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유락무(船遊樂舞), 선유락정재(船遊樂呈才)
화려하게 채색된 배를 둥글게 에워싸고 돌면서 〈어부사(漁父詞〉를 부르며 추는 춤
조선 후기 평안도 지역에서 성행하였으며, 정조 때 궁중춤으로 채택되어 궁중 연향에서 꾸준히 추어졌다. 궁중춤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의 군무로, 채선(彩船)을 가운데 두고 집사의 호령에 따라 군례 의식을 거행한 후, 배를 에워싸고 돌면서 어부사를 부르며 행선(行船)하는 모습을 연출한다.
선유락은 지방에서 먼저 연행되다가 18세기 말 궁중으로 유입된 춤이다. 선유락의 기원과 관련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에 선유락이 신라 때 있었다는 기록을 근거로, 사선악부(四仙樂部)ㆍ차선(車船) 등이 신라로부터 고려 팔관회에 이르기까지 성행하다가 후대의 선유락으로 정착되었다고 보는 설이다. 다른 하나는 해로를 통한 사신들의 사행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다. 고려 때 중국 남경(南京)으로의 사행이나 17세기 명ㆍ청 대립기의 사행은 바닷길을 통해 왕래가 이루어졌는데, 뱃길의 무사귀환을 기원하며 해로 사행의 군례 절차를 모방하여 선유락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박지원(朴趾源)(朴趾源, 1737~1805)의 『열하일기(熱河日記)』「막북행정록」이나 이우준(李遇駿, 1801 ~ 1867)의 『몽유연행록(夢遊燕行錄)』, 박사호(朴思浩)의 『심전고(心田稿)』, 최영년(崔永年, 1859~1935)의 『해동죽지(海東竹枝)』(1925) 등에서 선유락이 배를 타고 떠나는 이와 남겨진 기녀가 이별하는 이야기에서 비롯되었다는 기록을 찾을 수 있다. 궁중에서 선유락은 1795년(정조 19) 정조가 혜경궁홍씨(惠慶宮洪氏)의 회갑연을 기념하여 화성행궁의 봉수당(奉壽堂)에서 올린 진찬례2) 때 처음 추어졌다. 지방에서 〈발도가(發棹歌)〉ㆍ〈배따라기곡(排打羅其曲)〉ㆍ〈이선요(離船謠)〉 등으로 불린 것과는 달리 선유락이라는 춤 이름으로 정착되었다. 선유락은 궁중춤으로 채택된 이후 가장 인기 있었던 정재 종목 중 하나로 대한제국 시기까지 이루어진 궁중 잔치에서 빠짐없이 연행되었으며, 규모가 가장 큰 군무였다. 선유락을 추었던 여령은 평양과 성천에서 선상(選上)된 예가 많아 사행로였던 평안도 지역과 선유락의 밀접한 관련성을 보여준다. 일제강점기에는 조합과 권번을 중심으로 선유락을 교육하고 연행하였다. 1913년 덕수궁에서 거행한 고종 탄신일 축하연에서 다동조합과 광교조합의 기생들이 선유락을 추었고,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에서도 다동조합과 광교조합ㆍ신창조합 기생들이 선유락을 추었다. 또한 하규일(河圭一, 1867~1937)이 조선권번에서 선유락을 비롯한 여러 궁중춤을 가르쳤다고 전한다. 이왕직아악부의 무보에는 춤의 이름만 단편적으로 기록되어 있을 뿐 전승이 끊겼다가, 국립국악원 주도하에 1973년 김천흥(金千興, 1909~2007)이 재현 안무하여 무대 위에 다시 올랐고 현재까지 활발하게 공연되고 있다.
선유락은 궁중춤 중에 가장 규모가 큰 군무로 무원 구성은 집사(執事)ㆍ동기(童妓)ㆍ내무(內舞)ㆍ외무(外舞)로 구분된다. 집사는 두 명으로 구성되며 배 앞에 서서 군례를 호령하기 때문에 호령집사(號令執事) 혹은 청령집사(聽令執事)라고도 하였다. 1795년 봉수당 진찬을 그린 〈화성능행도병풍〉이나 〈원행정리의궤도〉를 보면 배 위에 집사 두 명이 서 있는데, 선유락이 궁중에서 처음 연행될 때는 「막북행정록」에서 동기를 소교(小校)로 꾸몄던 것과는 다르게 동기를 따로 두지 않고 집사가 배 위에 올라 호령하였다.
동기 두 명은 배에 앉아 돛을 잡는 집범(執帆, 거범(擧帆)이라고도 함)과 닻을 잡는 집정(執碇; 거정(擧碇)이라고도 함)을 나누어 담당하였다. 그리고 때에 따라 노를 잡는 집노(執櫓) 역할을 겸하기도 하였다. 많은 인원이 편성될 때는 동기ㆍ집범ㆍ집정ㆍ집노 등의 역할을 각기 따로 편성하였다. 또한 무동이 선유락을 출 때는 동기를 동자(童子)로 대체하였다.
