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화대무(蓮花臺舞)
고려 때부터 전래하여 조선 후기 지방 관아와 교방에서 추었던 춤으로, 무용수가 연꽃에서 나와 추는 춤.
고려 때부터 전승된 연화대는 연꽃에서 동녀가 나와 춤을 춘다는 내용이다. 조선 시대 지방 교방에서는 학무와 결합되어 지방 특성에 맞게 변형되었는데, 진주에서는 학 등에 올라타서 춤을 추었고 경주에서는 학과 함께 춤을 추는 내용으로 변화하였다.
연화대는 고려 때 송나라에서 들어온 당악정재로 조선조 궁중에서 꾸준히 전승되었다. 『고려(高麗史)』 「악지(樂志)」에는 연화대가 본래 탁발위(拓跋魏)에서 나왔다고 하였는데, 이는 북위(北魏)의 왕조를 세운 선비족의 한 씨족이다. 조선 전기 『악학궤범(樂學軌範)』(1493)에는 연화대를 〈학무〉 및 〈처용무〉와 함께 편성하여 〈학연화대처용무합설(鶴蓮花臺處容舞合設)〉로 추기도 하였다.
지방에서 연화대를 추기 시작한 시기는 알 수 없다. 다만 조선시대 평안도의 평양과 정주 교방, 경상도 진주와 경주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연화대를 연행하였다. 진주와 경주의 연화대는 〈학무〉와 합설로 이루어졌는데, 『교방가요(敎坊歌謠)』(1865) 연화대 항목에 〈학무〉에서도 이 춤을 춘다는 내용이 있어서 함께 연행하더라도 〈학연화대합설〉이라 부르지 않고 연화대 혹은 〈학무〉로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연화대는 일제강점기 조합과 권번의 춤 종목 중 하나로 공연하였다.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에서 다동조합과 광교조합 기생들이, 1929년 조선박람회에서는 조선권번 기생들이 연화대를 추었다. 현재 〈학연화대처용무합설〉은 국가무형문화재(1971)로 전승되고 있다.
궁중의 연화대는 죽간자를 받든 두 명, 연꽃에서 나와 춤추는 동녀 두 명, 협무 두 명으로 구성되었다. 두 동녀는 방울이 달린 모자인 합립(蛤笠)을 서로 씌워주며 춤추었다.
지방의 연화대는 〈학무〉와 합설로 이루어질 경우, 경주에서는 기녀 두 명, 백학 한 명, 소녀 한 명으로 편성하였다. 이때 백학은 오직 남자만 연행하였다. 진주 교방의 경우 동기 두 명, 백학 두 명의 총 네 명이 연행하였으며, 동기 두 명은 선동(仙童)의 역할을 맡았다.
지방의 연화대 춤 내용은 지역에 따라 차이를 보인다. 〈학무〉와 결합된 경우, 학이 먼저 나와서 춤을 추다가 연꽃으로 다가가 꽃을 터뜨려 주면 꽃 속의 동녀가 연꽃 밖으로 나와서 춤을 추는 구성이다. 경주 교방의 〈학무〉는 기녀의 춤 → 백학의 춤 → 연꽃 개화 → 학과 동녀의 춤 → 학과 동녀 퇴장 순으로 전개되었다. 1767년 박종(朴琮, 1735~1793)이 경주지역을 여행하고 이를 기록한 「동경유록(東京遊錄)」에는 열 번째 춤인 황창무(黃倡舞)가 끝나고 마지막으로 〈학무〉로 끝났다고 소개하였다. 특히〈학무〉에 대해서는, “먼저 아직 채 피지 않은 연꽃 한 떨기[나무로 만든다]를 대청 가운데 놓고 두 기녀가 나와 춤을 춘다. 조금 있다가 백학[이것은 오직 남자만 한다]이 들어와 춤을 추는데 이때 두 기녀는 물러나고 학이 홀로 춤을 추면서 부리로 연꽃의 꽃 봉우리를 쪼아서 깬다. 그러면 연꽃 가운데서 머리에 평정건(平頂巾)을 쓴 한 소녀가 나와서 학과 함께 춤을 춘다. 이윽고 학이 부리로 소녀를 몰아 나가면 이 춤은 끝이 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학무〉가 백학의 독무로 구성되고 연꽃 역시 하나를 배치하여 동녀 한 명으로 구성된 점이 궁중 및 다른 지역과도 차이를 보인다.
