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동(舞童)
광수무는 숙종(肅宗, 1661~1720) 무렵부터 기록에 나타나는 향악정재이다. 대개 어린 남자 무용수인 무동(舞童) 두 명이 임금과 신하가 참석하는 외연(外宴)에서 추었던 춤으로, 소매를 이용해서 추는 동작이 특징적이다. 반주음악으로는 〈향당교주〉를 연주한다.
광수무가 언제부터 추어졌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순조 『(무자)진작의궤』(1828) 광수무 항목에 “양(梁)나라 간문제(簡文帝)의 시에 ‘다시 살짝 손을 드리우고 넓은 소매〔광수(廣袖)〕로 홍진을 스치네’라고 하였다. 『패문운부(佩文韻府)』(1711) 이백(李白, 701~762)의 시에 ‘너울너울 넓은 소매〔광수(廣袖)〕로 춤추니 흡사 해동에서 새가 날아오는 듯’이라고 하였다”는 글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 시들이 고구려와 관련된 것이어서 광수무를 고구려의 춤으로 해석한 예도 있다. 또한 성종대의 『악학궤범(樂學軌範)』(1493) 권2에 여기 두 명이 추는 춤 이름으로 광수무(廣手舞)가 보이는데, 광수무(廣袖舞)와 같은 춤인지는 알 수 없다.
광수무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숙종 대부터 나타난다. 1706년(숙종 32) 숙종 즉위 30년을 축하하는 연향과 1714년(숙종 40)인 즉위 40년을 축하하는 연향, 1719년(숙종 45) 숙종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간 것을 축하하기 위한 진연 및 그해 9월에 올린 진연에서 무동 두 명이 광수무를추었다. 이처럼 숙종 대에는 외연에서 무동이 광수무를 추는 것이 정착되는 양상을 보이며, 〈초무〉ㆍ〈아박〉ㆍ〈향발〉과 함께 광수무는 외연의 춤으로 연행되었다. 1743년(영조(英祖) 19)과 1744년(영조 20) 연향에서도 무동 두 명이 광수무를 추었다. 이후 영조대 및 순조대까지 외연, 즉 임금과 신하가 친목을 도모하는 공식적인 국가 하례 및 잔치에서 무동이 광수무를 공연한 기록이 보인다.
1828년(순조 28) 순원왕후(純元王后, 1789~1857)의 보령 40세 축하를 위한 연향과 1829년 순조의 생신 연향에도 광수무가 추어졌다. 또 1902년(광무 6) 4월 고종(高宗, 1852~1907) 황제의 보령 51세가 되어 기로소 입소를 경축하는 외진연과 고종 황제의 통치 40년을 경축하는 외연에도 무동의 광수무가 연행되었다. 이후 일제강점기에는 전승이 단절되었다가, 2003년 국립국악원 《원형탐구 시리즈》 〈숙종조 기로연〉에서 당시 안무자 하루미(하유미)가 광수무를 재현하여 무대에 올린 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광수무의 구성 인원은 두 명이다. 두 사람이 앞을 보고 추다가, 마주 보고 춤을 추고, 다시 무대 앞을 보고 춤을 추며 마무리 하는 단조로운 구성이다. 장서각 소장 『무동각정재무도홀기(舞童各呈才舞圖笏記)』에는 두 팔을 번갈아 가며 대칭으로 올렸다 내리는[좌수거수우수낙수이무(左手擧袖右手落袖而舞), 우수거수좌수낙수이무(右手擧袖左手落袖而舞)] 가 주요 춤동작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광수무는 소매(팔)를 이용해서 추는 춤이라고 볼 수 있다.
1719년(숙종 45) 『(기해)진연의궤』에 의하면 광수무의 반주 음악은 〈여민락령〉이다. 1828년(순조 28)에는 〈향당교주〉가 연주되었으며, 고종 조에도 〈향당교주〉가 반주음악으로 사용되었다.
광수무의 복식은 1828년 『(무자)진작의궤』에 의하면, 백질흑선중단의(白質黑線中單衣; 백색바탕에 검정 선이 둘러 있는 포)와 홍질남선상(紅質藍縇裳: 홍색바탕에 남색선이 둘러 있는 치마) 녹단령(綠團領: 깃을 둥글게 만든 녹색 포)을 입고, 두석녹혁대(豆鍚綠革帶: 장식이 달린 녹색 혁대)를 허리에 띠고, 머리에는 부용관(芙蓉冠: 연꽃모양으로 제작된 모자)을 쓰고, 서화흑화자(書花黑靴子: 검정 바탕에 꽃이 그려져 있는 신발)를 신었다. 1829년 『(기축)진찬의궤』에 수록된 광수무의 무동 복식도 전반적으로는 동일한데, 화화방보(畵化方補: 꽃 그림을 그린 네모의 흉배)가 추가로 기록되었다.
광수무는 궁중 외연(外宴)때 남자 무용수 무동에 의해서만 춤추어졌지만, 궁 밖 지방의 관아 관련 연회에서는 어린 여자 무용수가 남성의 복식을 착용하고 두 명 혹은 네 명이 〈무동(舞童)〉이라는 제목의 광수무를 추었다.
『악학궤범』의 〈하성명(賀聖明)〉 기록에 기녀 열두 명이 북향하여 ‘광수무(廣袖舞)’를 추도록 지시되어 있는데, 이 때의 ‘광수무’는 “〈연화대〉의 좌동녀의 춤과 같은데 다만 무릎을 꿇는 의식은 없다” 라고 하였다. 〈연화대〉에 동녀가 외수를 쳐드는[광수(廣袖)] 춤 동작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전기에도 광수무의 춤 양식이 전해졌을 가능성이 있다. 〈하성명〉은 기녀 열두 명이 추었던 춤이므로, 무동이 추는 광수무와는 다르지만, 소매를 이용하여 춤춘다는 점에서는 관련성이 있다. 즉 조선 전기에 여기가 추던 광수무가 조선 후기 외연에서 무동이 추는 춤으로 정착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2003년 광수무 재현 당시 의상은 다른 정재 의상과 동일한 것으로 착용했다. 이는 문헌에 기록된 것과는 다르기 때문에 향후 고증 및 추가 복원이 필요하다.
송방송ㆍ고방자,『국역영조조갑자진연의궤』, 민속원, 1998. 송방송ㆍ김종수, 『국역 순조기축진찬의궤 권1』, 민속원, 2007. 송방송ㆍ박정련 외,『국역 숙종조기해진연의궤』, 민속원, 2001. 이의강 외,『국역순조무자진작의궤』, 보고사, 2006. 한국학중앙연구원, 『조선후기 궁중연향문화 권2』, 민속원, 2005.
김혜영(金惠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