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암가무(義菴歌舞)
논개의 의로운 뜻을 기리기 위해 1868년부터 진주에서 행한 의암별제의 노래와 춤
임진왜란 때 왜군에 맞섰던 논개(論介, ? ~ 1593)의 의로운 뜻을 기리고 넋을 위로하기 위해 1823년 의기사가 창건됐고, 1868년 의암별제를 시작했다. 음력 6월 28일에 행했으며, 제사의 헌관과 제관을 진주 기생들이 맡았다. 제사 각 과정에 모두 노래와 춤이 있어, 이를 의암별제가무라 한다. 1927년부터 10년간 행해졌으며, 1992년에 진주민속예술보존회 중심으로 복원되어 거행되고 있다.
의암별제가무는 임진왜란 중 진주성이 함락되자 1593년 왜장을 유인하여 끌어안고 남강으로 떨어져 왜장과 함께 죽은 논개를 기리기 위해 시작되었다. 논개를 의로운 기생, 의기(義妓)라 칭했으며, 1740년(영조 16) 의암비(義庵碑)에 정문(旌門; 선행을 권장하기 위해 세우는 붉은 색 문) 의기논개지문(義妓論介之門)이 세워졌고, 1823년(순조 23) 진주목사 홍백순이 논개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의기사(義妓祠)를 창건했다. 이곳에서 춘추로 ‘촉석강변의기제(矗石江邊義妓祭)’를 지냈고, 6월에는 별도의 길일을 택하여 ‘의암별제’를 지냈다. 한편 의암별제를 6월 그믐날 함성제(陷城祭;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 전투에서 희생된 넋을 기리기 위한 제사)의 일환으로 보고 ‘촉석루함성제’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후 진주목사 정현석이 1868년(고종 4) 의기사를 다시 고쳐 세우고, 그해 6월에 ‘의암별제’를 거행했다. 진주부민들의 지지로 의기 논개를 공적으로 추모한 것이다.
이에 대한 절차가 『교방가요』에 설명되어 있다. 유월 중 좋은 날을 택하여 5일 전에 제관을 뽑아 차첩(差帖)을 보내고, 그들이 3일 동안 재계하게 한다. 늙은 기녀 중에 초헌관(첫 번째 잔을 올리는 제관)ㆍ아헌관(두 번째 잔을 올리는 제관)ㆍ삼헌관(세 번째 잔을 올리는 제관)을 뽑고 의관들도 기녀 중에 선발해서 역할을 맡았다. 초헌ㆍ아헌ㆍ삼헌의 과정에서 각 악장을 노래하고 춤도 추었다. 또 삼헌례 후에는 〈의암별곡〉을 노래하고, 제관과 참석한 기생들이 모두 춤추었다. 의암별제의 과정을 가무로 행한 것이다.
의암별제는 1910년 경술국치 후 중단되었다가 1920년 진주예기조합 중심으로 의기사를 다시 수리하기 위해 중수발기회(重修發起會)를 조직하면서 1927년 음력 6월 28일에 다시 거행되었다. 당시 진주권번 기생이었던 최순이(崔順伊, 1884~1969)가 아헌관으로 참여하고 집사로 제문도 낭독했다. 그의 회고에 의하면 의암별제를 마치고 가무음률이 3일 동안 지속되었다고 한다. 의암별제는 진주의 큰 축제였다. 일제강점 말기에는 행하지 못하였으나, 해방 후 권번 출신 노기들이 ‘의기창렬회(義妓彰列會)’를 조직하여 의기사에서 겨우 제사만 모셨다. 『교방가요』가 발견된 후 (사)진주민속예술보존회 회장 성계옥(成季玉, 1927~2009)을 중심으로 1992년 10월 4일에 의암별제가 복원되었다. 춤을 김천흥(金千興, 1909~2007)이 재구성하였다. 2002년부터는 진주시에서 주최하는 진주논개제로 의암별제를 거행하고 있다.
의암별제가무의 내용은 논개의 충절을 기리는 것이다. 덕망있는 노기(老妓) 중에 초헌관ㆍ아헌관ㆍ종헌관을 뽑고, 당상집례ㆍ당하집례는 홀기(笏記)를 읽을 수 있는 사람으로 뽑는다. 역할은 대축ㆍ전사관ㆍ찬자(동ㆍ서창 두 명)ㆍ알자ㆍ사존ㆍ봉작ㆍ준작ㆍ봉향ㆍ봉로ㆍ노래하는 사람 여덟 명ㆍ춤추는 사람 열두 명ㆍ당상악공 다섯 명ㆍ당하악공 여섯 명으로 구성한다. 의암별제의 진행은 영신례(迎神禮)ㆍ초헌례(初獻禮)ㆍ아헌례(亞獻禮)ㆍ삼헌례(三獻禮)ㆍ의암별곡과 춤ㆍ철변두(撤邊豆)ㆍ음복(陰伏)으로 이어진다.
1. 영신례 : 영신곡을 연주하고 악이 그치면 향을 세 번 올린다. 노래하는 사람은 상향악장을 계면조(界面調)로 노래하는데, 당상악이 반주한다. 무자(舞者)는 춤을 춘다. 노래할 때는 당상악을 연주하고, 춤을 출 때는 당하악을 함께 연주한다.
