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악무(鄕樂舞)
삼국 시대 이후 전래되는 한국 고유의 궁중춤
향악정재는 중국으로부터 들어온 당악정재(唐樂呈才)와 대비되는 우리나라 고유의 궁중춤이다. 삼국 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약 삼십여 종의 춤이 만들어져 전승되었으며, 궁중의 각종 잔치와 행사에서 여기와 무동(舞童)에 의해 연행되었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궁중뿐 아니라 지방 교방(敎坊)에서도 널리 추어졌다.
향악정재라는 용어는 조선 전기에 편찬된 『악학궤범(樂學軌範)』(1493)에 처음 나타난다. 현전하는 향악정재 중에 가장 유래가 오래된 〈처용무〉와 검기무는 『삼국유사(三國遺事)』와『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 각각 기원을 찾을 수 있으며, 『고려사(高麗史)』「악지(樂志)」 속악조(俗樂條)에는 〈무고〉·〈동동〉·〈무애〉 춤의 절차가 간략하게 전한다. 조선 전기에 만들어진 〈보태평〉ㆍ〈정대업〉ㆍ〈봉래의〉ㆍ〈향발무〉ㆍ〈학무〉ㆍ〈학연화대처용무 합설〉ㆍ〈교방가요〉ㆍ〈문덕곡〉과 고려의 〈무고〉ㆍ〈아박무〔동동〕〉는 『악학궤범』 권5에 전한다. 〈무애무〉는 원효대사(元曉大師, 617∼686)가 불교 포교를 위해 만든 춤으로 알려져 있다. 세종대에 불가(佛家)의 말을 쓴다는 이유로 무애 정재를 금지하였으나, 조선 후기에 새롭게 재현되어 연행되었다. 조선 초 세종 때 창제된 〈보태평〉ㆍ〈정대업〉과 〈봉래의〉는 조선 왕조를 건국한 조종(祖宗)의 문덕과 무공을 칭송하는 악무이다. 회례악으로 만들어진 〈보태평〉과 〈정대업〉은 세조 10년(1464)에 재정비하여 제례악(祭禮樂)으로 채택된 유교의식무로써 종묘제례악에 일무(佾舞)로 전승되고 있다. 매년 연말, 궁중 나례4) 의식에서 벽사진경(辟邪進慶)의 의미로 추어진 〈학연화대처용무 합설〉은 수십 명이 참여하는 대형악무이다. 신라 처용설화에 기원을 두는 〈처용무〉는 본래 한 사람이 추었으나 세조 때부터 다섯 명이 추는 오방처용무로 확대되어 전승되고 있다.
조선 후기 순조 대는 궁중무용의 황금기를 이룬 시기로, 현재 전하는 총 오십여 종의 정재 작품 중 스물세 종이 이때 창제되었다. 이 시기에 창작된 향악정재는 〈가인전목단〉ㆍ〈경풍도〉ㆍ〈고구려무〉ㆍ〈공막무〉ㆍ〈만수무〉ㆍ〈망선문〉ㆍ〈무산향〉ㆍ〈박접무〉ㆍ〈보상무〉ㆍ〈연화무〉ㆍ〈영지무〉ㆍ〈첩승무〉ㆍ〈헌천화〉ㆍ〈춘광호〉ㆍ〈춘대옥촉〉ㆍ〈춘앵전〉ㆍ〈침향춘〉ㆍ〈향령무〉ㆍ〈사선무〉 등 열아홉 종이고, 당악정재는 〈최화무〉ㆍ〈제수창〉〈장생보연지무〉ㆍ〈연백복지무〉 등 네 종이다.
1828년(무자, 순조 28)은 순원왕후(純元王后, 1789~1857)의 40세 생신 경축 진작(進爵)28)이 창덕궁에서 열렸고, 이듬해인 1829년(기축, 순조 29)에는 순조의 탄신 40주년 및 즉위 30년 경축 진찬(進饌)이 창경궁에서 베풀어졌다. 당시 대리청정(代理聽政)을 하던 효명세자(孝明世子, 1809~1830)는 열일곱 종의 정재 창사를 직접 지었다. 헌종(憲宗)대에는 1848년(무신, 헌종 14) 진찬 때에 지방 관아에서 연행되던 〈관동무〉가 궁중에 유입되어 새롭게 선보였다.