둥글게 배를 에워싸고 춤을 추는 무용수는 내무(內舞)와 외무(外舞)로 나뉜다. 내무는 네 명 혹은 여섯 명으로 구성되며, 채선 옆에서 줄을 끌어 배를 움직이는 역할이기 때문에 예선(曳船)이라고도 하였다. 외무는 열다섯 명에서 서른일곱 명까지 다양한 인원 구성으로 내무의 바깥에서 큰 원을 그리며 춤추었다. 군례를 행할 때는 내무와 외무가 순령수(巡令手)가 되어 집사의 호령에 답하였다.
선유락의 구조는 군례 의식에 맞춰 행선준비→행선→하선으로 진행된다. 먼저 악사가 채선을 인솔하여 가운데에 놓고, 동기는 배 중앙에 좌우로 등지고 앉으며, 내무와 외무는 좌측으로 돌면서 서로 연이어 선다. 행선준비는 집사 두 명의 호령으로 군례가 진행되는데, 초취(初吹)ㆍ이취(二吹)ㆍ삼취(三吹)로 세 차례 나각을 불어 출발을 알렸다. 이어 ‘명금이하(鳴金二下)’를 호령하여 징을 두 번 치면 악대가 대취타를 연주하고, 집사가 다시 행선하라고 호령하였다. 배가 바다로 나가는 행선에서는 내무와 외무가 배를 끌고서 회무하며 〈어부사(漁父詞)〉를 노래하였다. ‘명금삼하(鳴金三下)’의 호령으로 징을 세 번 치면 음악이 그치면서 퇴장하는 것으로 하선을 표현하였다.
선유락은 춤사위가 단순한 편이다. 군례 의식에서는 집사기의 호령에 따라 무용수가 순령수 역할을 하기 때문에 춤사위가 없다. 행선에서는 무용수가 양팔을 어깨 높이로 펼쳐 든 상태로 배를 에워싸고 둥글게 도는데, 배를 감싸고 도는 회무(回舞)는 배의 무사귀환을 바라는 축원의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현재 재현된 선유락은 홀기의 기록보다 다양한 동작과 춤사위가 추가되었다.
선유락은 ‘행선(行船)하라’는 호령 후에 무용수들이 일제히 배를 끌고 회무하며 〈어부사〉를 노래한다.
이때 부르는 〈어부사〉는 고려 때부터 전하던 「어부가(漁父歌)」를 이현보(李賢輔, 1467~1555)가 고쳐 지은 것으로 조선 후기 가사로 정착되었다. 내용은 늙은 어부가 배를 타고 고기잡이를 하는 유유자적한 생활을 그린 것인데, 배를 띄우고 노를 젓는 등의 내용이 선유락의 춤 전개와 연결된다. 선유락에서는 가사 〈어부사〉의 전 8장 중 제1장과 제2장을 노래한다. 〈어부사〉의 노랫말은 한문과 한글이 섞여 있어서 의궤에는 가사를 싣지 않았으나 홀기에는 모두 실려 있으며, 『교방가요(敎坊歌謠)』 (1865)와 『가곡원류(歌曲源流)』(1872)에도 실려 있다.
雪鬢漁翁(설빈어옹)이 住浦間(주포간)야
自言居水勝居山(자언거수승거산)을
여라 여라
早潮纔落晩潮來(조조재락만조래)라
至匊悤至匊悤於思臥(지국총지국총어사와)니
倚船漁父一肩高(의선어부일견고)라
귀밑머리 하얀 늙은 어부 개펄 사이에 살면서
“물에서 사는 것이 산에서 사는 것보다 낫다”고 스스로 말하네
배 띄워라 배 띄워라
아침 물결이 겨우 물러나자 저녁 물결이 밀려오는구나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하니
배에 기댄 어부 한 어깨가 으쓱거린다
선유락의 반주음악은 여러 연향의궤에 〈만파정식지곡(萬波停息之曲)〉 등의 아명과 함께 〈향당교주(鄕唐交奏)〉 혹은 〈원무곡(原舞曲)〉으로 기록되어 있고, 각종 홀기에는 행선할 때 〈취타(吹打)〉를 연주한다고 하였다. 여기서 〈취타〉는 내취가 연주하는 〈대취타〉를 가리킨다.
내취 악대는 정수(鉦手)ㆍ나수(鑼手)ㆍ호적수(號笛手)ㆍ자바라수(啫哱囉手)ㆍ고수(鼓手)ㆍ나각수(螺角手)ㆍ나발수(喇叭手)로 구성되었다. 『교방가요』의 ‘선악’(船樂) 에 대취타와 삼현육각 편성의 두 악대가 묘사된 점으로 미루어, 궁중의 선유락에도 내취 이외에 관현 반주가 따랐을 것인데 기록에는 〈향당교주〉를 연주한 것으로 나타난다.
