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용(處容), 처용가무(處容歌舞)
신라 시대부터 전해져 조선 후기 지방 관아와 교방에서 추었던 춤으로, 처용가면을 쓰고 추는 춤
처용무는 신라 때 잡귀를 좇는 벽사의 의미를 담아 추던 춤이었으며, 고려를 거쳐 조선 시대에도 궁중을 비롯한 지방 관아의 의례에서 지속적으로 추어졌다. 대체로 오방처용무로 편성되었으며, 긴 소매를 너울거리는 큰 팔 동작이 특징이었다.
처용무는 역신이 처용의 아내를 범하려 하자 처용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어 역신을 무릎 꿇게 하였다는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처용랑(處容郞)’ 설화에서 비롯된 춤이다.
신라에서 탄생한 처용무는 고려를 거쳐 조선 시대까지 궁중과 지방 관아의 의례에서 널리 연행되었다. 고려의 유학자인 이색(李穡, 1328~1396)이 쓴 『목은시고(牧隱詩藁)』의 「구나행(驅儺行)」에 나례에서 처용무를 연행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조선 시대에도 궁중 연향과 섣달 그믐날의 나례의식에서 묵은해의 역신과 잡귀를 좇는 벽사의 의미로 꾸준히 추어졌다. 특히 성종 때는 나례에서의 처용무가 학무 및 연화대와 함께 “〈학연화대처용무합설〉”로 이루어졌다.
처용무의 구성은 일인처용무와 오방처용무의 두 종류로 나타난다. 처용무가 처음 추어졌을 때는 무용수 한 명이 검은 장삼에 머리에는 사모를 쓰고 춤을 추었다. 그 후에 다섯 명의 무용수가 오방색 의상을 입는 오방처용무 형식으로 바뀌었다. 지방의 처용무 역시 조선 시대에는 대개 오방처용무로 구성되었다. 《평안감사향연도》의 〈부벽루연회도〉에 평양교방의 처용무가 오방처용무로 연행된 것을 확인할 수 있고, 성천과 경주 교방에서도 오방처용무로 연행하였다. 다만 진주교방의 처용무는 『교방가요』에 춤을 추는 무용수가 한 명 그려져 있어 일인처용무로 추었을 가능성도 보여준다.
지방의 처용무는 춤 구성이나 춤사위를 살필 수 있는 기록이 매우 드물다. 「동경유록」에 “다섯 번째, 처용은 기녀 다섯 명을 쓰며, 오방색 옷을 입고 처용의 기괴한 형상을 하고 차례로 들어온다. 각각 사방에 자리하고 서로 돌며 춤춘다. 그것이 끝나면 차례대로 나간다.”라고 하였다. 오방처용이 처용탈을 쓰고 입장하여 각자의 방위에서 춤을 춘 후 퇴장하는 절차로 이루어지며, 주요 춤사위는 ‘서로 돌면서 추는’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궁중 처용무가 오른쪽 돌기ㆍ십자형ㆍ원형ㆍ왼쪽 돌기 순으로 전개되는데, 지방에서도 돌면서 대열을 이루는 춤사위가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처용무를 묘사한 많은 기록에서 처용이 긴 소매를 너울거리며 춤추는 동작이 자주 언급되었다. 「동도악부」에 “다섯 사람이 너울너울 마주 소매 떨치고(五人對拂婆娑袖)”라고 하였고, 「이선악가」에는 “처용의 긴소매는 너울너울 우습도다”라고 하여 긴 소매를 힘차게 뿌리는 동작이 처용무의 주요 동작임을 보여준다. 궁중의 처용무에 우선회무나 팔을 들어 올려 흔들며 추는 수양수무(垂揚手舞) 동작과의 관련성을 유추할 수 있다.
처용무는 원래 처용가를 노래하였고, 조선 시대에는 개찬된 봉황음(鳳凰吟)을 불렀다. 지방의 처용무는 노래를 불렀다는 기록을 찾을 수 없다.
지방관아와 교방에서 연행된 처용무의 반주음악은 알 수 없다. 궁중의 경우 처용무 반주음악으로 『악학궤범』에 〈봉황음〉과 〈정읍〉이 기록되어 있고, 조선 후기 『여령각정재무도홀기』(1893)에는 〈여민락〉과 〈영산회상〉 등이 사용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반면에, 《평안감사향연도》 중 〈부벽루연회도〉에 여러 종의 춤을 연행하는데, 집박과 삼현육각 악대 편성으로 반주음악을 연주한 정황을 알 수 있다. 『교방가요』에 묘사된 진주교방의 춤 역시 대부분 삼현육각 악대가 편성되었다. 그러므로 지방에서 연행된 처용무는 삼현육각 악대가 보편적인 반주편성이라 할 수 있다.