이밖에 지방에서 궁중으로 유입된 작품으로는 〈사자무〉ㆍ〈항장무〉와 〈검기무〉ㆍ〈선유락〉 등이 있다. 평남 선천 지방 특유의 〈항장무〉는 1873년(계유, 고종 10)에 궁중에 들어 왔다고 알려져 있고, 평남 성천 지역의 잡극인 〈사자무〉와 함께 『사자무항장무무도홀기(獅子舞項莊舞舞圖笏記)』(1887년, 정해년, 고종 24)에 수록되어 있다. 〈항장무〉는 중국 초한 시대 항우와 유방의 ‘홍문연 이야기’를 무극화(舞劇化)한 것으로, 선천 교방의 향기(鄕妓)들을 궁중으로 직접 불러올려 연행하기도 하였다.
조선 중기와 후기에는 지방 관아에 소속된 교방 여기들을 뽑아 궁중 연향에 참여시킨 뒤 돌려보내는 선상기(選上妓) 제도가 성행하였다. 귀향한 선상기들은 지역에 궁중 악무를 전파하는 매개 역할을 하여 궁중뿐 아니라 전국 각 교방에서 정재가 추어지게 되는데, 이와 관련된 사례가 조선후기 풍속화인〈평안감사환영도〉와 정현석(鄭顯奭, 1817∼1899)의 『교방가요(敎坊歌謠)』(1865)외 여러 문헌에 전한다. 특히 『교방가요』에는 진주 교방에서 〈선악〔선유락〕〉ㆍ〈고무〔무고〕〉ㆍ〈검기무〉ㆍ〈항장무〉 등 여러 작품이 삼현육각 반주로 추어진 사례가 소개되어 있다. 한편 신라 때부터 전하나 정조대에 궁중으로 유입된 〈선유락〉, 전국에서 폭넓게 추어지던 〈검기무〉 및 검무 계열의 〈공막무〉ㆍ〈첨수무〉 외 〈광수무〉ㆍ〈초무〉도 향악정재에 속한다.
1909년 관기(官妓) 제도가 폐지되고 1910년 일제에 의해 궁중의 악무기관인 장악원이 이왕직아악부(李王職雅樂部)로 축소되면서, 민간으로 흩어진 여기와 악사들이 조합(권번)을 형성하여 궁중악무의 맥을 잇게 되었다. 1923년 순종황제 탄신 50주년 경축연에는 향악정재 〈가인전목단〉ㆍ〈무고〉ㆍ〈보상무〉ㆍ〈춘앵전〉ㆍ〈처용무〉와 당악정재 〈장생보연지무〉ㆍ〈연백복지무〉ㆍ〈포구락〉ㆍ〈수연장〉등 아홉 종의 무동정재가 추어졌으며, 1931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촬영된《조선무악》에는 〈봉래의〉ㆍ〈무고〉ㆍ〈보상무〉 외 당악정재가 전한다. 오늘날 대부분의 향악정재는 국립국악원을 중심으로 재현ㆍ전승되고 있으나 〈관동무〉는 아직 무보(舞譜)가 발견되지 않아 재현되지 못했다.
고려 시대 〈무고〉에는 정읍사(井邑詞), 〈동동〉에는 동동사(動動詞), 〈처용무〉의 처용가(處容歌) 등 국문 창사가 『악학궤범』에 전한다. 조선 후기에는 효명세자가 한시로 지은 악장을 노래하면서 창사가 오언 또는 칠언절구의 한문 가사로 바뀌었다. 〈무애무〉는 불교 포교를 위한 춤으로 불교의 말과 방언이 많아 당시에 싣지 않았으나 조선 후기에 군왕을 송축하는 내용의 국한문 가사로 새롭게 재현되었다. 조선 초기에 창제된 〈보태평〉ㆍ〈정대업〉ㆍ〈봉래의〉는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공을 기리고 태조의 4대조와 태조, 태종의 문덕과 무공을 찬양하는 악장을 노래하며 춤을 춘다. 〈학연화대처용무합설〉에는 영산회상불보살ㆍ 미타찬ㆍ 본사찬ㆍ 관음찬 등의 불교 가사가 섞어 있는데,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는 조선 왕실에서 이와 같은 창사를 부른 것은 이색적이다. 검무 계열의 춤인 〈검기무〉ㆍ〈공막무〉ㆍ〈첨수무〉 외에 〈초무〉, 또 동물의 움직임을 모방한 〈사자무〉에는 창사가 없는 반면, 〈문덕곡〉은 태조의 문덕(文德)을 칭송하는 노래가 중심이 되는 정재이다. 조선 후기에 창작된 향악정재 대부분은 한문으로 된 시를 노래하여 향악정재의 특징이 사라지고 점차 향악ㆍ당악의 구분이 없어지게 되었다.
