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향악정재의 하나로, 침상(寢牀)처럼 생긴 대모반(玳瑁盤)위에서 임금에게 기쁨을 드리는 의미를 담아 추는 춤
조선 후기 왕실의 잔치에서 어린 남자 무용수인 무동(舞童)이나 여자 무용수인 여기(女妓) 한 명이 한삼(汗衫)을 끼고 사각형의 대모반 안에서 다양하고 역동적인 춤동작을 연행하며 추는 춤이다. 〈춘앵전(春鶯囀)〉과 함께 조선 시대에 처음 등장하는 독무(獨舞: 1인무)이다.
무산향은 순조(純祖, 1790~1834, 재위 1800~1834) 28년(1828), 효명세자(孝明世子,1809~1930)가 지은 악장을 바탕으로 창작된 춤이다. 순조 『(무자)진작의궤(進爵儀軌)』(1828)「부편(附編)」의 무산향 해설에 따르면, “당나라 여남왕(汝南王; 현종의 가족 중 영왕의 맏아들) 진(璡)이 항상 아견모(아광모)를 쓰고 곡을 연주하였다. 『도서집성(圖書集成)』에 ‘누구와 함께 아광모를 쓰고, 한 곡조 무산향을 연주할까’라는 문구가 나온다”고 되어 있다. 이로써 무산향의 제목은 소동파의 (蘇東坡)의 〈이도자(李陶子)〉라는 시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1828년 6월 1일 순원왕후(純元王后, 1789~1857)의 40세 생일 축하 잔치로 연행된 연경당(延慶堂) 진작연(進爵宴) 때, 무동에 의해 처음 공연되었다. 이후 정해년(1887)과 임진년(1892)의 진찬 때는 여령이 공연하였다. 신축년(1901) 외진연 때는 무동이, 내진연에서는 여령이 춤추었다, 일제강점기 이왕직아악부의 아악수ㆍ아악수장ㆍ아악사를 역임한 이병성(李炳星, 1909~1960)의 정재 무보에는 소화 14년(1939) 1월에 기록한 무산향의 무보가 있다. 하지만 당시 기록에는 대모반에 대한 언급이 없고, 실제로 이왕직아악부에서 당시 배웠던 춤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현재의 무산향은 1979년 8월 영국 더름 제2회 동양음악제 구주공연단의 레퍼토리로 김천흥(金千興, 1909~2007)에 의해 처음 재현ㆍ안무되었고, 1981년 6월 29일 공간사랑에서 열린 ‘제5회 공간 전통예술의 밤’에서 다시 공연 되었다. 이후,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개최된 심소 김천흥 무용생활 60주년 기념 ‘궁중무용발표회’에서 대모반을 무대 위에 설치하고 이흥구(李興九, 1940~ )가 처음 무산향 을 공연한 이래, 국립국악원의 레파토리로 꾸준히 전승되고 있다.
대모반이 무대 중앙에 설치되면, 무용수 한 명이 대모반으로 올라가 춤춘다. 춤을 다 마치면, 대모반에서 내려와 춤추며 퇴장[무퇴(舞退)]한다. 현재 국립국악원에서는 대모반을 실물이 아닌 상징적인 형상으로 대체하는 경우가 많으며, 대모반 위에서 바로 춤을 시작하고, 춤을 마치면 대모반 위에 있는 상태에서 바로 끝낸다. 무산향의 무용수는 춤추며 앞으로 나와 창사를 부르고, 다시 팔을 올렸다가 내렸다 하는 이수고저(以袖高低) 동작을 하고 대모반 가장자리를 돌아가며 춤춘다. 팔 동작으로 춤추고, 몸을 앞으로 숙였다가 뒤로 젖히는 동작을 한 뒤 대모반 가장자리를 돌면서 춤추는 연풍대(筵風擡)를 한 후, 처음 시작한 춤 자리로 춤추면서 돌아가서는 인사하고 끝낸다. 차분하게 시작하여 점차 활발한 동작으로 진행되고, 역동적 표현으로 절정에 이른 후에 다시 처음의 자리로 되돌아가는 형식 구조이다.
