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부터 전해지는 향악정재의 하나로, 학(鶴) 모양의 탈과 복식을 착용하고 학의 모습을 표현하며 추는 춤
고려 시대부터 현재까지 전승되어 온 향악정재이다. 학이 연못[지당판]에 핀 꽃을 귀히 여겨 그 주위를 맴돌고 날아다니며 북쪽과 지당을 바라보고 학 형상을 지으며 춤을 추다가, 부리로 연꽃을 쪼아 터트리면 동녀 두 명이 나타나자 깜짝 놀라 뛰어 물러나는 행위를 표현한 춤이다.
학무가 추어진 기록은 조선 전기 『악학궤범(樂學軌範)』(1493)에 보인다. 학무를 고려 시대부터 추어진 춤으로 보는 근거는 『고려사(高麗史)』「악지(樂志)」의 〈연화대(蓮花臺)〉정재 주(註)에 연꽃이 터지는 대목에서 학이 그 연꽃을 터트린다는 내용이 『악학궤범』의 학무 내용 중에 학이 부리로 연꽃을 쪼아[탁개(啄開)] 동녀가 일어선다는 내용과 서로 상통한다는 점이다.
학무의 춤 내용은 시대별(조선 전기-조선 후기)로 변화하지 않았다. 다만 조선 전기에는 「벽연롱효사(碧烟籠曉詞)」노랫말에 맞추어 가무악 융합적 형식으로 추었으나, 조선 후기에는 노랫말이 사라지고 〈보허자(步虛子)〉 혹은 〈향당교주(鄕唐交奏)〉〈연화대〉 및 〈처용무〉와 합설로도 추었는데, 악학궤범ㆍ용재총화(慵齋叢話)(1525)ㆍ『조선왕조실록』ㆍ『정재무도홀기(呈才舞圖笏記)』그리고 고종 (임진)진찬의궤(1892) 등 여러 문헌 기록에 전한다.
학무는 고려 및 조선 시대에 궁중과 지방 관아 교방(敎坊)에서도 추었다. 고종 『(신축)진연의궤』(1901)에 의하면, 광무 5년(1901) 고종 황제(高宗皇帝) 탄신 50주년 기념 만수성절(萬壽聖節)의 진연(進宴) 때에 덕수궁 함녕전(咸寧殿)에서 학무를 추었다고 전한다.『평양속지(平壤續誌)』에 의하면, 영조 6년(1730)에 평양감영(平壤監營)과 평양부(平壤府) 소속 기녀가 학무를 추었다고 전한다. 정현석(鄭顯奭, 1817~1899)의 『교방가요(敎坊歌謠)』(1865)에 의하면,〈연화대〉를 출 때 백학 한 쌍과 함께 추었고, 《평안감사향연도(平安監司饗宴圖)》의〈연광정연회도(練光亭宴會圖)〉에는 새로 부임한 평양감사를 환영하는 연회에서 청학과 황학이 대기하고 있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현대에는 한국전쟁 후 국립국악원 주도하에 김천흥(金千興, 1909~2007)과 이흥구(李興九, 1940~)의 재현 안무로 무대 예술화되어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다. 이때의 학무 내용은 『정재무도홀기』에 기록된 궁중 학무와 기존에 전승되던 한영숙(韓英淑, 1920~1989)의 민속 학무를 융합하여 재구성한 작품으로, 문헌[고무보] 내용과는 다소 차이가 있으며, 이 내용은 『궁중무용무보』제2집에 전한다.
학무는 연못[지당판]에 핀 꽃을 이상하게 여긴 학이 그 주위를 맴돌고 날아다니며 학의 일상적인 행위를 표현하며 추는 춤이다. 학무의 무용수는 학 한 쌍으로 구성되어, 여령(女伶)과 무동(舞童)이 추었다. 학무 내용은 시대별로 변화되지 않았지만, 조선 전기에는 「벽연롱효사」인 〈보허사(步虛詞)〉 노랫말에 맞추어 악ㆍ가ㆍ무 융합적인 형식으로 추었으나, 조선 후기에는 노랫말이 사라지고 〈보허자〉 혹은 〈향당교주〉 등의 음악 반주에 맞춰 춤을 추었다.
