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구락무(抛毬樂舞), 포구무(抛毬舞), 포구(抛毬), 구락(毬樂), 포락(抛樂)
고려 때 중국 송나라에서 들어왔으며, 포구문의 풍류안에 공을 던져 넣는 놀이 형태의 춤
포구락은 궁중은 물론 전국 감영(監營)을 중심으로 지방에서도 활발하게 연행되었다. 두 편으로 나뉜 무용수들이 포구문의 풍류안(風流眼)에 공을 던져 넣는데, 공을 넣으면 상으로 꽃을 받았고 넣지 못하면 벌로 얼굴에 먹점을 찍었다. 지방에서는 공을 던져 좌우편이 겨루는 놀이적 성격이 더욱 강화되는 양상을 띠었으며, 현재는 진주의 포구락이 복원 전승되고 있다.
포구락은 고려 때 송나라에서 들어온 당악정재로 1073년(문종 27)에 팔관회에서 교방 여제자 초영(楚英) 등 열세 명이 처음 연행하였다. 이 춤은 고려 때부터 조선시대까지 궁중 잔치와 사신연 등 국가 행사에서 많이 추어졌고, 지방의 관아와 교방에서도 활발하게 연행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읍지와 개인문집, 사행록 등의 기록을 통해 전국 각지에서 포구락을 추었던 정황을 확인할 수 있다. 평안도 평양ㆍ성천ㆍ정주ㆍ영변ㆍ안주ㆍ의주ㆍ선천, 황해도 해주와 황주, 강원도 원주, 경상도 진주와 경주, 전라도 무주,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전국적으로 지방의 관아와 교방을 중심으로 포구락이 널리 연행되었다.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은 중국과 왕래하는 사행로였고, 경상도 지역은 조선통신사의 사행로였기 때문에 이들 지역의 관아와 교방에서 포구락을 추었던 정황이 두드러진다.
일제강점기에는 조합과 권번을 중심으로 포구락의 교육과 전승이 이루어졌다. 1913년 고종 탄신 축하연에서 다동조합과 광교조합의 기생들이 포구락을 추었고,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와 1929년 조선박람회에서도 여러 조합과 권번의 기생들이 포구락을 추었다. 이 당시 하규일(河圭一, 1867~1937)이 권번에서 포구락을 비롯한 여러 궁중춤을 가르쳤는데, 대정권번 소속이었던 대구 출신의 예기(藝妓) 정소산(鄭小山, 1904~1978)이 하규일에게 직접 포구락을 배워 광복 이후 대구에서 포구락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한편 진주권번에서는 〈헌선도〉ㆍ〈무고〉ㆍ〈선유락〉 등과 함께 포구락을 추었는데, 해방 이후에는 포구락만 전승이 이어졌다고 한다.
1985년 진주민속예술보존회 이사장이었던 성계옥의 주도하에 정현석(鄭顯奭, ? ~ ?)의 『교방가요(敎坊歌謠)』(1865)에 수록된 기록과 진주권번에서 포구락을 추었던 이윤례의 기억을 토대로 진주 포구락무가 복원되어 이어지고 있다. 현재 지방의 포구락은 진주포구락무가 유일하다.
포구락의 무용수 구성은 지방이나 상황에 따라 달랐다. 궁중의 포구락은 죽간자를 받든 무용수 두 명, 붓을 받든 봉필 한 명, 꽃을 받든 봉화 한 명이 고정적으로 구성되고, 춤을 추는 무용수의 경우 여섯~열여섯 명으로 다양하게 편성되었다. 지방의 포구락 역시 공을 던지는 무용수 인원을 상황에 따라 유동적으로 편성하였다. 《평안감사향연도》의 〈부벽루연회도〉에 보이는 평양의 포구락은 공을 던지는 좌우편의 무용수 두 명이 묘사되어 있다. 진주의 포구락은 소기(小妓) 세 쌍과 동기(童妓) 두 쌍의 총 열 명이 좌우편으로 나뉘어 춤추었다.
지방의 포구락에서 죽간자는 유동적으로 편성되었고 봉화와 봉필은 지역에 따라 편성 인원이나 역할에 차이를 보였다. 진주 교방에서 봉필은 노기(老妓)가 맡았는데, 『교방가요』에 묘사된 그림을 보면 좌우편에 한 명씩 붓을 쥐고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또 공을 넣었을 때 주는 꽃을 봉화가 받들지 않고 포구문 기둥에 꽂아 두었다. 무용수가 공을 넣으면 봉화가 기둥에 꽂혀 있는 꽃을 뽑아 적중자에게 전달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밖에 진주에서는 동기 두 명이 포구문이 움직이지 않도록 기둥을 잡는 역할을 맡았다.
