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연화대무〉
고려시대부터 전래된 〈학무〉와 〈연화대〉 정재를 차례대로 합설하여 추는 춤
학연화대합설무는 학 형상의 의상을 착용한 학이 연못[지당(池塘)] 주위에서 〈학무〉를 추다가 부리로 연꽃을 쪼아 연꽃 속에서 두 동녀를 나오게 하여 〈연화대 〉를 추는 춤이다. 〈학무〉ㆍ〈연화대〉 등 개별 작품들을 하나로 엮어 선계와 현실의 소통과 순환 과정을 춤으로 표현하고, 벽사진경과 태평성세에 대한 신념을 입체적으로 확대하여 미학적으로 구현한 작품이다.
고려시대 문신 최자(崔滋, 1188~1260)의 「복차운(復次韻)」에 “저렇게 학의 주둥이로 연꽃 봉우릴 쪼개누나 / 應煩鶴觜拆蓮窠”라는 대목이 있는 것으로 보아 〈학무〉와 〈연화대〉가 합설로 춘 것은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악학궤범(樂學軌範)』(1493) 권3 『고려사』「악지」 당악정재 항목의 〈연화대〉 춤 말미에는 “연꽃 속에 숨어 있던 동녀가 꽃이 터진 후에 나타난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학무〉는 청렴과 장생을 상징하고 상생과 화합의 정신을 담고 있으며, 〈연화대〉는 중국의 자지무(柘枝舞)에 연원을 두고 나라의 어진 정치를 칭송하는 「미신사(微臣詞)」 내용을 주제로 삼고 있다.
궁중 연향에서는 〈학연화대처용무합설(鶴蓮花臺處容舞合設)〉과는 달리, 학연화대합설무(鶴蓮花臺合設舞)라는 명칭을 공식적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다만 궁중에서 정재(呈才: 춤)가 추어지는 것은 매 작(酌) 때마다 즉, 임금에게 술 혹은 탕[국]을 올릴 때인데, 당시에는 〈학무〉와 〈연화대〉라는 각자의 독립된 정재 명칭을 사용하면서 독립적으로 추기도 하고, 두 정재를 연이어 추기도 하였다. 〈학무〉와 〈연화대〉가 합설로 추어진 기록은 조선왕조실록과 각종 의궤의 의주(儀註)를 통해 임금이 부묘(祔廟)를 마친 뒤 환궁 할 때나 궁중의 여러 잔치 때 여령(女伶) 정재 또는 무동(舞童) 정재로 설행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후기부터는 내연과 외연 때 기녀들의 종목 중 하나로 〈학무〉와 〈연화대〉를 합설로 설행하였고, 조선 후기 지방 관아의 교방(敎坊)과 일제강점기에는 〈학무〉와 〈연화대〉가 독자적으로 연행되었다.
현대에는 1970년대까지 한영숙(韓英淑, 1920~1989)에 의해 민속 〈학무〉로 전승되다가〈학무〉와 〈연화대〉가 궁중에서 연이어 춘 기록이 밝혀져 1993년에 학연화대합설무로 개칭되면서 학연화대합설무라는 명칭을 공식적으로 사용하였다. 당시의 학연화대합설무 내용은 『정재무도홀기(呈才舞圖笏記)』를 바탕으로 현재의 무대 상황에 맞게 무대예술화 한 것으로, 문헌[고무보] 내용과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당시 재현된 〈학무〉는 『궁중무용무보』제2집에, 〈연화대〉는『궁중무용무보』제8집에 전하는데, 현재에는 공연의 성격에 따라 다양한 내용으로 변화를 주어 추고 있다. 현재는 (사)국가무형문화재 학연화대합설무보존회에서 보존 전승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학연화대합설무는 크게〈학무〉와 〈연화대〉 두 가지로 구성된다. 〈학무〉는 연못[지당판(池塘板)]을 중심으로 ‘북향(北向)’과 ‘지당(池塘)’을 바라보며 학의 일상적인 형상을 지으며 춤을 추고, 〈연화대〉는 연꽃 술로 태어난 어여쁜 동녀가 임금의 덕화에 감화하여 즐거움을 표현하는 춤을 춘다.
현재 추어지는 학연화대합설무는 『정재무도홀기』를 토대로 삼으면서 한영숙의 민속 〈학무〉와 융합하여 새롭게 재구성된 궁중의 〈학무〉로서, 지당판 앞[북쪽] 한 장소에서만 춤을 추고, 〈연화대〉 또한 무대예술로 재현되어 추어진다. 특히 〈연화대〉는 무대 위로 올려지면서 악사(樂師)는 두 명으로 변화되었고, 죽간자(竹竿子)의 구호(口號)나 동녀의 창사(唱詞)는 첫 소절만 부른다. 춤 또한 2005년을 기준으로 전과 후로 변화되었는데, 대표적인 예로 도약무(跳躍舞)를 들 수 있다. 2005년 이전에는 좌우 손을 각각 위로 들어 휘두르며 좌우로 돌면서 추는 춤과 왼쪽으로 빙그르르 도는 주선(周旋)을 추고, 전대[북쪽]에 선 동녀와 후대[남쪽]에 선 협무가 서로 좌우 어깨를 끼고 돌며 제자리로 돌아와 서는 환복기대이무(還復其隊而舞)로 추었다.
