복식은 아광모(砑光帽)를 머리에 쓰고, 녹라포(綠羅袍)‧백질흑선중단의(白質黑縇中單衣)‧홍질남선상(紅質藍縇裳)‧홍한삼(紅汗衫)‧학정대(鶴頂帶)‧무우리(無憂履)를 착용했다. 고종조 1892년, 1901년, 1902년의 외진연시 무동은 화관(花冠)‧홍화주의(紅禾紬衣)‧홍화주상(紅禾紬裳)‧백단의(白單衣)‧홍남야대(紅藍也帶)를 착용하였다.
정재여령 복식은 1848년부터 1892년 임진년 진찬 시까지 머리에는 화관을 쓰고, 황초단삼(黃綃單衫)을 입는데 속에는 남색치마[藍色裳], 겉에는 홍색치마[紅綃裳]를 입고, 홍단금루수대(紅緞金縷繡帶)를 두른다고 했다. 화관의 모습이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신발은 대체로 초록혜(草綠鞋)를 신었으나 1868년에는 흑혜(黑鞋)를 신었다. 한삼은 오색한삼(五色汗衫)과 홍한삼(紅汗衫)이 번갈아 기록에 나타나는데, 대개 창사 〈미후사〉의 첫 구절에 있는 ‘자주소매[紫袖]’의 의미를 좇아 홍한삼을 착용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1901년과 1902년의 여령은 녹초단삼(綠草單衫)을 착용한 점이 이전의 여령복식과 다르다.
무구인 향령은 놋쇠[豆錫]로 만들어 매듭으로 장식했다.
한산거사, 강명관 역, 『한양가』, 신구문화사, 2008. 조경아, 「조선후기 儀軌를 통해 본 呈才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9. 김천흥 저, 하루미‧최숙희‧최해리 편집, 『심소 김천흥 선생님의 우리춤 이야기』, 민속원, 2005. 한국예술학과음악사료강독회 역주, 『국역 헌종무신진찬의궤』권1&권3,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2004&2006. 국립국악악원 편, 『궁중무용무보 제12집: 연백복지무, 향령무』, 국립국악원, 2005.
이종숙(李鍾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