처용무 복식은 지방의 경우 궁중보다 다소 간소한 차림이며 여성 무용수에 맞게 복식을 갖추었다. 궁중 처용무는 모(帽)ㆍ소매가 긴 의(衣)ㆍ천의(天衣)ㆍ금야대(金也帶)를 띠고 말군(襪裙) 위에 상(裳)을 겹쳐 입으며 길경(吉慶)을 두르고 흑피화(黑皮靴)를 신었다. 소매 달린 처용의 의상은 동서남북과 중앙 등의 오방(五方)을 상징하는 색깔로 입는데, 동쪽은 청색, 서쪽은 흰색, 남쪽은 붉은색, 북쪽은 검은색, 중앙은 노란색을 입는다.
지방에서도 오방색의 긴 소매 옷은 처용무 복식의 필수였다. 《평안감사향연도》의 〈부벽루연회도〉에 묘사된 처용무 역시 다섯 무용수가 백한삼이 달린 긴 소매 옷을 오방색으로 나누어 입고 있다. 그런데 궁중의 경우 하의로는 바지 형태의 말군에 상을 착용하여 말군이 드러나도록 하였다면, 평양의 처용무 무용수는 치마저고리에 긴 소매 옷을 입고 그 위에 오방색에 맞는 쾌자를 덧입은 형태이다. 말군 대신 치마를 입은 것은 여성 무용수가 처용무를 연행하였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진주교방의 처용무 무용수는 말군을 입고 있어 남성이 연행한 것으로 보인다. 『교방가요』 처용가무 항목에 “복두(幞頭)에 혁대 띄고 수놓은 치마 입었네”라고 하였는데, 그림에는 하의로 바지 형태의 말군을 입고 있다. 따라서 지방에서도 남성이 처용무를 출 때는 말군을 입고 여성이 출 때는 치마를 입었던 것으로 보인다.
처용무에서 가장 중요한 무구는 처용탈이다. 궁중의 처용무에 쓰이는 처용탈은 납 구슬 목걸이에 주석 귀고리를 하고 검은색 사모를 쓰며, 사모 위에는 악귀를 몰아내고 상서로운 기운을 맞이하는 벽사진경의 뜻을 담은 모란 두 송이와 복숭아 열매 일곱 개를 꽂는다. 지방에서도 사모는 필수적인 무구였다. 그러나 사모 위의 장식은 꽃가지 정도로 단순하게 치장하였다. 『교방가요』의 처용은 사모만 쓰고 있는 형태이고, 《평안감사향연도》중 〈부벽루연회도〉에 묘사된 처용은 사모 양옆으로 꽃가지 하나씩을 꽂았다. 줄기에서 뻗어 나온 꽃송이가 작게 그려져 있어 궁중 처용탈의 모란 꽃과는 다른 모양이다. 이 꽃가지는 헌선도 무용수의 머리장식과 포구문 장식에도 꽂혀 있어서 처용탈을 위해 따로 제작된 것이 아니라 춤 공연에 널리 쓰인 장식임을 알 수 있다. 궁중 처용탈에 부착하던 목걸이나 귀걸이 장식, 그리고 복숭아 열매 등도 지방에서는 대부분 생략되었다.
한편, 처용의 생김새도 지역적 특성이 나타난다. 『악학궤범』 권5 「학ㆍ연화대ㆍ처용무합설」 조의 처용가에서는 처용의 생김을 “넓은 이마, 무성한 눈썹, 우그러진 귀, 붉은 얼굴, 우묵한 코, 웃는 입, 흰 이빨, 밀어 나온 턱, 숙어진 어깨, 부른 배, 굽은 허리, 긴 다리, 넓은 발” 등으로 묘사하고 있다. 처용탈은 「동경유록」에는 “기괴한 형상(奇詭狀)”이라 하였고, 〈선루별곡〉에 “쳐용탈이 괴다”라고 하였다. 『교방가요』 처용가무 항목에는 처용의 그림과 함께 “붉은 얼굴 번들번들 한 자(尺)나 되고”라고 하여 얼굴색이 붉고 번들번들 광이 나며 쳐진 턱까지 한 자나 될 정도로 긴 얼굴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입술 양쪽으로 수염이 그려져 있다. 《평안감사향연도》 중 〈부벽루연회 도〉에 그려진 처용탈도 우묵한 코에 턱이 매우 길게 뻗어 나왔는데, 궁중의 처용탈보다 길게 묘사되어 있으며 수염이 없다. 또 얼굴색이 붉은색으로 통일된 것이 아니고, 오방색 의상에 따라 흰색ㆍ파란색ㆍ검은색ㆍ붉은색ㆍ노란색으로 각 방위에 따라 미세하게 다른 점도 특이하다.
처용무는 원래 주술적 성격이 강한 춤이었으나 조선 시대에 궁중의 각종 연향에서 추어지고 지방에서도 관변의 행사에 쓰이면서 차츰 세속화된 모습으로 변화하였다. 특히 지방에서는 기괴한 처용탈의 형상으로 처용의 의미는 유지하였으나 기녀가 처용무를 추면서 복식에 변화가 나타났고 탈 모양에도 지방에 따른 특징이 나타났다. 처용무는 널리 처용설화를 공유하며 1,1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춤이 궁중과 지방에서 함께 전승되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국가무형문화재(1971)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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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자(金恩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