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지역을 중심으로 전승된 교방춤으로, 여성 무용수가 칼을 들고 희롱하며 추는 춤
진주검무는 조선 후기부터 현재까지 진주교방과 진주권번을 통해 전승되었고, 여성 네 명, 또는 여덟 명이 추는 검무이다. 조선 후기에 전국적으로 유행한 검무는 호국(護國)의 의미와 무예를 숭상하는 상무(尙武) 정신을 담고 있다. 진주검무도 같은 맥락이며, 가면을 쓰고 추는 검무인 황창무와 다른 춤이다. 초반에 한삼을 끼고 춤추다가 손춤을 추고, 앉아서 칼을 희롱하다가 칼을 잡은 후에는 일어나서 상대하며 칼춤을 춘다.
현행 진주검무가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조선 후기에 검무가 전국적으로 유행했고, 1789년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19세 때 영남우병마절도사였던 장인 홍화보(洪和輔)가 베푼 진주 촉석루의 연회에서 진주 기생이 춘 검무를 감상하고 쓴 〈무검편증미인(舞劒篇贈美人)〉에서 진주검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1872년 진주의 교방에서 행하던 가무를 기록한 『교방가요(敎坊歌謠)』(1865)에서도 검무를 볼 수 있다. 정현석(鄭顯奭)은 진주검무의 감상을 아래와 같이 표현했다. 쌍쌍의 가녀린 손길에 칼 빛은 서슬이 푸른데 雙雙纖手劍光寒(쌍쌍섬수검광한) 나비들 날아와 싸우는 듯 물러나는 듯 鬪去鬪來胡蝶團(투거투래호접단) 곡이 바뀌며 다시 연풍대가 연주되니 曲終更奏軟風隊(곡종경주연풍대) 조비연인 듯 가벼운 몸은 구르는 구슬 같네 飛燕身輕如轉丸(비연신경여전환) 이 내용은 조선 후기에 전국적으로 추어진 검무의 형상이나 정서와 일맥상통한다. 쌍검을 들었으며, 검으로 서로 다투며 진퇴하고, 연풍대 동작이 특이하여 제비처럼 가볍고 날래며, 검기(劍氣)도 느껴졌던 것이다. 당시에는 4인 검무로 추어졌다.
일제강점기에도 진주예기조합과 진주권번의 기녀들이 진주검무를 추었으니, 진주검무는 최순이(崔順伊, 일명 최완자, 1884? 1892?~1969)를 중심으로 전승되었다. 특히 논개의 제사인 의암별제에서 검무가 반드시 추어졌다. 진주 기생들은 논개의 후예로서 자부심이 높았다고 한다. 1949년부터 진주에서 열린 개천예술제에서 진주검무를 꼭 추었는데 1965년부터 8인 검무로 추었다. 전통춤 전반이 침체한 중에 진주검무는 1967년 국가무형문화재 로 지정되었고 지정 당시 보유자는 이윤례(1903~1995)ㆍ김자진(1903~1980)ㆍ김옥주(1907~1978)ㆍ김수악(김순녀, 1926~2009)ㆍ이음전(1915~1998)ㆍ강귀례(1905~1978)ㆍ최예분(1912~1993)ㆍ강순금(1926~1975)이었다. 이들은 진주권번 시절 예기로 활동했으며, 1970년에 촬영한 흑백 영상에 그 모습이 담겨 있다.
초기 예능보유자가 작고한 후 성계옥(成季玉, 1927~2009)ㆍ정금순(1930~2017)ㆍ정필순(?~1999)이 진주검무를 전승했고, 현재 보유자는 김태연과 유영희이다. 진주민속예술보존회가 진주검무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조선 후기 진주검무에 대한 기록과 비교하면 현재의 진주검무는 도입에서 한삼춤이 추가되었고, 마지막에 칼을 던지는 동작[擲劒]이 없어졌다. 전반적으로 검기(劍氣)는 순화되고 우아해졌다.
진주검무는 조선 후기에 전국적으로 유행했던 여성 무용수가 추었던 검무에 속한다. 창사나 구체적인 서사는 없지만, 신라 화랑 황창랑이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호국(護國)의 의미와 무예를 숭상하는 상무(尙武) 정신을 주제로 추는 춤이다.