고려 〈동동〉의 반주곡인 〈정읍〉은 조선 후기까지 전승되었으나 조선 후기에는 정재 반주로 〈향당교주〉<.a>ㆍ〈보허자령〉ㆍ〈여민락령〉이 주로 연주되었고 민간 음악인 가곡의 〈농(弄)〉ㆍ〈계락〉ㆍ〈편락〉도 사용되었다. 〈선유락〉ㆍ〈항장무〉에서는 〈대취타〉를 연주한다. 조선 후기에는 장수와 복덕을 기리는 뜻을 추가한 〈유초신지곡(柳初新之曲)〉ㆍ〈경풍년지곡(慶豐年之曲)〉과 같은 다양한 아명(雅名)이 사용된 것도 이 시기 반주음악 특징 중 하나이다.
고려시대 여기는 붉은 옷으로 단장(丹粧)하였으며, 조선 전기의 여기 복식은 연향의 종류에 따라 조금씩 달랐다. 모든 예연(禮宴)에서 여기(염발기)는 단장(丹粧/단의)에 백말군(白襪裙)ㆍ보로(甫老/裳)를 입고 홍대(紅帶)를 두르며, 머리에 수화(首花) 와 칠보잠(七寶簪)ㆍ금차(金釵)를 꽂고 단혜아(段鞋兒)를 신었다. 나이어린 여기(年少妓/피발기)는 머리장식 중에 금차를 빼고, 칠보 대요(臺腰)를 쓰고 자흑색 비단의 수사지(首沙只:유소의 속칭)를 드리우는 것만 다르다.
곡연(曲宴), 무과전시(武科殿試), 관사(觀射), 관나(觀儺), 사신동궁연 이하 각 연향, 주봉배(晝奉杯), 유관(遊觀), 사악(賜樂), 예조후대왜연(禮曹厚待倭宴)에서는 여기가 흑장삼(黑長衫)ㆍ남저고리(藍赤古里)ㆍ백말군ㆍ홍대를 착용하고 머리에 칠보잠ㆍ금차를 꽂고 단혜아를 신는다. 나이 어린 여기는 금차를 빼고 칠보 대요와 수사지를 꽂고 남단대(藍段帶)를 두르는 것만 다르다. 이외에 예조왜야인연(禮曺倭野人宴)에서는 여기가 상복(常服)을 착용한다. 상세 내용은『악학궤범』권 2와 권9에 전한다.
조선 후기 여기의 기본복식은 화관(花冠)을 쓰고 황초단삼(黃綃單衫/또는 녹초단삼)에, 속은 남치마〔裏藍色裳〕 겉은 홍치마〔表紅綃裳〕를 입고 홍단금루수대(紅緞金縷繡帶)를 매고 오색한삼(五色汗衫)에 초록혜(草綠鞋)를 신었다. 이외의 여기 및 무동 복식은 그 작품에 맞는 복식을 착용하였음이 각『의궤』에 전한다. (작품별 설명 참조)
종묘제례악: 국가무형문화재(1964) 학무: 국가무형문화재(1971) 처용무: 국가무형문화재(1971) 학연화대합설무: 국가무형문화재(1971) 처용무: 유네스코 인류 무형유산(2009)
〈공막무〉ㆍ〈망선문〉ㆍ〈영지무〉ㆍ〈춘광호〉ㆍ〈춘대옥촉〉ㆍ〈연화무〉ㆍ〈광수무〉는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된 홀기(笏記)가 발견되어 1994년『정재무도홀기』로 출간하면서 비로소 재현되었다.
『고려사』 『교방가요』 『악학궤범』 『(무자)진작의궤』 『(기축)진찬의궤』 국립국악원, 『한국음악학자료총서 제4집: 시용무보, 정재무도홀기』,국립국악원, 1980. 정신문화연구원, 『정재무도홀기』,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4. 조경아, 「순조대 정재 창작양상」, 『한국음악사학보』 31, 2003.
심숙경(沈淑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