《평안감사향연도》의 〈연광정연회도〉 장면에는 연광정 아래에 학과 연꽃 각 한 쌍이 대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학은 황학(黃鶴)과 백학(白鶴)이고 연꽃은 동일한 모양과 색깔로 학 옆에 함께 놓여 있다. 이 점으로 보아 평양에서도 〈학무〉와 연화대가 함께 연행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교방가요』에 기록된 진주교방의 연화대 역시 〈학무〉와 결합된 형태로 연행되었다. 연꽃 두 송이에 각각 한 명의 동기를 숨겨둔다. 백학 한 쌍이 뜰에서 마주보고 춤추다가 부리로 꽃을 탁탁 쪼면 꽃 속의 선동(仙童)이 나와 학을 타고 춤을 춘다. 꽃 속에서 나오는 동기가 선동으로 설정되고 선동이 학을 타고 춤을 춘다는 점은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는 매우 이채로운 내용이다. 이 춤을 〈학무〉에도 겸하여 사용한다는 설명에서 〈학무〉와 연화대가 합설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궁중의 연화대 춤사위는 여러 가지로 다채롭다. 그러나 지방의 연화대 춤사위에 대한 기록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다만 경주에서는 동녀가 평정건(平頂巾)을 쓰고 진주에서는 화관(花冠)을 써서 관을 쓰는 것이 연화대의 특징임을 알 수 있다. 연화대와 합설된 〈학무〉에서는 학이 부리로 꽃봉오리를 쪼는 동작이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지방의 연화대에서 창사를 불렀는지는 알 수 없다. 궁중정재 연화대의 미신사(微臣詞)는 두 동녀가 봉래(蓬萊)에서 내려와 연꽃술로 생겨났다가 군왕의 덕화(德化)에 감격하여 가무(歌舞)로써 그 즐거움을 가져다주려고 온 것으로 되어 있다. 반면에 진주와 경주의 연화대는 학과 동녀가 춤을 춘다고만 기록되어 있어 창사를 불렀는지는 알 수 없다.
지방에서 연행된 연화대의 반주 음악에 대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다만 진주 교방의 연화대는 좌고 한 명, 장구 한 명, 대금 한 명, 피리 두 명, 해금 한 명의 삼현육각 편성으로 반주하고 있으며, 《평안감사향연도》의 〈연광정연회도〉에도 전악의 집박에 삼현육각 악대가 반주하는 모습이 담겨 있다. 이를 통해 연화대 반주 음악은 삼현육각 편성의 음악임을 알 수 있다.
지방의 연화대 복식은 궁중에 비해 소박하다. 진주 교방 연화대의 동기 두 명은 홍삼(紅衫)을 입는다고 하였는데, 그림에는 붉은 치마에 노란 저고리를 입었다. 연화대 복식에서 궁중과 지방의 공통점은 모두 머리에 모자를 썼다는 점이다. 궁중은 방울이 달린 합립(蛤笠)을 쓰는 반면, 진주에서는 화관을, 경주에서는 평정건을 썼다. 연화대의 가장 중요한 무구는 연꽃이다. 평양과 진주 교방의 연꽃은 두 개이며 궁중춤의 연꽃과 마찬가지로 분홍색 혹은 붉은색을 띤다. 진주 교방의 연꽃은 꽃만 표현된 반면, 평양 교방의 연꽃은 초록색의 꽃받침까지 갖추고 있어서 더욱 정교하게 만들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연화대에 함께 편성되는 학은 지역에 따라 편성 인원과 색깔에 차이를 보인다. 평양과 진주는 둘 다 학 두 명이 편성되었는데, 평양에서는 청학과 황학의 탈을, 진주에서는 백학의 탈을 썼다. 경주에서는 백학 한 명이 편성되었다. 평양과 진주 둘 다 정수리가 붉고 깃털 끝이 검은 단정학의 모습이다. 궁중의 연화대에 사용하는 의물인 죽간자는 지방의 경우 생략된 것으로 보인다.
지방에서 연화대는 〈학무〉와 결합되며 지역적 특성을 반영한 형태로 변화하였다. 진주 교방의 연화대는 연꽃에서 나온 동기가 학 등에 올라 타 춤을 춘다는 점이 특징이고, 경주 교방은 학과 동기가 함께 춤을 춘다는 점이 특이하다. 엄격한 궁중춤과는 달리, 〈학무〉와 연화대가 결합되면서 나타나는 변이 양상은 지방문화의 다양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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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자(金恩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