구성은 『교방가요(敎坊歌謠)』에 홀기와 유사한 설명이 있으나 세세하지는 않다. 일제강점기와 현재까지 전승된 진주검무의 구성으로 보면 한삼춤 → 선 손춤→ 앉은 손춤 → 앉은 칼춤 → 선 칼춤 → 연풍대 → 제행이무로 이어진다.
춤사위는 한삼을 끼고 추는 평사위ㆍ배맞추기ㆍ숙인사위ㆍ뿌릴사위ㆍ쌍어리ㆍ결삼사위가 있고, 손춤으로 추는 깍지떼기ㆍ방석돌이ㆍ삼진삼퇴ㆍ자락사위ㆍ앉은 맨손칼사위가 있고, 칼을 들고 추는 위엄사위ㆍ삼진삼퇴ㆍ원대형만들기와 연풍대(겨드랑사위ㆍ옆구리사위ㆍ쌍칼사위ㆍ외칼사위) 동작과 윗사위ㆍ칼사위 등이 있다.
반주 악기는 피리 2ㆍ대금 1ㆍ해금 1ㆍ장고 1ㆍ북 1로 삼현육각 구성이다. 반주 장단의 구성은 1966년 첫 조사의 경우 〈염불〉 → 〈타령〉 → 〈자진타령〉 → 〈타령〉 → 〈자진타령〉→ 〈몹시 빠른 타령〉으로 진행하고 인사한다. 그러나 2002년 진주검무의 기록 영상에는 〈다스름〉 → 〈염불〉 → 〈타령〉 → 〈자진타령〉 → 〈타령〉 → 〈자진타령〉 → 〈자진모리〉 → 〈자진타령〉으로 진행하고 인사한다.
현행 진주검무의 복식은 파란 치마에 삼회장 흰 저고리를 입고, 안감이 홍색인 남색 전복(戰服)에 홍색 전대(戰帶)>를 착용한다. 흑색 전립(戰笠)을 쓰고, 한삼은 백ㆍ홍ㆍ청ㆍ분홍ㆍ남ㆍ녹ㆍ황ㆍ연두ㆍ자주의 9색 색동이다. 문화재 지정 당시와 큰 변화는 없다.
무구인 칼은 조선 말까지 칼손잡이와 칼몸이 곧바로 연결된 장검이었으나, 일제강점기부터 1970년대 무렵에는 칼목이 돌아가는 형태로 정착되었다. 손잡이를 돌리면 칼몸이 빙글빙글 돌아갔고, 손잡이와 칼몸 사이에 구름 모양의 쇳조각이 끼워져 있어 찰랑찰랑 소리가 난다. 그런데 현행 무구는 칼의 몸이 돌아가지 않고 손잡이와 곧게 연결되어 있다. 칼 길이는 23cm, 손잡이는 10cm 이고, 칼끝과 손잡이 끝에 장식용 색실이 달려 있다.
진주검무는 조선 후기부터 현재까지 전승되며, 시대마다 분명한 공연 이력을 보여주는 춤이다. 20세기를 거치면서 다른 지역 권번의 검무들은 전승이 위태로워진 것에 비하여 진주검무는 활발히 이어져 왔는데, 이는 문화재보호법 시행에 의한 1966년의 조사 당시 진주권번에서 활동했던 예인들이 다수 생존하고 있어 연행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진주검무는 1967년에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진주검무는 조선 후기 검무와 현행 검무들을 역사적으로 연행적으로 이어주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예술사적 의의가 높다. 그리고 현행 여성 검무들 중 칼을 잡기 전에 한삼춤을 추는 검무의 대표적 사례이다.
국가무형문화재(1967) 유네스코 인류 무형유산(2008)
국립문화재연구소 제작, 〈진주검무〉 영상, 국립무형유산원, 2002. 문화재관리국 제작, 〈진주검무〉 영상, 국립무형유산원, 1970. 김천흥ㆍ박헌봉ㆍ유기룡, 『무형문화재조사보고서 제18호: 진주검무』, 문화재관리국, 1966. 성계옥ㆍ차옥수, 『진주검무: 중요무형문화재 제12호』, 화산문고, 2002. 임수정, 『한국의 교방검무』, 민속원, 2011. 이종숙, 「〈진주검무〉 중요무형문화재 지정 이후의 변화에 관한 소고」, 『문화재』 49/1, 국립문화재연구소, 2016.
김영희(金伶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