포구락의 춤 내용 또한 지방에 따라 달랐을 것으로 보인다. 진주의 포구락은 기녀들이 동헌 마당에 구문(毬門)을 설치하고 춤의 시작과 끝에는 무용수가 일제히 절을 하였다. 춤의 절차는 ① 쌍쌍이 마주보고 춤추기[쌍쌍대무(雙雙對舞)] ② 앉아서 공을 어르다가 일어서기 ③ 공을 집어 춤추기 ④ 공 던지기 ⑤ 상벌 ⑥ 모두 춤추기의 순으로 구성되었다. 좌우편으로 나뉘어 공 던지기가 차례로 진행되는데, 무용수가 모두 앉아 있는 상태에서 좌우편 두 명이 공을 어르다가 일어난 후 공을 던져 결과에 따라 상벌을 받는 절차를 반복하였다. 적중했을 경우 머리에 꽃을 꽂고 적중하지 않았을 경우 뺨에 먹물로 점을 찍었다. 공을 떨어뜨리지 않았을 경우와 공이 풍류안에 얹혀서 떨어지지 않은 경우에 대한 내용은 궁중과 동일하게 이루어졌다. 현재 복원된 진주포구락무의 경우 뺨에 먹점을 찍는 대신 눈에 퉁방울을 그린다.
포구락에서 중요한 춤 동작은 공을 어르는 농구(弄毬)5), 공을 잡는 집구(執毬), 공을 던지는 포구(抛毬)의 세 동작이다. 공을 집을 듯 말 듯 하거나 던질 듯 말 듯 한 동작이 이루어지면서 보는 이의 조바심과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진주의 포구락을 보고 기록한 『교방가요』에도 “손에는 붉은 공을 쥐고 구문(毬門) 틀을 향해 서서 몇 번이나 던질 듯 시늉하며 일부러 지체하지만”이라고 하여 공을 어르는 동작6)이 잘 묘사되어 있다. 『소수록』에 수록된 해주감영 기생 명선의 작품 「해영명긔명션이라」에서 “더져 추니 구락이라”는 표현이나 작자・연대 미상의 가사 「선루별곡」의 “더지나니 용의 알은 포구락이 절묘하다”는 표현은 공을 던지는 동작이 포구락의 핵심임을 알려준다.
지방의 포구락을 연행할 때 창사를 불렀다는 기록을 찾을 수 없다. 다만 일제강점기 권번에서 포구락을 출 때는 지화자를 창하였던 전례가 있었다. 진주권번에서 활동했던 이윤례(李潤禮,1903~1995)의 기억을 토대로 진주 포구락은 공을 넣었을 때 지화자를 창하도록 복원되었다. 또한 1972년에 대정권번 출신의 정소산이 하규일에게 배운 포구락을 경상북도 무형문화재로 신청할 때, 죽간자가 먼저 나와 지화자를 부르는 절차로 구성하였다. 지화자를 창하는 전례는 『교방가요』에 기록된 무고의 절차에도 등장한다. 진주교방의 무고에서는 무용수가 북을 한 번 칠 때마다 여러 기녀들이 “지화자(芝花紫)”를 제창하였다. 이러한 전례를 미루어 보면, 지방의 포구락은 그 지역의 공연문화에 맞게 창사를 축소 혹은 변화시켰음을 알 수 있다. 현재 복원된 진주포구락무의 경우 〈개장창사(開場唱詞)〉ㆍ〈지화자〉ㆍ〈선비가〉ㆍ〈수장창사(收場唱詞)〉를 부른다.
포구락의 복식은 지방에 따라 차이를 보인다. 《평안감사향연도》에 묘사된 평양교방의 포구락 복식은 동서편 무용수가 치마저고리에 무늬가 들어간 쾌자를 입고 남색 전대를 매었다. 두 무용수의 복식 색깔은 서로 다른데, 동편은 초록색 저고리에 붉은 치마, 서편은 흰색 저고리에 남색 치마를 입었다. 진주교방의 포구락 복식은 역할에 상관없이 모두 치마저고리를 입었다. 저고리와 치마의 색깔은 서로 다르게 입었는데, 저고리는 노란색이나 붉은색이고, 치마는 붉은색ㆍ초록색ㆍ남색의 세 가지 색깔로 착용하였다. 현재 진주포구락무의 무용수 의상은 흰 치마에 검붉은 저고리를 입고 손목에는 노리개 장식이 달린 색동 한삼을 낀다.