효명세자가 지은 무산향 창사는 군왕이 연향을 통해 즐거운 마음 갖기를 바라는 내용의 칠언절구(七言絶句) 시이다. 중중편득군왕소(衆中偏得君王笑) 최환향라착수의(催換香羅窄袖衣) 유향신가앵전수(遊響新歌鶯囀樹) 의풍경무불운비(倚風輕舞拂雲飛) 사람들 서리에서 홀로 임금님의 웃음을 얻어 서둘러 향그런 좁은 소매 비단옷 갈아입었네. 맑은 소리 새 노래는 나무 사이를 나는 꾀꼬리 같고 바람결의 가벼운 춤사위 구름을 스칠 듯하네. - 원문출처: 김천흥, 『정재무도홀기 창사보1』번역: 강명관 현재 국립국악원 공연에서는 “중중편득” 만 부르고 있다.
무동과 여기는 공통적으로 홍색과 녹색으로 된 의상을 입고 목에는 금가자(金訶子)를 착용하였다.
무동(舞童) 복식은 아광모(砑光帽)를 쓰고, 남사내공(藍紗內拱)ㆍ홍라천수의(紅羅穿袖衣: 남색 비단을 안(소매와 목)에 두른 홍색 비단 좁은 소매의 웃옷)에 녹라괘자(綠羅掛子: 녹색 비단 쾌자)를 입고, 금가자(金訶子: 가슴장식)를 목에 두른다. 백질흑선상(白質黑縇裳: 백색바탕에 검은색 선을 두른 치마)에 학정야대(鶴頂也帶: 허리 띠의 일종)를 띠고, 녹사한삼(綠紗汗衫: 녹색 비단 한삼)을 착용하고 능파리(凌波履: 신발의 일종)를 신었다.
여기(女妓)의 복식은 화관(花冠)을 쓰고, 남주(藍紬)ㆍ홍갑사착수의(紅甲紗笮袖衣)에 녹갑사괘자(綠甲紗掛子)를 입고, 금가자(金訶子)를 목에 두른다. 홍초상(紅綃裳)에 남전대(藍戰帶)를 허리에 띠고, 오색한삼(五色汗衫)을 사용하고 진홍단혜(眞紅鍛鞋)를 신었다.
무구(舞具)는 침상(寢牀)모양과 같은 대모반(玳瑁盤)을 사용한다.
침상의 위인 난간 안쪽에 대모의 무늬를 그려 넣은 밑받침[盤]이라는 의미로 대모반이라고 하였다. 대모는 바다거북의 일종으로 그 등과 배를 싸고 있는 껍데기라고 한다. 대모반의 길이는 7자(210cm), 너비는 4자 6치 5푼(139.5cm), 높이는 발[족대(足臺)]까지 1자 3치(30.9cm)이다. 사방에는 태평화(太平花)를 그리고, 상판에는 주칠(朱漆)을 한다. 판자로 난간을 세우고 운각(雲角)을 설치하며, 여러 색으로 반에 칠한다. 반의 안쪽에는 대모의 무늬를 그린다.
현재 국립국악원에서는 무산향 공연 시 난간만 세우기도 하고, 난간 없이 무대를 올려 대모반 형상을 연출하고 있다.
무산향 춤은 침상(寢牀)처럼 생긴 대모반 위에서 한 명의 무용수가 당나라의 여남왕 이진을 형상화하여 아광모를 착용하고 추는 춤이다. 무용수가 난간이 둘러있는 대모반 위에서 흔들흔들 돌아가며 춤추는 것이 마치 무궁화 꽃 한송이가 이진의 아광모 위에서 춤추는 것과 유사함을 묘사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무산향은 조선 시대 예술적 상징성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국립국악원,『한국음악학자료총서 제4집: 시용무보, 정재무도홀기』, 국립국악원, 1980. 한국학중앙연구원,『조선후기 궁중연향문화 권2』, 민속원, 2005. 국립국악원, 『한국음악학자료총서 제35집: 조선시대진연진찬진하병풍』, 국립국악원, 2000. 김천흥,『정재무도홀기 창사보』, 민속원, 2002. 이의강ㆍ김은자ㆍ이재옥,『국역 순조무자진작의궤』, 보고사, 2006.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사료강독회,『고종신축진연의궤』,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2001.
김혜영(金惠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