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동(動動), 아박무(牙拍舞)
고려 시대부터 전해진 향악정재의 하나로, 상아로 만든 악기인 아박(牙拍)을 들고 치면서 추는 춤
고려 시대부터 현재까지 전승되어온 향악정재이다. 무용수가 아박을 들고 치면서 월령체(月令體)로 된 가사[노랫말]에 따라 춤을 춘다. 궁중의 여러 잔치에서 여령(女伶)과 무동(舞童)이 추었고, 음악의 절주에 맞춰 북향ㆍ상대ㆍ상배할 때 혹은 신체의 특정 부위에 아박을 부딪치며 추었다.
고려 때부터 전하는
향악정재로, 아박의 이전 이름은 〈동동(動動)〉이다. 고려 시대에 민간 속요인 「동동」이 궁중으로 유입되어 춤과 함께 연행되면서 향악정재로 정착하였다. 『세종실록』권126 세종(世宗) 31년(1449) 10월의 기록에 〈동동〉 정재가 소개되어 있다. 『성종실록』에는 1481년(성종 12) 8월 3일, 인정전에서 사신을 환영하는 잔치를 베풀 때 성종은 〈동동〉을 가리켜 고구려 때부터 있었던 춤이라고 설명했다는 기록이 있다. 〈 동동〉 정재의 이름은 노래 가사인 「동동사(動動詞)」의 후렴에 나오는 ‘아으 동동다리’와 관련이 있다. 아박 정재의 이름은 상아(象牙)로 만든 악기인 박(拍)을 치며 춤을 춘 데서 비롯한 것으로, 〈동동〉 춤을 출 때 사용한 무구 이름을 본떠 붙여진 것이며 조선 전기에는 아박으로, 조선 후기에는 〈아박무〉로 불렀다. 헌종 『(무신)진찬의궤』(1848) 악장(樂章)에는 아박이 우리나라에 추어진 시기에 대해 “송(宋)나라 때의 악무(樂舞)인 아박을 우리 조정에서 향악정재에 사용했다”라고 하였다.
아박은 시대별 혹은 연향에 따라 여러 번 변화를 거듭하여 고려 및 조선 시대에 궁중에서 추어졌다. 특히 고려와 조선 전기에는 〈동동〉 노랫말에 맞춰 아박을 치면서 추는 가무악이 융합된 춤이었다. 조선 후기에는 창사와 춤을 분리하여 차례로 진행하는 연행 방식으로 변화되었다. 또한 지방 관아인 평양교방(平壤敎坊)과 진주교방(晉州敎坊)에서 아박을 추었다는 기록이『평양속지(平壤續誌)』, 이만용(李萬用)의「이선악부(離船樂府)」, 정현석(鄭顯奭)의『교방가요(敎坊歌謠)』(1865)에 각각 전한다. 한국전쟁 후 국립국악원 주도하에 김천흥(金千興, 1909~2007)과 이홍구(李興九, 1940~ )의 재현 안무로 무대 예술화되어 지금까지 전승되고 있다. 조선 전기 아박은 『악학궤범(樂學軌範)』(1493)을, 조선 후기 〈아박무〉는『정재무도홀기』를 참고하여 재현하였으나, 문헌[고무보] 내용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조선 후기 〈아박무〉 내용은『궁중무용무보』제6집에 전한다.
아박 무용수는 춤추기 전 아박을 설치하고 춤이 끝나면 거두어 가는 역할을 하는 악사(樂師)와 협무(挾舞)로 구성된다. 시대 및 연향별로 내용을 달리하여 추어진 기록이 『악학궤범』과 『정재무도홀기』에 전한다. 무용수는 고려와 조선 초기에는 협무 두 명이 추었고 외연에서 무동이 출 때는 2인무로, 내연에서 여령이 출 때는 4인무로 확장되기도 하였다.
아박 춤은 ‘북향무-상대무-상배무’를 기본적으로 추면서, 고려 시대에서는 아박을 허리에 꽂고 추는 춤과 앞으로 나아가는 일진(一進)ㆍ물러나는 일퇴(一退) 및 아박을 팔과 다리에 부딪치며 추는 춤이 있었다.『악학궤범』에 전하는 조선 전기 아박은 악사춤ㆍ무진춤ㆍ〈동동〉 만기춤ㆍ〈동동〉 중기춤ㆍ무퇴춤ㆍ악사춤 등 여섯 가지 구조로 구분하여 추었다. 일정한 후렴구가 반복되는 〈동동〉의 형식에 맞춰 같은 선율을 열세 번 반복하여 연주하는데, 이에 따라 춤 또한 아박을 허리에 꽂고 추는 무답(舞踏) 춤과 2월사부터 12월사까지 아박을 잡고 ‘무진-북향무-대무-배무-북향무-무퇴’하는 춤을 열한 번 반복하며 추었다.
조선 후기에는 좌우 팔을 위아래로 들거나[일비거일비저외하내거(一臂擧一臂低外下內擧)] 팔과 다리에 아박을 치면서 추었다.