학무의 춤 구조는 크게 다음 네 가지로 구성된다. 학이 지상에 내려앉아 등장하는 고상도진(翶翔蹈進) 춤을 추고, 북쪽을 바라보고 추는 북향(北向) 춤, 지당을 바라보고 춤추는 향지당(向池塘) 춤, 연꽃에서 동녀가 출현하자 학이 깜짝 놀라 도망가는 경약이퇴(驚躍而退)를 춘다.
학무 춤은 지당판이라는 무대 장치를 중심으로 '북향춤'과 '향지당춤' 두 가지로 구분하여 반복적으로 추었다. 춤추는 공간 또한 북향춤은 지당판 북쪽에서 추고 향지당춤은 지당판 남쪽에서 추었는데, 북쪽을 바라보고 추는 북향춤에서는 앞으로 나아가[진이보(進二步)] 고개를 안[내고(內顧)]과 밖으로 돌리는[외고(外顧)] 춤을 중점적으로 추었다.
반면 지당을 바라보고 추는 향지당춤에서는 내고ㆍ외고 외 허리를 구부렸다가 부리를 부딪치는 ‘면이탁(俛而啄)’과 땅바닥에 부리를 닦는 ‘취식지(嘴拭地)’를 비롯한 연꽃을 이상하게 여겨 연꽃 안[內]과 밖[外]을 쳐다보는 ‘연통(蓮筒) 내면(內面)ㆍ외면(外面)ㆍ남면(南面)’ 등의 여러 가지 춤을 추었다.
현재 추어지는 학무는 지당판[연통]을 무대 남쪽[뒷면]에 설치한다. 학이 등퇴장하는 위치는 무대 안 양 옆이고, 춤 전체[북향춤ㆍ향지당춤]를 지당판 북쪽 한군데에서만 춘다.
학무의 창사는 보허사(步虛詞)이다. 노래말은 〈벽연롱효사〉로서, 신선의 무리가 하늘 위로 아득히 펄럭이며 날아가는 아름다움을 갖추어 표현하고 있는데, 신선의 이미지를 통해 제왕의 송도(頌禱) 혹은 송축(頌祝)의 효과를 극대화하였다. 창사는 전단(前段)인 미전사(尾前詞)와 후단(後段)인 미후사(尾後詞)로 구분되어 있는데, 미전사는 신선의 공간인 천상세계, 미후사는 제왕의 공간인 지상 세계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학 의상은 조선 전기에 청학(靑鶴)과 백학(白鶴), 조선 후기에 청학과 황학(黃鶴), 그리고 지방 관아 교방에서는 백학 한 쌍으로, 구성에 변화가 있었다. 학무를 출 때 사용되는 무대장치는 지당판이 있다. 조선 전기에는 지당판(池塘板)을 사용하였고, 조선 후기에는 지당판 남쪽 좌우에 연통[연꽃]을 별도로 설치하였다. 현재에는 연통만 사용하기도 한다.
학무는 북향과 지당[향지당: 연못]을 바라보며 춤을 추는 두 가지 무용구조로 구분되어 있고, 춤추는 무대 공간 또한 임금이 앉아 있는 현실적인 공간인 지당판 북쪽 공간과 선계를 상징하는 지당판의 남쪽 공간 두 가지로 구분되어, 현실에서 선계로, 혹은 선계에서 현실로 소통하고 순환하는 상징적 구도를 갖추고 있다.
1971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학무는 백학 한 쌍이 춘 민속 학무였다. 이 학무는 1935년 한성준(韓成俊, 1875~1941)이 부민관(府民館)에서 창작무용발표회에서 발표한 것으로, 손녀인 한영숙이 초대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이후 학무가 궁중에서 추었다는 기록과 〈연화대〉와 합설로 추어진 사실이 인정되어 1993년에 종목 명칭을 〈학연화대합설무〉로 명칭을 변경하였고, 이흥구가 보유자로 지정되었다.
손선숙, 『한국 궁중무용사』, 보고사, 2017. 이흥구 외, 학연화대합설무, 피아, 2006. 조규익ㆍ문숙희ㆍ손선숙ㆍ성영애, 『보허자: 궁중융합예술, 그 본질과 아름다움, 민속원. 2021. 송지원, 「조선시대 궁중학무(鶴舞)의 연행 양상 연구」, 『공연문화연구 15, 2007. 이숙희, 「지당판(池塘板)의 구조와 성격」, 『공연문화연구 28, 2014.
손선숙(孫善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