반면 2005년 이후에는 좌우 무용수가 두 팔을 양옆으로 펴 드는 무작(舞作)으로 서로 마주보고 뛰어[도약무(跳躍舞)] 제자리로 돌아와 서는 환복기대이무로 추는 방식으로 변화하였다.
현재 학연화대합설무에서는 〈학무〉를 출 때 창사「벽연롱효사」를 부르지 않는다. 〈연화대〉는 죽간자가 진구호(進口號)와 퇴구호(退口號)를 부르고, 동녀는「미신사(微臣詞)」를 부르는데, 모두 첫 구절만 부른다.
〈학무〉 의상은 청학(靑鶴)과 백학(白鶴)으로 구성된다. 현재의 학 의상은 『악학궤범』과 의궤 기록을 토대로 실용성 및 효율성을 고려하여 학의 머리는 대나무로 형태를 만들어 밖은 인조털로 감싸고, 안은 천으로 붙이고, 부리는 나무를 깎아 만든다. 몸체는 대나무로 만든 몸통 대신 인조털[천]로 만들고, 날개는 새 깃털 대신 천을 붙이고, 발[신]은 가죽으로 만든다. 한편, 고종(임진)진찬의궤(1892) 에 기록된 학연화대합설무를 보면,〈연화대〉의 동기는 초록단의(草綠丹衣)ㆍ홍라상(紅羅裳)ㆍ홍초말군(紅綃襪裙)을 입고, 금화홍라대(金花紅羅帶)를 띠고, 방울[금령]이 달린 연화관(蓮花冠)을 머리에 쓰고, 유소(流蘇)를 늘어뜨리고 황홍장미(黃紅薔薇)를 꽂고 진홍단혜(眞紅緞鞋)를 신은 것으로 전한다. 반면 협무는 황초단삼(黃綃丹衫)을 입고 오색한삼을 착용한다. 악사는 비란삼(緋鸞衫)을 입고, 복두(幞頭)를 쓰고, 기량대(起粱帶)를 허리에 두르고, 흑피화(黑皮靴)를 신는다. 〈연화대〉에 사용하는 무구는 연화관(蓮花冠)과 죽간자(竹竿子)가 있다.
한국의 도교 사상이 깃든 〈학무〉와 불교 사상이 깃든〈연화대〉를 합설로 추는 학연화대합설무는 군왕송축 사상을 내포하고 있으며, 궁중에서 국가의 위난(危難)과 재앙을 물리치는 벽사적 의미와 풍요를 기원하는 의미를 가진 춤이다.
학연화대합설무는 2차에 걸쳐 무형문화재로 지정받았다. 1차는 1935년 한성준이 부민관(府民館)에서 창작무용발표회에서 처음 선보인 내용을 한영숙이 백학 한 쌍이 추는 내용으로 재구성한 민속 〈학무〉가 1971년에 지정받았고, 당시의 보유자는 한영숙이다. 2차는 〈학무〉와 〈연화대〉가 궁중에서 합설로 추어진 점이 인정되어 1993년에 종목 명칭을 학연화대합설무로 변경하고, 이흥구(李興九)가 보유자로 지정되었다. 이때의 〈학무〉는 기존의 민속 〈학무〉와 궁중 〈학무〉를 융합한 새로운 내용으로 재구성되었고,〈연화대〉는 기존에 지당판[연통]없이 처음부터 대열을 지어 추었던 것에서 학이 부리로 연꽃을 터트리면 동녀가 연꽃 속에서 출현하여 추는 내용으로 재구성되었다. 학연화대합설무는 2005년을 기점으로 다시 두 가지 구조로 변화되어 추어지고 있다. 주요 변화 내용은 도약무인데, 2005년 전의 학연화대합설무는 김천흥이 재현 안무한 1993년 지정 당시의 내용이고, 2005년 후의 학연화대합설무는 이흥구의 재현 안무로서 현재 (사)학연화대합설무보존회를 중심으로 전승되고 있다.
손선숙, 『한국궁중무용사』, 보고사, 2017. 이흥구 외, 학연화대합설무, 피아, 2006. 조규익ㆍ문숙희ㆍ손선숙ㆍ성영애, 『보허자: 궁중융합예술, 그 본질과 아름다움, 민속원. 2021. 김수진, 「학연화대처용무합설의 사상적 배경에 관한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4. 손선숙, 「보허자 음악에 맞춘 성종대 〈학무〉 복원 연구」, 『한국문학과 예술』 36, 2020.
손선숙(孫善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