포구락은 당악정재이기 때문에 궁중에서 연행할 때는 죽간자를 갖추었다. 그러나 지방에서는 죽간자가 유동적으로 편성되었다. 『몽유연행록』의 ‘포구락’을 묘사한 시에 “한 쌍의 붉은 장대 가벼이 흔들며 취교(翠翹)를 기울이니(雙紅輕拂翠翹斜)”라는 표현이 있어 붉은 색으로 칠한 죽간자 한 쌍이 포구락에 사용된 예를 볼 수 있다.
『몽유연행록』 〈포구락(拋毬樂)〉
한 쌍의 붉은 장대 가벼이 흔들며 취교(翠翹)*를 기울이니 (雙紅輕拂翠翹斜)
다섯 빛깔의 기구 꼭대기에 작은 구멍 입을 벌리네 (五彩機頭小孔呀)
용란(龍卵)을 공중에 던져 솜씨대로 넣으니 (龍卵擲空隨手入)
구름 같은 머리채에 꽃 한 가지 돋보이네 (髩雲生色一枝花)
* 취교는 원래 비취새 꼬리의 긴 깃털처럼 생긴 여성의 머리 장식을 의미하나 이 시에서는 붉은 칠을 하고 작은 구술을 꿴, 가는 대 100개를 묶어 장식한 죽간자의 상단을 길게 늘어뜨린 모습을 지칭한 것이다.
『호남읍지』의 무주부 읍사례에도 죽간자 한 쌍이 기록되어 있다. 반면에 <평안감사향연도>나 『교방가요』의 포구락 그림에는 죽간자가 보이지 않는다. 이로 보건대 지방에서 죽간자 사용은 유동적이었으며, 붉은 장대 끝에 구슬로 장식한 가는 대를 길게 늘어뜨린 형태는 궁중과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포구락에서 가장 중요한 무구는 포구문이다. 포구문은 지역에 따라 세부적인 형태나 장식에 차이가 있으나, 2미터가 넘는 높이에 풍류안을 둥글게 뚫어 놓은 형태는 궁중과 동일하다. 평양의 포구문은 궁중의 포구문과 유사한 형태를 띠며 기둥 양쪽으로 유소를 늘어뜨렸다. 『교방가요』에 묘사된 진주의 포구문에는 유소가 없고 장식이 비교적 단순한 형태인데, 비단으로 만든 꽃가지 열 개를 문기둥에 꽂은 점이 특이하다. 『탐라순력도』에 묘사된 제주도의 포구문은 매우 높게 그려져 있다. 이밖에 채구(용의 알)는 붉은 색이며 유소를 늘어뜨린 형태였고, 상으로 주는 꽃은 비단으로 만들었다.
포구락은 고려 때 들어와 조선을 거쳐 현재까지 전승되며 유희성이 짙은 놀이 형식과 지방을 막론하고 인기가 많았다. 궁중의 포구락이 당악정재의 형태를 유지하며 변모하였다면, 지방에서는 지역적 상황에 맞게 놀이적 요소가 강화되고 먹점 대신 퉁방울을 그리는 등 유희성이 강조되는 경향으로 바뀌었다는 점에서 공연예술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진주 포구락무: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12호(1991)
포구락은 지방에서 여러 명칭으로 불렸다. 평안도 평양ㆍ안주ㆍ정주ㆍ영변ㆍ의주ㆍ선천, 강원도 원주, 전라도 무주, 경상도 진주ㆍ경주 등지에서는 포구락으로 불렀다. 평안도 성천에서는 포구, 황해도 해주에서는 구락, 황주에서는 포락이라고 했다.
『교방가요』, 1872. 국립국악원 편, 『조선시대 음악풍속도Ⅰ』, 민속원, 2002. 국립국악원 편, 『조선시대 음악풍속도Ⅱ』, 민속원, 2004. 반달, 「조선후기 궁중정재와 교방정재의 상호 연관성 연구: 유입배경과 연행방식을 중심으로」, 중앙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6. 정진욱, 「진주 포구락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1.
김은자(金恩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