현재 국립국악원에서 재현한 선유락 반주음악은 무용수들이 배를 끌고 입장할 때 〈대취타〉를 연주하고, 〈어부사〉를 부를 때는 장구 반주가 따른다. 무용수들이 일제히 배를 둘러싸고 회무할 때는 〈타령〉을, 끈을 잡고 배를 움직일 때는 〈양청도드리〉를 연주한다. 이밖에도 무용수가 절을 할 때와 호령집사가 ‘명금삼하’를 호령한 후 춤을 마칠 때 짧게 음악이 들어간다. 악대는 〈대취타〉 악대와 관현악 반주 악대의 두 대로 편성된다. 악기 편성은 유동적인데, 대취타 악대는 태평소ㆍ나각ㆍ나발ㆍ용고ㆍ자바라ㆍ징ㆍ장구가 편성되며, 관현악 반주 악대는 집박ㆍ피리ㆍ대금ㆍ해금ㆍ장구ㆍ좌고 등의 삼현육각 편성에 단소ㆍ가야금ㆍ거문고ㆍ양금 등이 추가되기도 한다.
선유락 복식은 집사ㆍ동기ㆍ무원의 복식이 각각 다르며 같은 역할이더라도 기록에 약간씩 차이를 보인다. 집사는 무관 공복인 남색 철릭[첩리(貼裏)]에 진홍색의 광대(廣帶)를 띠고, 호수(虎鬚;융복을 입을 때 쓰는 붉은 갓의 네 귀에 꾸밈새로 꽂던 장식)를 꽂은 주립(朱笠)을 쓰며, 수화자(水靴子)를 신는다.
어깨에는 동개(筒箇; 활과 화살을 꽂아 넣을 수 있도록 만든 도구)를 두르고, 허리에 환도(環刀; 군복에 갖추어 차던 군도(軍刀))를 차며, 손에는 등채[등편(籐鞭); 등채라고도 함. 무장(武裝)할 때 갖추는 의장(儀仗)용 막대]를 잡는다. 동기(童妓)는 화관을 쓰고 초록 갑사 당의를 입으며 홍사 치마에 홍주 바지를 입고 홍단수대(紅緞繡帶)를 매며 초혜(草鞋)를 신는다.
내무와 외무를 담당하는 무원들은 화관을 쓰고 긴 길이의 남초상(藍綃裳)을 착용한 후 위에 다시 겹쳐 입는 앞치마 형태의 작은 덧치마인 홍초상(紅綃裳)을 입었다. 그리고 그 위에 다시 황초단삼을 입고 홍단금루수대(紅緞金縷繡帶)를 띠었다. 팔에는 오색한삼(五彩汗杉)을 끼우고 신발은 초록혜(草綠鞋)를 신었다.
선유락에서 가장 중요한 무구는 채선(彩船)이다. 채선은 배 형태의 무구로 배의 옆면과 돛에는 화려한 채색이 되어있다. 배의 몸체 양편으로는 화조(花鳥) 등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배 바닥에는 평평하게 판을 깔았고, 배 중앙에는 대나무 돛대에 두 마리 용과 구름 문양이 금박으로 화려하게 그려져 있는 홍운문단(紅雲紋緞)으로 된 돛을 걸었다. 경우에 따라 돛대 끝에는 초롱 한 쌍을 달기도 했다. 뱃머리는 용머리 조각으로 장식하였으며, 닻과 닻감개를 설치하였다. 배의 후미에는 바람의 방향을 보기 위해 세운 점풍기(占風旗) 두 개와 노를 달았다. 채선의 받침대는 회전형으로 만들어 배의 옆면 네 곳에 끈을 달아 잡고 돌릴 수 있도록 하였다.
선유락은 조선 시대 지방 관아의 춤이 궁중화되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막북행정록」(1780년)의 〈배따라기곡〉과 『원행을묘정리의궤』(1795)의 선유락을 비교해보면, 선유락이 수용되는 과정에서 춤의 주제와 성격이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배따라기곡〉과 선유락은 둘 다 군례에 따른 행선 과정을 담고 있다. 그런데 〈배따라기곡〉은 〈어부사〉 외에도 〈선리곡(船離曲)〉을 불러 배가 떠나며 이별하는 슬픔을 강조한 반면, 선유락은 〈어부사〉만을 불러 유유자적한 뱃놀이의 즐거움을 강조하였고 제목도 이에 맞게 바꾸었다. 요컨대 선유락은 〈배따라기곡〉의 춤 절차와 형식을 수용하면서 궁중 연향에 맞게 뱃놀이의 즐거움을 주제로 유희적 성격을 부각시켰다는 점에서 특징을 찾을 수 있다. 한편 선유락은 춤과 음악, 노래 모두에서 조선 후기 궁중문화와 지방문화의 교섭 양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선유락의 춤 절차나 내용은 궁중과 지방의 공통점과 차이점으로 각기 지향점이 달랐던 연출의도를 알 수 있다. 또한 대표적인 군영음악인 〈대취타〉와 12가사 중 하나인 〈어부사〉가 선유락을 통해 전승됨으로서 조선후기 군영과 민간의 음악문화가 궁중문화와 교섭되는 양상을 살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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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자(金恩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