현재 추어지는 조선 전기 아박은7) 「동동사」 노래 전체를 부르지 않고, 매 월(每月) 가사에 따라 춤에 변화를 주어 2월사부터 12월사까지의 춤사위를 모두 다르게 구성하여 추고 있다.
아박의 노랫말[가사]은 〈동동〉이다. 〈동동〉은 원래 민간에서 불리던 노래였으나, 궁중으로 유입되어 정재에 맞게 재구성되었다. 월령가(月令歌) 형식의 노래로서,기구(起句)를 포함한 12월, 총 13절의 가사가 한 선율에 불리는 유절형식으로 진행된다. 『고려사』「악지」 〈동동〉의 후주에는 〈동동〉 가사가 송축(頌祝) 혹은 송도(頌禱)를 바탕으로 한 선어[신선의 말]의 말을 본 따서 지은 것으로 소개하면서도 “가사는 이속(俚俗)하여 싣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악학궤범』에 기록된 조선 전기 아박 창사인 「동동사」는 모두 13절로 구성되어 있다. 크게 세부분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첫째 기구사는 ‘지존(至尊)인 임금에 대한 송축 및 송도의 뜻’을 아뢰는데, 당악정재의 구호와 같은 역할을 한다. 둘째 정월사[1월사]는 ‘임과 떨어져 홀로 살아가는 외로움을 한탄하는’ 내용을 부른다. 셋째 2월사부터 12월사까지는 ‘시간이 흘러도 변함없는 사랑의 염원’을 부르는데, 마지막 12월사에서는 이룰 수 없는 사랑의 아픔을 강조하여 임을 사모하는 마음을 극대화 하였다. 아박의 〈동동〉 가사는 조선 전기까지 불려 지다가 조선 후기 1829년(순조 29) 기축년에 효명세자 가 ‘백보향(百寶香)…’으로 시작되는 칠언사구(七言四句)의 한문 시(詩)로 새롭게 바꾸어 부른 내용이 『정재무도홀기』에 전한다. [창사] 百寶香身嫋嫋來, 輕盈妙舞芙蓉臺. 백보향신요뇨래, 경영묘무부용대. 十二慢腔動動樂, 曲終宛轉拍聲催. 십이만강동동악, 곡종완전박성최. [창사] 보배로 꾸민 향그런 여인들 한들한들 걸어 나와 부용대에서 사뿐사뿐 묘한 춤을 추는구나. 열두 가락 음악은 동동곡(動動曲)인데, 고운 가락 끝이 나자 박(拍) 소리 잦아지네 -출처: 김천흥, 『정재무도홀기 창사보1』, 번역: 강명관
아박의 반주 음악은 〈동동〉이다. 고려 시대에는 〈동동〉 일강(一腔)ㆍ이강(二腔)ㆍ삼강(三腔)으로, 조선 전기에는 〈동동〉 만기(慢機)ㆍ중기(中機)로 연주하였다. 〈동동〉은 정간보(井間譜)에 오음약보(五音略譜)로 기록되어 『대악후보(大樂後譜)』에 전한다.
조선 후기에는 〈정읍(井邑)〉만기로 연주하였고, 현재는 향당교주ㆍ도드리ㆍ타령 장단으로 구성하여 연주한 것이『궁중무용무보』제6집에 전한다.
순조 『(무자)진작의궤』(1828)에 소개된 아박의 무동 복식은 흑단령(黑團領)ㆍ홍색바탕에 남색 선을 두른 상[홍질남선상(紅質藍縇裳)]을 착용하였다. 고종 『(정해)진찬의궤』(1887)에 소개된 아박의 여령 복식은, 화관(花冠)을 쓰고, 황초단삼(黃綃丹衫)을 입고, 안에는 남색 치마를 입고[濫綃裳], 겉에는 홍초 치마를 입고[紅綃裳], 홍단금루수대(紅緞金縷繡帶)를 착용하고, 오색한삼(五色汗衫)을 매달고, 초록혜(草綠鞋)를 신는다. 무구인 아박은 상아(象牙) 혹은 나무로 만든 판 여섯 개를 위쪽에 구멍을 뚫어 끈으로 연결하여 만드는데,『악학궤범』 향악정재악기도설(鄕樂呈才樂器圖說)에 그 기록이 전한다.
아박은 음악의 절주에 따라 특정 방향과 특정 신체에 아박을 부딪치며 추어지는 춤으로, 음악 연주와 춤 속에서의 박(拍) 소리가 서로 긴밀하게 상응하는 특징을 가진다.
국립국악원, 『궁중무용무보 제6집: 아박무, 향발무, 보상무』, 국립국악원, 1993. 문숙희, 『고려말 조선초 시가와 음악형식』, 학고방, 2009. 조규익 외 3인, 『동동: 궁중 융합무대예술, 그 본질과 아름다움』, 민속원, 2019. 김영운, 「고려가요의 음악형식 연구」, 『한국음악산고』 6, 1995. 손선숙, 「무고와 아박무의 무답(舞踏) 비교 고찰」, 『한국문학과예술』 37, 2021. 엄국현, 「동동 연구」, 『인제논총』 13, 1997.
손선숙(孫善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