2. 초헌례 : 축문(祝文)을 읽는다. 초헌관이 절을 한다. 악이 시작되면 노래하는 사람은 초헌악장을 계면중창(界面中唱)으로 노래한다. 악이 시작되면 춤추는 사람은 춤을 춘다.
3. 아헌례 : 아헌관이 절을 한다. 악이 시작되면 노래하는 사람은 아헌악장을 계면삼창(界面三唱)으로 부른다. 춤추는 사람은 춤을 춘다.
4. 삼헌례 : 삼헌관이 절을 한다. 악이 시작되면 노래하는 사람은 삼헌악장을 우락조(羽樂調)로 부른다. 춤추는 사람은 춤을 춘다.
5. 의암별곡 : 악이 시작되면 노래하는 사람이 처사가조로 〈의암별곡(義巖別曲)〉을 부른다.
6. 의암별곡 춤 : 악이 연주되면 제관 이하 참반한 모든 기녀들이 함께 춤을 춘다.
7. 철변두 : 헌관 이하 모든 집사가 절을 하고 물러난다.
8. 음복 : 제사를 마치면 제사 음식을 나누어준다. 이후에 여흥가무가 어우러진다.
이러한 과정에서 노래는 〈상향악장〉ㆍ〈초헌악장〉ㆍ〈아헌악장〉ㆍ〈삼헌악장〉ㆍ〈의암별곡〉을 불렀다. 춤은 영신례ㆍ초헌례ㆍ아헌례ㆍ삼헌례에 각각 춤이 있고, 의암별곡 후 제관 이하 모든 기녀들이 함께 추는 춤이 있다. 여흥가무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없으나, 일제강점기에는 〈검무〉, 〈승무〉 등을 추었다.
1) 의암별곡(義庵別曲):
矗石樓에올나안저 古今事를생각하니
義巖에놉푼節槪 千秋에奇絶하다
我東方禮義國에 三綱五倫分明하여
節義를崇尙하니 忠臣義士許多하다
예로붓허晉陽城이 繁華佳麗第一이라
飛鳳山은蛾眉갓고 靑川江은襟帶되여
山川에말근긔운 論娘子가되여나서
氷玉갓흔資質이오 霜雪갓흔마암이라
天生에고은몸이 路柳墻花갓틀손가
時運이不幸하여 壬辰年을當하오니
凜々忠節三壯士난 一盃笑指南江水라
不祥하다六萬人이 一日並命하단말가
잇에論娘子가 忠憤이激動하여
爲國하여殉節할일 一片心에決斷하고
綠衣紅裳甲冑삼고 螓首蛾眉劍戟삼아
將臺갓흔바위우에 올나안저기다리니
금수갓튼賊將놈이 압헤와서犯手한다
手로부여잡고 万頃淸波러지니
天地가黯慘하고 鬼神이우난도다
万古에빗난綱常 一女子가붓자부니
그忠誠그義氣가 女中烈士이안인가
南江明月발근빗시 花容玉兒다시본듯
半夜에風雨소슬푸고凄凉하다
碑셰워서紀錄하고 祠堂지여祭祀하니
義岩에높흔일음 千萬年에傳하리라
城外城內女妓들이 모도모여致誠할제
管絃歌舞찬난하고 花果香燭壯할시고
太平成事이안인가 國泰民安하오리라
의암별제가무의 창사는 의기 논개가 촉석루에서 행한 일과 그 일에 대한 의의, 논개에 대한 추모를 내용으로 담고 있다. 상향악장 戊辰年(年則隨稱)六月日에 단을모어焚香하여 三百名女妓들이 精誠으로致祭하니 論娘子忠魂義魄이 리실가하노라 초헌악장 矗石樓발근달이 論娘子의넉시로다 向國한一片丹心 千萬年에비취오니 아마도女中忠義난 이인가하노라 아헌악장 말고말근南江水야 壬辰이를네알니라 忠臣과義士들이 몃〻취나젓난고 아마도女中丈夫난 論娘子인가하노라 삼헌악장 海東國三千里에 許多한바위로다 風磨雨洗하면 어느돌이안變하리 그中에一片義巖언 萬古不變하리라
『교방가요』의 그림을 보면 복식에서 헌관 세 명과 노래하는 사람 여덟 명이 노란색 저고리에 파란 치마를 입고, 춤추는 사람들은 붉은 치마에 노란 저고리를 입었다. 현행 의암별제에서는 모두 당의를 입는다.
기생이라는 하층 계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논개의 애국충절을 기리기 위해 행한 의암별제는 진주지역의 높은 관심과 지지를 받았던 제사이며 축제였다. 의례의 전 과정을 기생들이 주관하고, 과정마다 춤과 노래가 함께 올려졌다는 점에서 관이 주도했던 다른 제례와의 차별점이 분명하다. 진주의 교방문화가 반영된 독특한 제례이며, 교방의 가무가 연행되었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
성계옥, 『진주의암별제지』, 진주민속예술보존회, 1987. 정현석 편, 성무경 역, 『교방가요』, 보고사, 2002. 김영희, 「진주권번의 활동과 의의」, 『한국음악사학보』 65, 2020. 신유빈, 「의암별제 음악 복원의 문화적 의의」, 『한국음악사학보』 65, 2020. 심승구, 「의암별제의 안과 밖」, 『한국음악사학보』 65, 2020.
김영희(金伶姬)